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 선전지 12만 장 뿌린 방정환

2024. 5. 4.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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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102년 전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아-나는 이담에 크게 자라서/이 몸이 무엇을 해야 좋을지/나 홀로 선택할 수 있게 되거든/그-렇다 이 몸은 저 이와 같이/거리에서 거리로 돌아다니며/집집이 장명등에 불을 켜리라.”(‘개벽’, 1920년 8월)

1932년 8월 개벽사에서 발행한 잡지 ‘어린이’ 통권 99호 표지. [국립한글박물관]
이 구절은 이 땅에서 ‘어린이’라는 기호가 처음 등장했다고 알려진 시 ‘어린이의 노래: 불 켜는 이’ 3연의 일부이다. 방정환재단의 염희경 선생에 의하면 이 시는 방정환이 『보물섬』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저자로 유명한 R. L. 스티븐슨의 시 ‘The Lamplighter’의 일역본인 『子供の歌園』(아카호시 센타(赤星仙太)역, 1912년) 중 ‘點火夫’를 중역한 것이다. 방정환은 이 시집의 제목에 있는 ‘자공(子供)’을 ‘아동’이나 ‘아이’가 아니라, 인권을 지닌 근대적 존재로 상상이 가능한 ‘어린이’로 번역하여 시의 제목으로 삼는다.

이 시에서 ‘어린이’는 “아모리 구차한 집도/밝도록 환-하게/불 켜주는” 사람이며, 방정환은 이들로 인하여 “거리가 더 밝아져서/모도가 다-가티 행복되리라”고 말한다. 이렇게 그는 제국의 문화를 경유하여 그 식민체제에 균열을 낼 새로운 조선적 인간상, ‘어린이’를 창출하고자 한 것이다.

동화극·사진 소설 등 다양한 실험도

소파 방정환 선생. [사진 중앙포토]
1920년 9월부터 1923년 11월까지 일본에 있었던 기간을 빼고 방정환의 생애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치열한 아동문화운동의 거점은 종로였다. 방정환은 1899년 서울 야주개(지금의 당주동과 신문로1가에 걸쳐 있던 낮은 고개)에서 장남으로 태어나고 자란 종로 토박이다. 본적은 경성부 견지동 118번지.

조부가 시장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여 비교적 유복하게 자라던 그는 현 조계사 자리인 수송동 보성소학교를 다닌다. 그러다가 9세 때 부친의 사업 실패로 점심 도시락을 싸 가지 못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어, 식구들 모두 도정궁 아래 사직골의 허름한 초가집으로 이사를 간다. 그리고 1910년 서대문구 근동으로 이사하여 미동보통학교에 전학하기 전까지는 매동보통학교(현 통의동)에 다녔다. 1918년 천도교단이 인수하여 박동에서 낙원동으로 이전한 보성법률상업학교(보성전문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계 어린이운동의 발상지’로 알려진 종로구 경운동은 그의 전 생애를 걸쳐 가장 중요한 시공간이었다.

꿈 많고 재능 많은 가난한 청년이 본격적으로 아동문화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그가 천도교단의 교주인 손병희의 셋째 사위가 되어 교단의 인적 물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전 작품에 등장하는 학대받는 조선 아동에 대한 절절한 연민과 관심은 방정환이 겨울에 고사리손으로 차가운 물을 지고 날랐던 사직골에서의 어린 시절 경험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결혼한 후 그는 재동 처가에 머물며 거기서 가까운 경운동 ‘개벽사’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어린이’와 ‘개벽’ ‘신여성’ 등 매체를 발행하며 각종 문화운동을 수행하는 데 온 힘을 다한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중들의 민족의식을 고양시킬 강연회를 열었고, 어린이를 위한 동화회는 당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늘 만원이었고 앉을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이가 많았다고 전한다.

1922년 5월 어린이날에 맞춰 천도교회월보에 실린 어린이 인권 존중 항목. [사진 방정환연구소]
그는 10세 때 선물 받은 환등기를 가지고 변사가 되어 영상회를 열었던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것처럼 매우 뛰어난 문화기획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처음에는 잡지 ‘어린이’ 발행에 회의적이었던 천도교단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10판 이상 인쇄하여 2만 부까지 발행한 세계명작동화집 『사랑의 선물』(1922년 7월 7일, 개벽사)의 성공 덕분이었다.

