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열풍 타고… 불법 스튜디오 ‘우후죽순’ [집중취재]

오민주 기자 2024. 5. 4.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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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고양 일대서 공장·창고에…이행강제금 아랑곳 않고 배짱 영업
단속 비웃는 제작소… 대책 시급

K-콘텐츠의 민낯

BTS, ‘오징어 게임’, ‘내 남편과 결혼해 줘’ 등 음악부터 드라마까지 전세계적으로 K-콘텐츠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콘텐츠 시장이 커지는 사이 정작 제작 환경에는 불법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파주와 고양 등 수도권 인근 지역들이 K-콘텐츠의 제작 중심지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공장이나 창고로 허가 받은 건물들은 각종 규제에서 자유로워진 틈을 타 불법 스튜디오를 운영되며 K-콘텐츠 제작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 이에 경기일보는 K-콘텐츠가 세계 문화 시장의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민낯을 들여다 보고 대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파주시의 한 스튜디오. 건축물대장상에 용도가 공장이나 창고 시설로 돼 있지만 스튜디오로 쓰이고 있는 흔적이 가득하다. 오민주기자

도심에서 한참을 달려 도착한 파주시 탄현면의 A스튜디오. 건축물대장상 공장이 있어야 할 이곳에는 스튜디오가 버젓이 영업 중이었다.

건물 외벽에는 ‘주변 이웃을 위해 소음 발생이 안 되도록 야간 시 촬영 관계자분들의 주의를 부탁드린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고, 창문에는 촬영에 방해되지 않도록 검은색 시트지를 붙여놨다.

내부에는 촬영이 이뤄지는 공간과 분장실, 대기실 등 각종 시설까지 갖췄다. 무대장치를 만들기 위한 페인트와 목재뿐만 아니라 조명장치, 기계 제어장치 등 기본적인 촬영 장비도 있었다. 화면상 왜곡이 생기지 않도록 벽면을 굴곡지게 만든 것까지 엄연한 스튜디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이곳은 지난해 6월 불법 용도변경이 확인돼 ‘위반 건축물’로 지정, 원상복구 시정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버젓이 스튜디오 영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파주시의 한 스튜디오. 건축물대장상에 용도가 공장이나 창고 시설로 돼 있지만 스튜디오로 쓰이고 있는 흔적이 가득하다. 오민주기자

인근에 있는 파주시 월롱면의 B스튜디오도 마찬가지. 건축물대장상 창고가 있어야 할 곳이지만 건물 외벽에는 ‘티브이 제작센터’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건물 앞쪽에는 촬영에 쓰이는 지미집과 사다리, 조립식 틀비계 등이 널브러져 있었고, 내부에는 음향시설과 모니터 등 방송장비가 가득했다.

K-콘텐츠 산업의 중심으로 주목받는 경기북부 일부 지자체들이 스튜디오 불법 영업의 온상으로 전락했다. 공장과 창고시설로 허가받은 건축물이 영상 제작을 위한 스튜디오로 쓰이는 등 불법행위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28일 경기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스튜디오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건축물대장상 용도가 ‘방송통신시설’로 등록돼 있어야 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 관할 지자체로부터 이행강제금 부과 등의 시정명령을 받게 되지만, 일부 건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법 영업을 버젓이 이어가고 있다.

한 스튜디오 관계자는 “창고를 스튜디오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용도를 변경해야 하는데, 기준을 맞추기 위한 추가 비용을 들이기보다는 이행강제금을 내는 것이 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게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일러스트=유동수 화백

■ 부족한 K-콘텐츠 제작 인프라… 불법 양성의 원인

한국의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국내 제작사들은 왜 불법 스튜디오를 선택할까. 이는 OTT 시장이 도입되면서 영상 제작 공간의 수요와 공급 사이 불균형이 생겼기 때문이다.

28일 경기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과거 영화관이나 TV 등을 통해서만 콘텐츠가 공급됐던 것과 달리 현재는 OTT(Over-the-top) 시장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콘텐츠 수요가 확대됐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2023년도 방송시장경쟁상황평가’를 보면 지난해 우리 국민의 77%가 OTT를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만 해도 66.3%에 그쳤지만 2021년 69.5%, 2022년 72%로 꾸준히 성장하는 추세다.

국내외 OTT 플랫폼 이용자의 급증은 콘텐츠 소비 환경 자체를 바꿨다. 공급자가 정해진 시간에 영상을 제공하던 것과 달리 수요자가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자유롭게 영상을 소비하는 문화가 생긴 셈이다.

이는 곧 다양하고도 방대한 양의 콘텐츠가 필요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각 플랫폼의 오리지널 콘텐츠 작품을 비롯해 작품 제작 편수가 과거에 비해 많이 늘어났고, 이에 따라 제작사들의 스튜디오 수요도 급증했다. 또 특수영상(VFX) 등 후반 제작 작업의 비중이 전에 비해 확대되면서 실내 스튜디오를 찾는 경우도 늘었다.

