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역사, 고작 1000년?”…2000년 전통의 ‘이것’, 알고보니 체코 대표 술이었네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4. 5. 4.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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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인들에게 와인이란? 와인은 기호품이기 전에 식수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땅이 꺼져도, 지구 백바퀴를 돌아도, 내 마음은 언제나 밀루유떼(Miluju te)”

혹시 밀루유떼(Miluju te)라는 말을 아시나요? ‘사랑한다’는 뜻을 담은 체코어인데요. 지난 2005년 최고 시청률 31%를 기록하며 팬들에게 ‘소원의벽 앓이’를 일으켰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덕분에 우리나라에도 알려졌습니다.

체코는 ‘동유럽의 숨은 보석’으로 불립니다. 지난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1989년 벨벳 혁명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뤄내기까지 힘든 시기를 거치며 국제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기 때문인데요. 혁명 이후 30여년, 어느덧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역사 건축물과 경관을 잘 보존한 관광지로 발돋움 했습니다.

비단 드라마나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체코의 대표적인 상품을 즐기고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마셔봤을만한 라거와 스타우트를 대표하는 두 맥주 브랜드,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과 코젤(Kozek)입니다. 체코의 맥주 산업은 공식적인 기록으로 확인되는 역사만 1000년이 넘을 정도로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이들이 ‘체코=맥주’라는 공식을 쉽게 떠올립니다만, 알고 보면 체코의 와인 산업은 고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맥주보다 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2000년 전 로마인들이 그 넓은 영토 중 왜 굳이 체코 땅에서 와인을 양조했을까요?

로마군이 시작한 포도 경작
체코 와인의 주산지였던 남부에서는 지금도 집집마다 지하에 와인저장고를 보유할 정도로 뿌리깊은 와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중세 시대 체코 와인은 인접국인 폴란드, 오스트리아의 귀족들이 사랑한 최고의 와인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상술했듯, 최초로 체코 땅에 포도를 재배한 것은 기원후 2세기 무렵 로마인이었습니다. 당시 이 지역을 점령하던 로마 군단이 체코 남부 미쿨로프(Mikulov) 팔라바(Palava) 언덕에 대규모 전초 기지를 세우면서 입니다.

역사에 따르면, 278년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Marcus Aurelius Probus) 황제가 알프스 북쪽에 포도 재배를 금하는 도미티아누스(Domitian) 황제의 명령을 취소시키면서 팔라바 지역에서 포도 재배 및 와인 양조를 할 것을 권장했다고 합니다. 그 증거로 팔라바(Palava) 평원 근처에서 당시에 사용됐던 포도 재배 전용 칼과 포도 씨앗이 발견되기도 했죠.

와인은 당시로서는 매우 중요한 생필품이자 교역품이었습니다. 로마는 속국들에게 팔아 교역 이득을 챙기는 품목 중 하나로 와인을 적극 활용했는데요. 와인이 그 속국에서도 생산되면 판매량이 줄겠죠. 그래서 초창기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당시 로마인들에게 심리적 마지노선인 알프스 북쪽에서의 포도 재배를 금지한 겁니다.

근데 이 명령이 취소됩니다. 이유는 당시 로마군의 보급 때문이었습니다. 로마군은 식수로 1인당 매일 1리터에 달하는 포도주(포스카)를 보급받았습니다.

하지만 영토가 급격하게 확장함에 따라 보급로가 너무 길어지게 됐고, 이는 곧 제국에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차라리 현지에서 보급을 조달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 겁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둔전(屯田)인 셈입니다.

체코 와인 생산 지역 지도. 통상 와인 업계에서는 49도선을 포도가 제대로 생장할 수 있는 한계선으로 본다. 체코 남부에 와인 생산지가 몰려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체코의 서쪽과 남쪽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맞닿아있다. vinarskecentrum.cz 캡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영향
이렇게 체코 지역에 포도가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이때부터 꾸준히 포도가 재배됐지만, 초창기에는 대량 생산을 위한 재배보다는 개인적인 소규모 농사에 그쳤습니다.

