"그렇게 망할 줄 상상도 못했죠"…'종이접기 아저씨' 깜짝 과거

이고운 2024. 5. 5. 09:01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퇴사하고 시작하려던 사업이 그야말로 폭삭 망했습니다. 눈앞이 깜깜했을 때, 가로·세로 15㎝ 색종이를 우연히 만나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기회는 운명처럼 오니,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첫 에세이집 <코딱지 대장 김영만>을 낸 그는 최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구를 빌려 쓰는 80년 동안 도전하고 용기를 내라"고 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첫 에세이집 낸 '영원한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장
"틀려도 괜찮으니 포기하지 마세요"
사업 실패로 암담했던 30대 가장
운명처럼 만난 종이접기에 도전
'영원한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장. 임대철 기자


“퇴사하고 시작하려던 사업이 그야말로 폭삭 망했습니다. 눈앞이 깜깜했을 때, 가로·세로 15㎝ 색종이를 우연히 만나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기회는 운명처럼 오니,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종이접기 교육의 선구자인 김영만 종이문화재단 평생교육원장은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2000년대 초 출생자)에게 ‘영원한 종이접기 아저씨’다. 첫 에세이집 <코딱지 대장 김영만>을 낸 그는 최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구를 빌려 쓰는 80년 동안 도전하고 용기를 내라”고 했다.

▶처음부터 ‘코딱지들의 영원한 종이접기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직장인 시절도 있었네요.
미술대학 산업디자인과(당시는 도안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광고선전실에 입사했어요. 즐겁게 일했고, 승진도 빨랐어요. 그런데 당시 직장인으로서 디자이너의 수명은 다른 직군보다 짧았어요.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디자이너가 부장까지 진급하기 어려웠어요. 언제 ‘잘릴지’ 모르니까, 그때 고민을 많이 하다가 광고 기획사를 창업하기로 하고 퇴사했어요. 

▶그래도 퇴사 결정이 쉽진 않았을 텐데요.
요즘과 달리 그때는 취업이 잘 됐어요. 창업했다 안 풀리면 다시 취업해도 되니까. 또 그때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계획대로 창업이 풀리지 않았다고.
정신을 못 차릴 만큼 폭삭 망했어요. 그렇게 망할 줄 상상도 못했죠. 동업하기로 한 친구들과 가진 돈을 따져 보니 사업하기에 충분치 않았어요. 그래서 지인들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한 명이 투자자로 나섰죠. 
사무실 계약도 하고 시장 조사한다고 일본도 갔어요. 그런데 일본에서 머무르던 호텔로 전화가 온 거예요. 투자자가 주식투자를 했는데 실패해서 돈이 없다고. 내가 개인적으로 빌린 돈도 문제였고요.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내가 이 일(종이접기)을 하라고 생긴 일인지도요. 

▶종이접기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무엇인가요.
창업에 실패했을 때 32~33살로 젊었어요. 그때 도망가듯 일본으로 가서 친구 집에 머물렀어요. 그러다 친구 딸을 현지 유치원에 데려다줬는데, 창문으로 보니 아이들이 종이로 학을 접고 있더라고요. 친구 딸이 학을 접은 종이를 펴서 내가 다시 접어보려 했는데, 어렵더라고요. 내가 미술 전공자인데, 아이들이 하는 종이접기를 못 해서 절절맨다는 게 자존심 상했어요. 일단 귀국해서 밤에는 술도 마시고 신세타령도 하고(웃음), 낮에는 할 일이 없으니 종이접기를 했어요. 너무나 재미있고, 사명감이 생기더라고요.

▶종이접기가 당시 우리에게는 낯선 문화 아니었나요?
딱지, 치마저고리, 동서남북처럼 단순한 접기는 있었어요. 일반인들은 종이접기를 일본 오리가미 문화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밥벌이의 문제 앞에서 종이접기를 택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물론 자녀가 둘 있었으니,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고 도움을 받았어요. 약속한 기간이 딱 일 년이었어요. 그만큼 종이접기가 좋았어요. 15시간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어요.
국내에는 마땅히 참고할 책이 없어서, 일본에 다시 가서 종이접기 책을 라면상자 두 개 분량으로 사 왔어요.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다 접어봤죠.

