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을 나온 자수, ‘여성 해방’ 도구가 되다

2024. 5. 4.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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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근현대 자수전
최유현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1968).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6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상류층의 혼수용품으로 자수 병풍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는 이름난 자수장인의 병풍 하나가 한남동 작은 아파트 값이었다고 합니다. 그분들은 그런 전통자수 병풍을 팔아서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여유를 얻어 사람들이 별로 사주지 않는 현대미술 자수를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지난 1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시작한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의 기획자인 박혜성 학예연구사의 말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자수장인 한상수(1935~2016)의 크고 호화로운 ‘궁중자수 모란도 병풍’을 보면 그 높은 가격이 이해가 가고, 또 다른 국가무형문화재 자수장 최유현(88)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을 보면 단순 기능인이 아니라 예술인이고자 했던 그들의 의지를 알 수 있다. 수묵추상 대가 서세옥(1929~2020)에게 밑그림을 요청해 제작한 작품이다.

자수 장인 병풍, 한남동 아파트 한 채 가격

한상수 ‘궁중자수 모란도 병풍’(1978).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40여 명 작가들의 170여 작품과 50여 점의 아카이브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한국 근현대 자수를 현대예술의 측면에서 재조명하고 재평가하는 전시다. 1부에서는 19세기 한국 전통자수 유물을 선보이고, 2부에서는 일제강점기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현 여자미술대학) 자수과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근대 자수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3부에서는 국내 최초의 대학 자수과인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현 섬유예술과) 졸업생들과 연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참여한 자수 작가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추상미술 자수 등 실험적 작품을 살펴본다. 4부에서는 60~70년대 산업화 시대에 최고의 관광상품이자 혼수품이었던 전통자수 병풍들을 다룬다.

전통자수와 현대자수를 넘나들던 이들 중에 박 연구사가 특히 주목한 인물은 송정인(87)으로 그를 위해 전시실에 별도의 방을 마련했다. 1960~70년대의 음악적이고 율동적인 형태의 추상 자수 작품들이 인상적이다. “사실 이 분은 정규교육은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일제강점기부터 자수 보급에 힘쓴 수산 권복해 선생에게 1년 정도 자수를 배운 후 독학으로 놀랍게 성장했습니다. 또한 화방에서 회화를 배웠고 부산 지역 화랑을 돌면서 현대미술의 흐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전통자수로 돈을 버는 한편, 실험적인 현대자수로는 전통 도안이나 자연풍경 대신 정신적인 풍경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죠.”

송정인 '벽걸이' 작가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왜 이들이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수를 했는가 묻는다면, 전시장에서 실물로 보아야 알 수 있는 자수작품만의 독특한 질감과 입체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수작품은 어떤 빛에서 어떤 앵글로 보느냐에 따라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을 발휘한다. “그래서 도록을 만들 때도 어떤 광원의 사진으로 정할지 애를 먹었다”고 박 연구사는 설명했다.

또한 이들이 자수를 하게 된 것은 아직 가부장제가 강하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쉽지 않던 시대에 옛 질서와 정면충돌하지 않으면서 경제적 자립과 사회적 지위를 취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적지 않은 한국 여성들이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자수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보수적인 부모들이 회화나 조각 공부는 허락해주지 않아도 자수 공부는 허락해 주었죠. 이 학교는 ‘예술에 의한 여성의 자립’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등의 건학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곳을 졸업한 학생들이 한국에 돌아와 교편을 잡고 그러한 정신을 전파했죠.”

남성 자수장인 집단 ‘안주수’ 작품도 전시

이화여대 자수과 첫 입학생 김혜경의 ‘정야’(1949).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박 연구사는 20세기 한국 자수사를 잘 보여주는 인물로 박을복(1915~2015)을 꼽았다. 2부에 그의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작품인 ‘국화와 원앙’이 그의 밑그림과 함께 나란히 걸려있다. 정교한 도안과 비단실의 호화로운 광택을 잘 드러내는 자수 기법 등이 돋보인다.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자연을 관찰해서 사실적인 밑그림을 직접 그리도록 했고 그럼으로써 자수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고자 했다”고 박 연구사는 설명했다. 그 후 박을복은 귀국해서 이대 등에 출강하고 국전에 참여했다. 이때 여자미술전문학교 후배인 중요한 화가 박래현(1920~1976)과 교류했으며 현대미술로서의 자수작품도 창작했는데 그러한 작품들은 3부에 나와있다. 그의 차남인 박을복자수박물관 오영호 이사장은 "박래현 선생이 직물 작업을 실험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밝혔다.
박을복 '국화와 원앙' 1937, 박을복자수박물관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한국 근현대 자수' 전시 2부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국전은 자수 작가들이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주요 통로였고 송정인 선생을 알게 된 것도 국전 자료를 찾으면서였습니다.”라고 박 연구사는 설명했다. “이분은 한편으로는 서울에 올라와 외교관 부인 모임에서 전통자수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혼수용으로 고가에 잘 팔리는) 전통공예는 상품이고 추상작업은 예술이라는 모더니즘 담론의 이분법을 갖고 계셨지요.”

이번 전시에 여성만의 작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1부에는 평안도 안주의 남성 자수장인 집단 ‘안주수’의 작품들이 나오는데, 특히 이 집단 소속의 장인 안제민의 ‘자수 지장보살도’(1917)는 사찰 밖에서 전시되는 것이 처음이다. 또한 1부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품인 ‘자수 준이종정도 병풍’도 포함되어 있다. 높이 2m를 넘는 스케일과 남청색 공단에 금색 명주실로 단정하게 고대 중국의 청동 제기가 수놓여있는 모습이 매우 장엄하다. “명성황후 집안에 있던 것으로 90년대에 재일교포 역사학자 신기수가 구입한 후 유족에 의해 기증되었다”고 박 연구사는 설명하며 “제사에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19세기 말 작품 '자수 준이종정도병풍'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한국 근현대 자수' 전시 제1부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그러나 역시 이번 전시의 주된 작가들은 아직 여성의 제약이 많았던 20세기 초중기에 자수를 통해 경제적 자립과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냈던 여성들이다.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도 자수와 직조 작품이 많이 나왔고 최고상인 황금사자상 역시 섬유 설치 작업을 하는 뉴질랜드 마오리족 여성 작가 그룹에게 돌아갔죠. 자수와 직조를 예술의 차원에서 재평가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입니다.”라고 박 연구사는 말했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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