그러나 대형 스튜디오의 필요성과 수요가 늘어나는 반면, 높은 초기 구축비용과 운영 예산 부담 때문에 스튜디오의 공급 속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23 방송영상 산업백서’에는 2022년 기준 전국 753곳의 방송영상 독립제작사가 199개의 스튜디오를 갖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대부분의 제작사는 자체 시설이 없어 스튜디오를 임대해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같은 상황이 되는 사이 스튜디오의 공백은 공장과 창고의 불법 용도변경으로 채워졌다. 경기일보 취재진이 경기북부지역 스튜디오 20곳의 건축물대장을 무작위로 발급해 본 결과, 14곳(70%)이 공장과 창고시설로 등록돼 있었다.

하지만 관할 지자체는 불법 용도변경 스튜디오에 대한 현황 파악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단속에도 손을 놓고 있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관련 민원이 들어오면 확인 후 시정명령을 내리고 있다”면서도 “단속 인원에 한계가 있어 민원이 들어오기 전에는 위반 건축물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 불법 용도변경 스튜디오…무엇이 문제인가

불법 용도 변경된 스튜디오가 우후죽순 생기면서 안전사고 위험뿐 아니라 불법업체의 가격 구조 왜곡으로 시장성 저해 등의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이는 곧 K-콘텐츠 제작 환경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관계기관의 적극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28일 소방당국 등에 따르면 스튜디오는 촬영 장소 구성을 위한 가연성 물질 사용으로 화재 위험 등 안전사고 발생 가능성이 내재된 공간이다. 이 때문에 건축법상 창고를 방송통신시설인 스튜디오로 사용하려면 불꽃감지기, 방염, 피난구 유도등, 시각경보기 등의 안전설비를 갖춰야 하지만 불법 용도변경 시설은 이 같은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다.

지난 2014년 연천군내 드라마 촬영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1명이 사망하고, 약 44억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또 지난 2020년에는 파주시에 있는 한 드라마 스튜디오 창고에서 불이 나 7시간 동안 진화 작업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경기북부지역 소방서들은 봄철 화재예방대책에 방송통신시설의 안전관리 강화를 위한 현장 컨설팅을 포함시켰다. 하지만 정작 대다수를 차지하는 창고나 공장시설 용도의 불법 스튜디오는 이 같은 컨설팅을 받지 못한다. 용도 자체가 방송통신시설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소방이나 전기 등 안전점검 규제를 받지 않는 불법 스튜디오들은 K-콘텐츠 제작 환경을 위험에 몰아넣을 수 밖에 없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이와 같은 불법행위가 지속되면서 스튜디오 시장 자체가 불법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불법업체가 스튜디오 임대 가격을 20~30% 낮추면서 정상적인 시설이 손해를 보는 상황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제작사들의 입장에서는 더 저렴한 스튜디오를 찾게되는 만큼 정상적으로 허가를 받고 운영 중인 스튜디오는 점점 더 사지로 내몰리게 된다. 결국 이들도 다시 불법시설로 변모하는 악순환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같은 상황에도 정부가 사실상 손을 놓고 있으면서 허술한 관리·감독이 스튜디오의 불법 운영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한 콘텐츠 제작사 관계자는 “불법업체들에 대해 강력하게 제재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스튜디오로 허가받고 운영하는 사람들만 억울한 것”이라며 “방송영상 콘텐츠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스튜디오 산업의 건전성 확대를 위해서는 불법업체에 대한 강력한 단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 제언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교수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교수

■ “K-콘텐츠 발전과 건전화위해 정책적 대안 필요”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교수는 K-콘텐츠가 위상에 걸맞은 제작 환경을 갖기 위해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긴밀한 협조를 바탕으로 한 장기적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심영섭 교수는 “콘텐츠 제작시설을 새로 짓는 것보다 기존 산업시설을 개조·증축하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에 용도 변경과 승인 없이 임시방편으로 창고나 공장 시설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그러나 불법 용도 변경은 소방시설 등 안전시설 미비로 사고를 유발할 수 있어 안전한 방송 제작 환경 조성을 위해서라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제작 현장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지방정부가 지역광고 효과에만 치중할 뿐, 도시개발이나 지역기반시설과 연계하는 K-콘텐츠 제작시설을 확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정부나 지자체가 성과에 욕심을 내기보다 장기적인 계획을 하고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심 교수는 무분별한 불법 용도 변경의 해법으로 공동시설 구축을 꼽았다.

심 교수는 “K-콘텐츠 수요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작시설 확충이 필요하다”며 “수요에 맞춰 시설을 증축할지, 신축할지 계획을 세운 후 공동시설을 확충한다면 건전한 문화산업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화산업은 꾸준한 투자와 더불어 창의적인 영역에서 얼마나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내느냐가 핵심”이라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기반 시설 투자 등 정책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심 교수는 K-콘텐츠 제작시설이 허브를 형성하면서 내는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정부가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K-콘텐츠는 정부 주도로 성장한 것이 아닌, 민간에서 자율적으로 수요와 공급 원칙에 따라 생산되고 유통된 것”이라며 “정부 역할은 시장에서 확보한 국제 경쟁력을 더 키우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어 “기존에 있는 시설을 고려해 수요에 맞는 지역별 제작시설을 분산 관리하는 게 우선”이라며 “상암DMC부터 일산, 파주까지 연결된 K-콘텐츠 제작을 위한 허브 또한 주변 교통인프라와 연결해 산업인프라가 구축될 수 있도록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민주 기자 democracy555@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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