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영, 차관에 DJ 동향 최성홍 대신 고교 후배 반기문 발탁했다가 낙마”

이하원 외교담당 에디터 2024. 5. 5.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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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5회>]
이재춘 전 대사 “정권 실세들이 호남 인물 중
외무차관 발탁 요구했으나 홍순영 장관이 거부해 화근”
외교부 일각 “홍 장관은 무책임한 원칙주의자.
조직 차원에서 권력 실세들을 상대했어야 했다”

[조선일보 외교부-민주당 출입기자·한나라당 취재반장·외교안보팀장·워싱턴-도쿄 특파원·국제부장·논설위원과 TV조선 정치부장으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를 25년간 취재해왔습니다. 주요 사안의 막전막후에서 취재한 비사를 전해드립니다.]

이재춘 외무부 제1차관보와 윈스턴 로드 美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지난 1995년 2월 23일 오전 외무부 회의실에서 美北 핵합의 이행 문제 등과 관련 한미간 고위실무협의를 갖고 있다./연합뉴스

지난 회(해외 순방 준비하다 개각 22분 전 알았다, 홍순영 외교장관 경질 내막. 4월28일자)에서 기술한 것처럼 2000년 1월 홍순영 외교부 장관의 갑작스러운 경질 배경은 김대중 정권 권력 실세들의 인사 청탁을 거부, 오만하다고 낙인찍힌 것이었습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고향 출신의 최성홍 주영대사를 차관에 기용하지 않은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분석도 있었는데, 실제로 이런 관측을 담은 책이 출간됐습니다.

이재춘 대사 회고록 '외교관으로 산다는 것'.

이재춘 전 주러시아 대사는 2011년 펴낸 회고록 ‘외교관으로 산다는 것’에서 자신이 DJ 정권에 의해 차관 후보에서 배제되며 홍 장관이 경질된 사건에 대해 밝혔습니다. 이 대사는 “(홍순영 장관 경질과 후임에 이정빈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기용) 내막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호남 인맥의 중용이라는 요인 외에 인사 문제로 홍 장관이 김 대통령의 뜻을 거슬렀다는 청와대 측근들의 항거가 그 이유”라고 했습니다. 그는 “당시 정권 실세들이 집단적으로 호남 인물 중에서 외무차관을 발탁하라고 집요하게 요구해왔지만 홍 장관이 끝까지 이를 거부한 것이 화근”이라며 이 때문에 “어부지리를 본 것은 반기문 주오스트리아대사 (이후에 외교부 장관·유엔 사무총장 역임)”라고 했습니다.

이 대사의 분석은 당시 상황을 잘 반영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 대사가 ‘호남 인물 중에서 외무 차관 발탁’으로 언급한 외교관은 나중에 DJ 정부 마지막 외교부 장관이 된 최성홍 당시 주영 대사입니다. 최 대사는 DJ와 같은 전남 신안군 출신으로 목포고, 서울법대를 졸업했습니다. DJ 정부에서 차관보로 발탁되면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DJ는 1998년 취임 후 한 회의에서 “젊었을 때 내 고향 바로 옆 섬에서 신동이 났다는 소문을 들었는 데, 그게 바로 최성홍 차관보”라고 말하며 그에 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DJ 정부에서 그가 차관이 될 것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DJ는 홍 장관이 그를 차관으로 지명해 주기를 바랐다는 관측도 있었습니다.

지난 2002년 10월 5일 방북을 마치고 방한한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최성홍 외교통상부 장관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조선일보 DB

외교관 최성홍은 DJ와 같은 전남 신안군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역대 정권에서 능력에 비해 불이익을 당했다는 평을 받아왔습니다. 최 대사는 외무고시 3회 수석합격했으며 1987년 ‘키신저의 사상과 표현’ 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지만, 차관보가 되기 전에는 중책을 거의 맡지 못했습니다. 장관이 된 후 저에게 “젊었을 때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4 강국 중 어느 한 나라도 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외교부에서 주목받은 것은 1996년 헝가리 대사로 있다가 유엔 차석대사로 발탁된 특이한 경력 때문입니다. 한국은 당시 처음으로 유엔 안보리 이사국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유엔대표부 진용을 대폭 보강합니다. 당시 박수길 주유엔대사가 상당한 수준의 영어실력과 교섭 능력을 갖춘 그를 자신을 보좌하는 ‘넘버2′로 기용해 안보리 이사국으로 활동하는 데 문제가 없도록 했습니다. 박 대사가 당시 유종하 외무장관에게 최성홍 차석대사를 차관보나 외교정책실장에 기용하라고 권하자 유 장관이 “내 힘으로는 어렵다. 쉽지 않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하지만 홍 장관은 최 대사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매사 똑 부러지는 스타일의 홍순영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며 조용한 선비를 연상시키는 최성홍은 잘 맞지 않았습니다. 홍 장관은 1998년 8월 장관이 된 후 반년 만에 최성홍을 주영 대사로 내보내고, 이후 여권 실세들의 요구에도 그를 차관에 기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권력 실세들의 거듭된 요구가 자존심이 강한 홍 장관을 반발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해 9월 12일 오전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 '평화와 통합의 세계 지도자 김대중·브란트·만델라' 국제학술회의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충주고 후배 반기문 대사 차관에 내정해 DJ 재가 요청

