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여론조사가 아니야 [미디어 리터러시]

장슬기 2024. 5. 4.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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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대한 반감이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좋은 언론'을 향한 갈구는 더 커지고 있다는 의미이겠지요. 매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 곧 '미디어 리터러시'가 중요해지는 시대, 우리 언론의 방향을 모색합니다.
4월10일 제22대 총선일에 방송사 출구조사원이 투표를 마친 유권자를 대상으로 출구조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총선을 생각하면 어떤 감정이 드십니까?” 총선 직전인 3월25~28일 실시한 MBC 패널조사에 참여한 응답자 중 절반은 ‘분노(47%)’라고 답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새로운 국회 구성원을 내 손으로 뽑는 희망적인 과정에서 느끼는 주요한 감정이 ‘분노’라니. 2년 전 대통령 선거의 주재료였던 ‘전례 없던 비호감’이 푹 고아져 상대 진영에 대한 ‘분노’로 찐득해진 걸까.

175석, 108석, 그리고 12석. 누구의 의지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선은 100석에서 형성됐고, 전선을 뚫지 못한 쪽도 지켜낸 쪽도 개운하지 않다. 한 표의 권리보단 한 표의 분노를 행사한, 절묘한 민심의 주인인 유권자들도 그렇다.

이를 선반영하듯 두 번째 드러난 감정은 ‘혼란(33%)’이었다. 혼란한 유권자들은 여론조사에서도 숨바꼭질을 반복했다. 전반전에는 ‘과표집’으로, 후반전에는 ‘샤이’로 이런 현상이 설명되곤 했다. ‘스스로를 진보로 생각하는 응답층이 민주당 내 공천 파동이 한창이던 당시 여론조사에 상대적으로 덜 응답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전화 면접보다 ARS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더 높게 나왔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 현상이 이번에도 작동했다’는 해석도 있었다. 그것이 ‘참 슬프다’는 이야기는 아무도 안 했다.

과표집이든 샤이든, 분노에 가득 찬 표심조차 갈 길을 잃고 때로는 확신이 없었다는 뜻이다. 진보가, 보수가 숨은 게 아니다. 숨었던 건, 말 그대로 ‘킬러 문항’이라 문제를 빤히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던 유권자의 서럽고 답답한 마음이다.

어쩌면 정답이 없는 문제를 출제해놓고 이제 와서 정답률이 낮다고 여론조사를 구박하는 모양새도 우습다. 여론조사가 선거를 휘둘렀다며, 민주주의 신뢰 추락의 원인이 여론조사라며 손가락질하는 일부 행태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여론조사 ‘때문’이라는 건 인지부조화다. 여론조사가 무결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여론조사에 응답하기 꺼려하는 유권자를 만든 게 여론조사가 아님은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책이나 인물이 아니라 여론조사에 등장하는 숫자 몇 개가 투표 결정에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면, ‘최선’이 유권자의 기대에 못 미쳤다면, 그 역시 여론조사 탓은 아니다.

사과가 아니라 설명할 일

대한민국 선거법은 여론조사 공표 금지 기간을 일주일로 규정한다. 또 일부 언론은 ‘여론을 조성’하는 일부 조사 때문에 표심이 왜곡됐다며 유권자를 바보로 본다. 하지만 여론조사 공표 금지 기간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한 헌법재판소 결정(98헌바64)이 우려했던 ‘(승산이 있는 쪽으로 가담하도록 만드는) 밴드왜건 효과’나 ‘(불리한 편을 동정해서 열세에 있는 쪽에 기울도록 하는) 언더독 효과’는 투표 행위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학계에서 명확히 검증된 바도 없을뿐더러,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런 문제 제기는 의뭉스럽다. 야당에 더 유리하게 나온 조사 때문에 몇 석 더 얻을 걸 못 얻었다는 건가, 더 얻었다는 건가, 아니면 심기가 불편했다는 건가.

‘사회의 생각을 읽는다’는 여론조사의 의미를 고려하면, 조사 결과에 반응해야 하는 주체는 유권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일주일 전 여론조사나 출구조사가 선거 결과와 ‘사맛디 아니할세’라고 유권자에게 사과할 일도 아니다. 시청자 혼란을 핑계로 삼았지만, 그건 설명할 일이다. 그만한 혼란에 사과를 한 것도 처음이다. 누구를 향한 사과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튿날까지도 푸닥거리 같은 선거를 치른 우리가 제22대 국회 첫 본회의가 열리는 날을, 남은 대통령 임기 3년을 기다리는 마음은 여전히 ‘분노’일까, 아니면 ‘기대’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두려움’일까.

장슬기 (MBC 데이터 전문기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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