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의 정치사기]조선시대 군역문제를 통해 본 `채상병 특검`

김세희 2024. 5. 5.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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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군역패. 군역자 신분확인용으로 제작된 패다. 양쪽 면에 음각 글자가 있고 상단에 구멍이 1개 있다. 군역자 이름은 강진흥이고 보은면에 거주했던 것으로 확인된다.<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한국민속박물관>

1636년 인조 14년 8월 20일, 대사간 윤황이 임금에게 군대의 기강에 관한 글을 올렸다. 윤황은 "양민들이 군역을 마치 구덩이 속에 파묻혀 죽는 것처럼 생각해 온갖 구실과 핑계를 대서 빠져나간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군대는 폐단이 많았다. 양인 남자라면 원칙적으로 16~60세까지 복무했으며, 하급 군인들은 월급을 받지 못했다. 종종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나 복장도 스스로 마련했다. 1657년 <효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군대의 장비가 조금이라도 정밀하고 예리하지 못하거나 의복이 조금이라도 깨끗하지 못하면, 영장이 순시를 하다가 낭자하게 매를 친다. 때문에 혹 소나 말을 전당잡히거나 혹 전을 팔아서 병장기·군복·군량 등을 마련한다"고 나와 있다. 군인의 경제적 부담이 상당히 심했던 것이다.

도시 시설 유지와 운영에 필요한 각종 역에도 동원됐고, 군인들 사이에 신고식 관행과 가혹행위도 있었다. 1632년 <인조실록> 기록에는 군인들이 포악한 지휘관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보고가 나와 있다. 당시 사간원은 인조에게 "전라병사 신경유는 본직을 제수받고 나서도 옛날처럼 제멋대로 방자해 도내에 있는 군사들의 마음을 크게 잃었으니 파직해 서용하면 안된다"고 보고했다. 신경유는 황해도 병사로 재직했던 시절에는 군인들을 자주 노역에 동원해 문제가 됐던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많은 군인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해 탈영했다.

엄청나게 긴 복무 기간을 견뎌야 하는 양인들이 느끼는 괴로움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심지어 군대를 가기 싫어서 신분상승을 거절하는 사례도 있었다. 1473년 성종 4년 천민이었다가 '이시애의 난'(1467년) 때 진압군에 자원 종군한 공로로 양인이 된 손장수라는 인물이 대표적이다. 당시 손장수는 "다시 천민이 되겠다"는 애절한 사연을 담은 소장을 병조에 제출했다. "너무 가난해서 병역을 감당할 수 없으니 제발 성균관의 노비로 살게 해달라"는 호소였는데, 성종은 "그러라"고 윤허했다. 얼마나 병역이 괴로웠으면 차라리 노비의 신분이 낫다고 했을까. 신분에 따라 군대 편성이나 처우가 다르고, 내부 병폐도 계속 은폐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군대는 어떨까. 2개월~1년 정도의 교대 근무라도 일생의 대부분을 군역에 메어 있어야 하는 조선과 비교하면 복무 기간은 상당히 짧다. 18~21개월만 근무하면 군대와는 '완전한 이별'을 한다. 그러나 아무리 편해도, 아무리 짧아도 군대 생활이 고달프다고 느끼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창 꿈의 나래를 펼쳐야 할 20대 나이에 모든 것을 일정 기간 국가를 위해 바쳐야 하는 현실은 달갑지만은 않다.

부모 입장도 마찬가지다. 군대 안팎의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은 상황에서 아들을 군대에 보내야 하는 현실은 불편하기 그지없다. 행여 자식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복무 기간 내내 노심초사하고, 아들의 건강을 걱정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아들이 군대를 면제 받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군대에서 큰 사고가 잃어났다. 2023년 7월 19일 오전 9시 10분께 폭우 사태 지역인 경북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의 내성천 보문교 일대에서 실종자 수색 작전 중 해병대 제1사단 포병여단 제7포병대대 소속 채수근 일병이 급류에 휩쓸려 실종됐다가 14시간 만에 사망한 채 발견됐다. 이른바 '채상병 사건'이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집중 호우로 물살이 거셌지만 채 상병을 비롯한 장병들은 구명조끼를 지급받지 못했다. 수색 작업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은 군의 안전 불감증이 개탄스러울 정도다.

더 기가 막혔던 것은 이 사건과 관련해 외압 의혹이 제기됐다는 점이다. 당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등 간부 8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이첩하려 했는데, 이를 보류시키고 혐의자를 2명으로 줄이는 과정에서 대통령실 등 윗선이 개입했다는 게 의혹의 골자다.

참으로 기가막힌 현실이다.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복무를 한 청년의 사고가 이런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른것 자체가 참담하다. 사고 전이나 후나 상식적인 조치만 따랐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채 상병이 수색 당시 구명조끼를 입었거나, 법과 원칙대로 사건처리가 진행됐으면 논란이 불거질 이유가 전혀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민도 이 사건에 국한해서는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관련수사를 하고 있어도 국민은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채상병 특검법 찬성 여론'이 높게 나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결국 거야인 더불어민주당은 2일 국회 본회의에서 채상병 특검법을 강행처리했다.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안건을 의석수로 밀어붙여 처리했기 때문에 '입법폭주'라는 지적도 나온다. 여당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재의요구권(거부권)을 건의하겠다고 맞불을 놓고 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이번에는 거부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미 채상병 사건의 피의자 신분인 이종섭 전 국방장관을 호주대사로 내보낸 것으로도 이미 명분을 잃은 상태다. 현재까지 이 사건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성명도 내놓지 않고 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견디고 있는 채상병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하길 바란다. 김세희기자 saehee01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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