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인사도 없이 떠난 ‘월드 리베로’ 여오현

오해원 기자 2024. 5. 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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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리베로’ 여오현은 단순히 한국에 그치지 않고 세계적인 기량을 뽐낸 리베로다. 한국배구연맹 제공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 문구는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흔히 사용한다. 과거가 있기에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기에 미래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적인 문장으로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프로배구 V리그는 2005년 출범해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실업배구로 열리던 한국 배구는 2005년 프로 체제로 바뀌어 20년째 치열한 경쟁을 이어오고 있다. V리그라는 이름 아래서 수 많은 선수가 구슬땀을 흘렸고, 배구팬은 선수의 동작 하나하나에 열광했다. 최근에는 한국에만 그치지 않고 아시아쿼터 도입과 함께 동남아시아까지 영향력을 키웠다. 덕분에 V리그를 주관하는 한국배구연맹은 지난 20년의 성장 과정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새로운 미래 20년을 위해 지난 20년의 과거를 살피는 과정이다.

V리그는 구단과 선수, 심판, 그리고 팬이 있기에 지난 20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2024년 4월 배구팬은 중요한 역사를 하나 잃었다. V리그 여자부 IBK기업은행은 지난달 26일 여오현 수석코치의 영입을 발표했다. 여오현은 1978년생, 우리 나이로 46살의 베테랑 선수. 언제 코트를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던 여오현은 그 흔한 현역 은퇴 발표 없이 전문 지도자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1978년생 여오현은 2023~2024시즌까지도 코트 안팎에서 선수로, 플레잉코치로 제 역할을 했다. 한국배구연맹 제공

여오현은 실업배구 시절이던 삼성화재에 입단해 2005년 V리그 출범을 함께했다. 2012∼2013시즌까지 삼성화재 유니폼을 입었던 배구선수 여오현은 2013∼2014시즌부터는 현대캐피탈에서 활약했다. 2015∼2016시즌부터는 플레잉코치로 코트 안팎에서 제 몫을 다했다. 그 결과 삼성화재 시절엔 5번의 정규리그 1위를 경험했고 챔피언결정전에서는 7번이나 우승했다. 현대캐피탈에서도 각각 2번의 정규리그 1위와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맛봤다.

여오현은 ‘월드 리베로’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리베로 포지션에서는 V리그 남자부는 물론, 한국배구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선수였다. 최근에는 아들뻘 후배들과 경쟁하면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코트에서 선보였다. 지난 20년의 V리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의 라이벌 구도를 모두 경험한 몇 안되는 선수라는 점에서 ‘선수’ 여오현의 가치는 더욱 값지다. 하지만 여오현은 자신의 자랑스러운 선수 경력의 마지막을 제대로 축하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IBK기업은행의 수석코치가 됐다.

현대캐피탈과 여오현의 결별은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최근 들어 출전 시간이 예전보다 크게 줄었다는 점에서, 또 오랜 시간 플레잉코치를 맡아 박경민이라는 훌륭한 대체 자원의 성장을 함께 했다는 점에서, 특히 현대캐피탈이 자유계약선수(FA) 오은렬을 대한항공에서 영입했다는 점에서 여오현과의 동행은 사실상 2024년이 마지막이었다.

V리그 여자부 IBK기업은행은 지난달 26일 김호철 감독을 보좌할 새 수석코치로 여오현을 선임했다. IBK기업은행 SNS 캡처

물론 V리그 남자부에는 여전히 ‘선수’ 여오현을 원하는 팀도 있었다. 하지만 여오현은 자신의 첫 번째 소속팀이었던 삼성화재보다 더 오랫동안 V리그에서 몸 담았던 현대캐피탈을 끝으로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여오현에게는 그동안 자신을 응원했던 배구팬을 향한 마지막 의리였다.

이 과정에서 궁금한 것은 V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마케팅 기술을 가진 팀이라고 평가받았던 현대캐피탈이 여오현과의 마지막을 이처럼 허무하게 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현대캐피탈의 마케팅 능력은 과거 배구뿐 아니라 타 종목에서도 배우기 위해 천안 유관순체육관을 방문했을 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여오현과의 마지막은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다. 현대캐피탈은 IBK기업은행이 수석코치 선임 소식을 알리자 뒤늦게 SNS를 통해 결별 소식을 전했을 뿐이다.

현대캐피탈과 여오현의 이별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물론 여오현의 팀 이탈은 그 동안 V리그를 거친 수 많은 선수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여오현은 그저 선수 한 명으로 취급할 선수가 아니지 않는가. 현대캐피탈의, 아니 한국 남자배구의 간판이었던 선수와 그를 응원하던 배구팬이 마지막 인사를 나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배구특별시’를 자처하는 현대캐피탈의 연고지 천안과 전국의 수 많은 배구팬을 무시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2005년 V리그 출범 당시 삼성화재 소속이던 여오현(왼쪽). 당시 신진식(가운데), 김세진(오른쪽), 김상우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삼성화재 전성기를 함께 했다. 한국배구연맹 제공

코트 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가졌던 선수의 마지막이 이토록 보잘 것 없다면 앞으로 어느 선수가 현대캐피탈을 V리그를 선도하는 팀이라고 생각하고 유니폼을 입을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아직 현대캐피탈에는 문성민과 박상하, 최민호, 전광인과 같은 베테랑이 아직 많이 남았다. 과연 이들은 선배의 마지막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들보다 향후 배구선수를 꿈꾸는 유망주를 위해서라도 배구선수 여오현의 마지막은 지금보다 모범이 됐어야 했다. 마치 쓸모 없어진 소지품을 대하듯 한국 남자배구의 전설과의 마지막을 취급한다면 현대캐피탈의 과거 영광 역시 그저 추억으로만 기억될 수도 있다. V리그의 향후 20년은 과거 20년이 있기에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기억을 그저 현재 가치가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폐기한다면 과연 더 나은 미래를 맞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든다.

현대캐피탈은 구단 내부적으로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다.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명장 필리프 블랑을 영입하며 선수단 세대교체를 진행하는 등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V리그에서 수 없이 많은 새로운 시도를 해왔던 현대캐피탈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하지만 그 출발점부터 매끄럽지 않은 것이 아쉬울 뿐이다.

오해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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