▶종이접기가 언제, 어떻게 직업이 됐나요.
종이접기와 종이조형(종이 등을 이용해 여러 형태를 만드는 것)을 접목해 연구하면서, 전화번호부를 보며 서울의 유치원과 미술학원에 전화를 돌렸어요. 무료 강의를 제안했는데, 장사꾼 취급하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수십 군데서 거절당한 뒤 첫 수업을 할 기회를 얻었어요. 지금 같으면 그렇게까지 못 했을 것 같네요. 

▶좋아하는 일에 도전‘만’ 하면 성공할 수 있나요.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좋아서만은 아니에요. 정말 코피 터지는 노력을 했어요. 제가 뚝딱뚝딱 종이접기를 해낸다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우울증이 생길 만큼 힘들었어요. 목디스크도 있었고요. 종이접기 연구는 종일 했어요. 자동차 안, 식탁, 화장실 변기 물통 뚜껑 위에 색종이, 풀, 가위가 항상 있었어요.

▶도전하고 나서 정말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목표한 위치까지 올라가면 많이들 안주하게 돼요. 나도 방송 덕분에 생긴 유명세에 만족하고 그게 끝이었을 수 있죠. 그런데 그 자리를 지키려면 계속 발전해야 합니다. 이뤄놓은 거 지킬 생각 안 하고 ‘이제 됐다’며 멈추면, 밑으로 밑으로 정신없이 밀려 내려가게 돼요.

▶첫 에세이집을 낸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로·세로 15㎝ 색종이 한 장으로 시작해 여기까지 왔어요. 그동안 나를 사랑해준 친구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요즘은 망하는 게 두렵고 잃는 게 무서워서 도전 자체를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도전하고 나서 ‘잘못했구나’ 아는 거랑 도전 안 하는 건 큰 차이입니다. 도전하고 나서 실패했으면 공부하고, 다시 안 하면 되죠. 성공했으면 더 열심히 하면 되고요. 물론 지금 젊은이들이 처한 사회적 여건이 쉽지 않다는 점은 압니다. 그래도 무조건 해라, 하고 싶은 거 해라, 틀리면 어때 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우리가 지구 80년 빌려 쓰는 동안 도전하고 용기 내길 바랍니다. 우리 친구들이 포기하지 말길 바랍니다.

▶종이접기도 한번 틀리면 모양이 안 잡히는데, 인생에서도 그런 두려움이 있지 않나요.
어른이나 아이나 처음 종이접기 하면 잘 못 맞춰요. 시간 오래 걸리고 비뚤어지죠. 교육자가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면, 종이접기 안 한다고 해요. 조금 비뚤어졌다고 큰일 안 나는데요. 색종이에 보기 싫은 금 하나 생겼다고 아이에게 상처 줘서는 안 되죠. 틀려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청장년도 마찬가지예요. 가다가 안 되면 그걸로 되는 겁니다.
바쁜데 취미를 가질 수 있냐고 많이들 물어요. 전 찾으라고 합니다. 진정한 취미를 찾으면 직장을 그만두고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조언해 줍니다.

▶코딱지(어린이 시청자들의 애칭)들 상당수가 부모가 됐는데, 자녀교육법 조언 부탁드립니다.
아이와 부모가 공감대 가져야 합니다. 아이는 부모 공감대를 못 맞추지만 부모는 아이 공감대에 들어가는 게 가능하잖아요. 아이가 좋아하는 게임 배워서 점수 더 많이 내는 부모가 되세요. 아이들 세상에는 리더가 있고, 리더 말을 들어요. 부모기 리더 되면 부모에게 재량권 생기거든요.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해서 존경을 받게 되면, 아이가 말도 잘 듣게 됩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의 저출산 문제는 어떻게 보시나요.
결혼하지 않는 게 편한 사회가 된 듯해요. 그러니 누가 결혼해서 지금의 삶을 망가뜨리려 하겠어요. 그래도 나는 커플들에게는 결혼을 권하고, 다자녀 부모님들은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
노키즈존이라는 말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 아니었는데요. 아이들에게는 관용이 필요합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