본격적으로 문서에 이 지역의 와인 양조 흔적이 다시 나타난 것은 875년께 모라비아 스바토프루크 왕자(Prince Svatopluk)가 보헤미아 지방 보르지보이 왕자(Prince Borivoj)의 아들 탄생을 축하하며 와인을 보내면서 입니다.

보르지보이 왕자의 아내인 루드밀라(Ludmila)가 이 와인의 일부를 비로 내려달라는 기원의 뜻을 담아 ‘수확의 신’인 크로시녜(Krosyne)에게 바쳤고, 실제로 농사가 잘 되자 그녀와 보르보이 왕자는 보헤미아 지역 멜니크(Melnik)에서 본격적인 포도 재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손자가 바로 ‘곡식과 와인의 성인’이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수호성인인 성 바츨라프(St. Wencelas)인데요. 체코인들은 지금까지도 그를 기리는 성 바츨라프 축제를 매년 9월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라비아와 보헤미아는 지금까지도 체코 와인법으로 지정된 주요 와인 산지 입니다.

이후 13세기 무렵 인접 와인 선진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부터 주요 품종은 물론 포도밭 경작과 양조 방법까지 도입하고, 비옥한 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체코 와인 산업은 황금기를 맞이하죠. 이러한 영향 때문에 체코 와인의 대부분은 화이트 와인, 그중에서도 리슬링(독일)과 그뤼너 벨트리너(오스트리아) 품종이 주력 품종으로 자리잡습니다.

프라하 시내 바츨라프 광장에 세워진 성 바츨라프 동상. 우리로 치면 광화문에 세워진 충무공상과 같은 개념이다.
소련 해체 이후 기지개 핀 와인 산업
동유럽에서 유명세를 떨치던 체코의 와인 산업은 1900년대에 들어서 또 한번 대격변을 맞이합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통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을 겪는가 하면, 체코 정권이 끝내 공산권으로 이어지면서 입니다. 덩달아 와인 산업도 소련이 구축한 ‘철의 장막’ 뒤에 가려지면서 급격한 쇠퇴기를 맞이합니다.

이후 체코 와인은 수십년 간 집단농장 등으로 절멸하다시피했지만, 1989년 벨벳 혁명 이후 다시 싹을 틔웁니다. 체코가 공산권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면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와인 산업의 부가가치 창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된 것이죠.

현재는 1995년 제정된 ‘와인법’에 따라 지리적 표시를 하는 와인 산지(프랑스의 AOC 개념)를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2곳으로 지정하는 등 서구의 체계적인 와인 시스템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생산되는 와인의 대부분(96%)은 모라비아에서 나오고, 1만9000㏊ 정도의 포도 재배 면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축약하자면 체코 와이너리들은 2000년에 가까운 역사와 전통을 지녔지만, 1900년대에 있었던 수십년의 암흑기 덕분에 오히려 유럽의 그 어느 지역보다 최신식 양조 설비와 방식을 보유하게 됐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체코 와인은 와인 산업의 발전 속도도 빠르고, 요즘 트렌드에도 민감한 편입니다. 신(新) 구(舊) 조화를 통해 ‘힙’한 와인으로 거듭났다고 볼 수 있겠죠.

1989년 벨벳 혁명 당시 체코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 사진=David Turnley/CORBIS
최신 트렌드를 잘 읽은 전략적 선택
체코 남부 모라비아의 주요 도시인 브루노(Brno)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쿠르데요프(Kurdejov) 마을에 위치한 그루다우 와이너리(Vinarstvi Gurdau) 역시 이런 체코 와인의 역사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쿠르데요프 마을은 1200년대부터 포도를 생산하고 수출한 기록이 남아있지만, 중세를 거쳐 근현대에서 오랜 시간 버려진 마을이었습니다. 다시 양조를 시작한 것은 현재 그루다우 와이너리의 오너인 호트가(家)가 2012년 와이너리를 설립하면서 입니다.

현대식 와이너리로 완공된 것은 불과 2년 전인 2022년이죠. 그런데 새로 만든 와이너리의 면모가 놀랍습니다. 유럽 주요 와인 생산 국가들의 핵심 와이너리들 못지 않은 현대식 공정을 도입하고, 요새 트렌드인 환경을 고려한 지속가능성(sustainibility)을 염두에 둔 장치들이 요소마다 빛납니다.