어쨌든 홍 장관이 2000년 1월 자신의 충주고 후배인 반기문 주오스트리아 대사를 차관에 내정한 것은 권력 핵심부와의 관계를 악화시켰습니다. 홍 장관은 사실 처음부터 반 대사를 차관에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초 홍 장관은 차관에 이재춘 당시 주 EU 대사를 염두에 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대사는 외무고시 1회 선두주자라는 상징성이 있으며 제1차관보를 역임, 적임자로 판단했다고 합니다.

외교관 이재춘은 주일 대사관 1등 서기관, 동북아 1과장, 주미대사관 참사관, 주일대사관 참사관, 아주국장(현 동북아국장), 주일 공사 등 화려한 경력과 출중한 실력을 갖췄습니다. 그러나 여권에서 이재춘 대사 기용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이 대사는 1995년 ‘외교문서 변조사건’이 일어났을 때 외무부 제1차관보를 맡아 당시 야당이던 국민회의 측과 강하게 대립, 기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외교문서 변조 사건 관련 비사는 나중에 연재합니다)

결국 홍 장관은 이런 상황에서 ‘반기문 차관’안을 직접 김 대통령에게 들고 가서 재가를 받아버렸습니다. 마침 박주선 법무비서관의 사임으로 민정기능이 마비된 상태여서, 미처 여권에서 이를 막을 틈도 없었을 정도로 전격적이었습니다.

홍 장관은 권력 핵심도 아니면서 권력 실세들의 청탁을 모두 거부할 정도로 단호했습니다. 외교부에서는 그가 당당한 외교관의 모습을 보여줬으며 소신을 지키다가 교체된 장관으로 기억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당시 일부 외교관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몇몇 간부들이 홍 장관에 대해 비판적 해석을 한 것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외교부에서 요직을 역임한 Q씨는 그를 ‘무책임한 원칙주의자’로 평가했습니다. “홍 장관의 지나친 원칙주의는 외교부 조직을 위해서 좋지 않다. 장관 한 번 바뀌면 대외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다. 김대중 정부 출범 2년 만에 세 차례 외교부 장관이 임명된 현실을 과연 외국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외국에서 아예 우리를 상대하려 들지 않는다. 홍 장관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 조직 차원에서 권력 실세들을 상대했어야 했다.” 홍 장관이 외교부의 기강을 해치지 않는 최소 범위에서 권력 실세들의 ‘부탁’을 일부 들어주더라도 조직을 온전히 보전하도록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홍 장관 경질을 계기로 청와대는 “외교부가 개혁돼야 한다” 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내놓았는데, 상당수 외교관은 이를 강골(强骨) 외교 수장이 있을 때는 시도하지 못했던 ‘외교부 흔들기’로 인식했습니다. 이정빈 신임 장관도 취임 일성으로 외교부가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외교부 장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장관이 권력과 줄타기를 하는데, 유독 이로 인한 마찰음이 컸던 것이 2000년대 초반 외교부 풍경이었습니다.

P.S.

1. 홍순영은 외교부 장관에 이어서 통일부 장관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외교부 장관 때는 권력 실세들과 불화로 경질당했는데, 통일부 장관 때는 북한에 밉보여 교체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주중 대사를 거쳐 2001년 9월 통일부 장관에 임명된 그는 북한의 ‘떼쓰기’ 행태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상호주의에 기반한 협상 원칙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2001년 12월에는 BBC, CNN 방송 인터뷰에서 ‘북한의 호전세력’을 비판했습니다. 북한은 즉각 홍 장관 교체를 요구했고, 김대중 정부는 2002년 1월 임명 4개월 만에 그를 경질했습니다. 북한 정권의 하명(下命)에 우리 장관이 바뀐 첫 케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2. 결과적으로 홍순영 장관은 2000년 반기문 당시 주오스트리아 대사를 차관으로 발탁, 나중에 우리나라가 유엔 사무총장이 될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이재춘 대사의 회고에 따르면 반 대사는 자신은 당시 차관이 못 되고, 주러시아 대사로 부임하는 줄 알고 있었답니다. 이 대사가 차관 내정 축하 전화를 하자 “일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반문했다고 했는데, 이 대사는 “반 대사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봤다”고 했습니다. 주러시아대사에는 이재춘씨가 2000년 2월 부임합니다.

<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는 다음주 일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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