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용정 그리고 근대 풍경] ⑦ 80년 전, 직업에 대한 이야기

박미현 2024. 5. 4.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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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심연수(1918~1945)는 국권이 없는 시대에 짧은 생애를 살면서 290여 편의 시와 소설, 수필, 평론을 한글문학으로 남겼다. 불운한 시대는 강릉에서 태어난 그를 러시아, 중국, 일본 이주하는 삶으로 이끌었으나 언제나 문학과 함께였다. 광복 직전에 중국 왕청현에서 불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육필원고, 편지, 공책, 수첩, 일기, 도서, 사진, 스크랩 등 다양한 유품은 중국에 남은 유족에 의해 잘 간수됐다가 지금은 강릉의 품으로 돌아왔다. 조카 심상만씨에 의해 고국에 안긴 600점 가까운 자료는 2023년 말 『심연수문학사료전집』(강릉문화원·심연수기념사업회·강원도민일보)으로 완간됐다. 이 자료를 직접 정리할 기회를 가졌던 필자는 그가 남긴 작품원고, 생활기록, 유품을 소개하며 스산했던 시대에 한 시인을 넘어 강원인 이주사를 공유하려 한다.

⑦ 80년 전 직업에 대한 소감

심연수는 만주 용정국민고등학교 졸업학년인 4학년이던 1940년 일기집에 졸업 후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있다. 3월과 4월 일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1940년 3월 6일 백림사진관에 가서 졸업앨범 사진을 찍었는데, 이날 체조교사의 조언이 인상적이었는지 그날자 일기에 적고 있다.

“인생은 잘살며 목적을 도달하려면 노력하여야 한다고 하섯다. 그러고 사람은 다 고천(高賤)의 직업이 없다. 또 누구든지 하면은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혹 사람은 자기를 과소평가하야 늘 부진의 환경에서 헤매게 된다. 이것도 한 가지 주의할 바이다”

라고 남기고 있다. 노력이 중요한 것은 물론이지만, 오히려 도전해보기도 전에 어려운 처지나 자기 능력 부족을 탓해 포기할 수 있음을 우려하고 긍정적인 기운을 불어넣는 조언이었음을 엿보게한다. 3월 30일 일기에서는 목적도 없이 이 곳 저 곳 돌아다닌 것을 ‘참으로 승겁기 짝이 없다’라고 반성하며 ‘사람은 직업을 가져야 되겟다’라는 다짐을 하고 있다.

직업에 대한 고민이 좀 더 깊어졌음을 4월 7일 일기가 알려준다. ‘귀천을 물론하고 직업이 있어야 하겟다’라며 “나의 심신에 맞는 직업은 어떤 것일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무료하게 집에서 보내는 것이 싫어 밖으로 나다니던 것을 접고, 그동안 느낀 것을 써보겠다며 ‘서류’라는 소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썼던 날이다.

1940년 4월 7일 일요일 청

집에서 있는 것은 너무나 싫은 일이다

모두가 할 일 없는 것인 까닭이다.

오날은 될 수 있는 대로 집에서 있어보려고 일거

리를 얻엇다.

내가 늑긴 것을 써보려고 서류란 것을 쓰다

해가 가는 것을 알지 못하엿다.

옳다 세상에서 삶을 얻으려면 누구든지

귀천을 물론하고 직업이 있어야

하겟다 직업은 낙천적이여야 한다

자기가 종사하는 것을 저가시하

는 것은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사람

염세적인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은 아직 직업의 없스니

미정이다 그러니 앞날에 나의

심신에 맞는 직업은 어떤 것일가?



이런 고민과 호기심은 직업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풀어내는 수필 쓰기로 이어졌다. 여러 직업 생활에 대한 모습을 흥미롭게 써서 ‘직업 생활 만태’를 남겼다. 산문 ‘직업 생활 만태’는 ‘문집’이라는 제목의 기성품 원고형 노트에 썼다. 이 원고집 맨 앞에는 표제를 ‘빈사초(濱砂草)’라고 한 창작시조 8편을 육필로 적었다. 고향 강릉을 떠난지 15년 만인 1940년 8월 경포호 인근 마을인 난곡동을 찾아 경포대와 해변을 거니는 등 심상을 담은 시조이다. 이어 수필 ‘원단’ ‘생(生)’ ‘사(死) ‘직업생활만태’ 순으로 엮였다.

17쪽에 걸친 직업생활만태에 등장한 직업은 모두 14종이다. 흥미와 풍자를 더해 쓴 글이라 슬몃 웃으며 읽을 수 있다. 동시에 자본주의적 산업 방식에 눈을 뜬 당대 사람들의 직업에 대한 사고방식을 엿보게 한다.