대량 생산을 할 수 있는 넓은 땅이 있지만, 전부를 활용하지 않고 일부만 이용하는 식으로 환경과 포도밭의 조화를 강조하고요. 언덕 위 와이너리 건물을 지으면서 지하로 파고 내려가 건물 윗부분에도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와이너리 건물 어디에도 에어컨이 없다는 것도 이런 자연주의의 발로입니다.

그루다우 와이너리의 건물. 건물이 환경에 주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넓은 포도밭 한가운데에 땅을 깊이 파고 건물을 지은 후 상부에 일반 식물을 식재했다. 그들은 ‘den(굴)’이라고 부른다. 휴양지로서 체코는 물론 인접 국가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좋다. 그루다우 와이너리 제공.
와이너리에서 양봉장을 직접 운영하기도 합니다. 꿀벌은 포도꽃을 수분시키는데에 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건강하고 깨끗한 환경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하나의 인증이 된다는 설명입니다.

그루다우 와이너리의 오너이자 양조자인 호트(Mr.Hort)씨는“많은 사람들에게는 유기농 인증이 중요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꿀벌이 최고의 인증(the bees are the best certification)”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친환경 자연주의의 영향일까요. 그루다우에서 생산된 와인은 자연의 맛을 충실히 담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돋보입니다. 호트씨는 “와인은 포도밭에서 만들어지고, 우리는 와인 양조 대부분(90% 이상)의 시간을 포도밭에서 보낸다”며 “우리가 실제로 통제하는 것은 발효 중 온도뿐”이라고 강조합니다.

큰 자본이 투자된 와이너리가 10년여 만에야 겨우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는데도, 판매보다 제대로된 고품질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와이너리의 철학도 돋보입니다. 그는 “현재 연간 5만병 정도를 생산하고 있지만, 생산량을 6만병 전후로 제한할 생각”이라며 “우리 땅에서 역사적으로 재배돼온 품종을 클래식하게 현대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에 집중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루다우 와이너리 포도밭의 다양한 토양층을 보여주는 사진. 와이너리는 포도나무의 뿌리를 깊게 내리도록 해서 다양한 토양의 캐릭터가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루다우 와이너리 제공.
실제로 맛본 그루다우 리슬링과 그뤼너 벨트리너는 신선하고 깔끔·상큼한 과일 풍미와 적당한 미네랄리티, 옅은 내추럴 뉘앙스가 돋보였습니다. 다른 와이너리처럼 양조의 기술을 강조하기보다 자연 그대로를 담으려고 노력한 덕분에 깨끗함이 특징이죠.

물론 맛과 향의 실타래를 쫓다보면 아주 섬세한 매력이 나타나서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특히 음식과 함께할 때 시너지 효과가 기대되는 와인입니다.

와인 전문 비평가이자 작가인 스튜어트 피고(Stuart Pigot)는 그루다우 와인에 대해 “바카우(Wachau·오스트리아의 주요 와인 산지, 리슬링과 그뤼너 벨트리너를 주로 생산) 와인이 떠오르지만, 더 신선하다. 같은 품종 와인 중 최고 수준의 품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아직 계절 분류상 봄이 한달이나 남았지만, 요즘 날씨는 사실상 초여름에 접어든 듯 합니다. 날이 더워지면 시원한 음료를 찾기 마련이죠. 거기에 청량감을 더해줄 탄산이 함께한다면 금상첨화일 겁니다.

‘퇴근하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이라는 친구들의 부름이 잦아지는 늦봄, 이번 모임에는 맥주 대신 청량한 화이트 와인 어떠신가요? 아름답고 서늘한, 그리고 아직 과거의 풋풋함이 느껴지는 체코의 자연을 닮은 와인은 좋은 선택이 될 겁니다.

*방한한 그루다우 와이너리 오너 호트씨와의 인터뷰를 재구성 했습니다.

**와인프릭이 한주 쉬어갑니다. 필자가 CWI(캘리포니아와인협회) 초청으로 일주일 간 지속가능생산과 관련한 서밋에 참석합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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