방정환이 직접 기획하고 번안한 이 동화집에는 ‘신데렐라’ ‘난파선’ ‘행복한 왕자’ 등 10편의 세계명작동화들이 실려 있다. 평균 판매 부수가 3만 부 정도였고, “3판을 발행한 것이 또 7일 만에 없어”(‘어린이’, 1925년 2월)졌다는 잡지 ‘어린이’의 인기도 문화 운동에서 ‘곱고’ ‘자미잇고’ ‘유익함’을 표방한 그의 다양한 기획 능력 때문이다.

그는 ‘어린이’에서 창작 동화, 위인전(역사동화), 동요(동시) 등 다양한 장르 외에 동화극(‘노래주머니’), 사진 소설 등 새로운 유형의 콘텐트를 시험적으로 선보인다. 이밖에도 상품을 내건 현상문제, 현상문예, 독자 담화실 등을 통해 어린이 독자의 참여를 유도했다.

무엇보다 그는 어린이가 ‘자미잇는’ 문화를 향유하며 행복하길 원했다. 그의 신념이 실천적으로 수행된 수많은 예 중 대표적인 것은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축제처럼 기념행사를 시행한 것이었다.

천도교 소년회 창립 1주년이 되는 1922년 5월 1일, 그의 주도로 전 세계 최초로 어린이날이 제정돼 행사가 열린다.(5월 5일이 어린이날이 된 것은 해방 이후다) 그날 오후 1시에 탑골공원·전동교동·광화문통 등 종로 일대에 어린이날의 취지를 선전하는 선전지가 뿌려지고, ‘어린이날’ ‘소년보호’ 등의 문구가 새겨진 세 대의 자동차가 종로 큰길을 위시하여 시내 각처를 달리며 선전하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동아일보, 1922년 5월 2일)

집회결사의 자유가 억압당했고 특히 검열 대상 1위였던 전단지의 존재가 이렇게 정치 1번지 종로에 뿌려진 그날의 상황은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당대 식민지 주체 모두에게 어떤 해방감을 주었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당시 그가 뿌린 ‘어린이날’이라는 제목의 전단지에는 어린이 인권 존중의 항목인 “1.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이지 말아주십시오. 2. 어린 사람을 늘 가까이 하시고 자주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3.어린 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중략) 7. 장가와 시집을 보낼 생각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등 7가지 항목이 인쇄돼 있었다.(동아일보, 1922년 5월 2일)

유토피아적 시공간 꿈꾸다 31세 요절

1932년 조선어린이날중앙준비회에서 만든 어린이날 포스터. [사진 문화재청]
이듬해인 1923년에 어린이날 행사는 더욱 확장된 규모로 펼쳐진다. 이 날은 아동문화연구회 ‘색동회’가 발회되고, 천도교청년회를 비롯하여 40여 개의 소년단체가 연합한 조선소년운동협회가 세워져 어린이날 행사를 주최한다.

이 날 “5월 1일이 왔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를 주는 동시에 사람의 대우를 하자고 떠드는 날이 돌아왔다”로 시작하는 취지문이 신문에(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 실리고, 12만 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선전지에 인쇄된다. 그날은 노동절이기도 하여, 옥양목 띠 앞에는 붉은 글씨로, 뒤에는 초록 글씨로 ‘어린이날’이라고 쓴 휘장을 두르고 시가 선전 행진을 하며 선전지를 뿌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못하여(조선일보, 1923년 5월 2일)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3시에 축하식을 갖고 4시경 200명의 소년이 차 4대에 나눠 타고 선전지 12만 장을 시내에 배부하였다고 한다.(동아일보, 1923년 5월 2일)

이렇게 방정환은 여러 번에 걸쳐 종로 경운동 일대에 많은 사람들을 북적이게 하며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고 정작 그는 31세에 짧은 생을 마감한다.

과로로 쓰러지도록 죽도록 일하며 그가 꿈꾸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행사를 기획하면서 그는 10년을 내다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린이가 북적대는 종로, 그들이 행복한 장면을 보면서, 그는 이들이 10년 후에 이루어 갈 해방구를 상상했는지 모른다. 물론 방정환이 꿈꾸었던 그 세상은 영원히 유보될 유토피아적 시공간일 수 있다. 그러나 당장 그 시공간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어린 시절 모두 모여 행복했던 그 순간의 경험은, 삶에서 돌출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넘어 꿈꾸는 자를 만들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박지영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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