가장 먼저 소개한 직업은 부모와 조부모의 생업이자 흔하고 전형적인 농부였다. 다음 공장노동자, 회사사장, 사원, 소사로 이어지고 있다. 배달하는 직업으로는 우편 배달과 국수 배달이 소개됐다. 기술직업인으로는 6종이 등장하고 있는데, 당시 기술직 직업에 대해서는 ‘쟁이’라고 부르며 양복점쟁이, 도장쟁이, 시계수선쟁이, 사진쟁이, 양화점쟁이, 모자점쟁이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장터나 거리에서 인파를 불러모아 약을 팔았던 약장사가 맨 마지막에 나온다.

80여 년전 당시 직업에 대한 위상은 지금과 달랐음은 물론이다. 지금은 사라진 여러 직업이 등장해 근대 풍물을 알려준다. 회사에서 사무직 사원으로 근무하는 것을 번듯한 직업으로 여겼던 세태에 대해 꼬집고 있다. ‘소사’라는 직업이 등장한다. 소속한 곳에서 여러 잡일을 가리지 않고 담당했던 소사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불러대며 응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보낸다. 근대문물인 시계가 들어오면서 수리서비스가 새 직업으로 등장했는데 시계가 얼른 고장나길 바라는 심사를 비틀고 있다.

▲ 심연수 시인 사료 원문 [심상만 소장본 강릉문화원 제공]

직업생활만태

(농부)

좋은 땅 얻어서 많이 븣이려는 慾心(욕심)은 農夫(농부)

의 最大希望(최대희망)이다? 그러나 마음과 같이 될 수 없

는 것은 어쩐 일이냐 祖先부터인 그같은 生活(생활)

은 아들 손자 대대로 農夫(농부)이면 똑같을 것이

다? 純良(순량)한 慾心(욕심)쟁이라 하고십다?



(공장노동자)

남과 같이 살려는 慾望(욕망)에 밤낮 工場(공장)의 機(기)

械(계)노릇을 하여도 죽을 때까지 버-ㄴ한 빛난 生(생)

活(활)을 못하여 보고 기름 투성이 꾸여진 옷에 감

긴 몸은 一生(일생)을 그 모양일 것같다?



(회사사장)

週轉楊子(주전양자)의 綠色(녹색) 天?絨(천아융)이 柔(유)한 彈力(탄력) 우에

뚱?(뚱뚱)한 몸을 파뭇고 담배연기만 실오리처럼

뽑는 社長(사장)의 얼골에는 紙幣(지폐)에 눈이 어둔

그 두개의 눈이 있고 社員(사원)이 애쓰며 일하는

事務室(사무실)의 일소리를 들으며 앉는 꼴은 마치

偶像(우상)같은 感(감)이 나도록 閑暇(한가)하다?


 

▲ 심연수 시인 사료 원문 [심상만 소장본 강릉문화원 제공]

(국수배달)

목판에 스무그릇 국수 어느 놈이 헛배 채움

인지 한놈이 이렇게 가저간 것 여러 사람이 먹

을테지 그만 내동댕이질을 하고 말까부다? 그

러나 그것은 못하는 일ㅡ아예 국수는 작게

팔리더래도 이렇게 많이 한꺼번에 請하

는 일이 다시는 생기지 맙시사 하고?



(양복점쟁이)

헌 양복 입은 사람은 해입을가 해서 유심히

보고 새 양복 입은 사람은 무슨 헌겁이며 맵

시를 유심히 본다? 남의 것은 좋은 것으로 해주

며 제입은 것은 무릅이 구멍이 날 듯 무릅

자리가난 꼬부랑바지 족끼 없는 오리 에리

에 裁縫針틀이 드르르르 한다?



직업은 생존의 영역이다. 그는 여러 직업에 대한 소감을 유머러스하게 서술하거나 과장하거나 꼬집는 등 비틀어 소개한 뒤에 ‘막음말’로 정리했다. “하여턴 재미나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눈물나는 일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직업 생활 만태’라는 글을 써내려가는 동안 직업에 종사하며 겪는 고충이 갖가지임을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단순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박미현 논설실장
 

▲ ▲ 심연수 시인 사료 원문 [심상만 소장본 강릉문화원 제공]

(막음말)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모다 이와 같도다? 이

것은 대략이라고 하겟지만은 그리 면에는 별

?(별별) 야부닥 수작이 많을 것이다? 하여턴 재미나

는일이다? 그러면서도 눈물나는 일이다?

사람이 나서 살아가려면 누구든지 한 가지

내지 몇가지는 이러한 일을 하여야 된다?

나는 무슨 일에서 이와같은 재미있고 눈물

나는 일을 아니짓을 하여 보겟는지!내일이

지만 자못 호기심이 나며 흥미를 가지지 않 을 수 없다?

라며 매듭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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