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의 '캔슬컬처' 사태에도 웃고 있는 친 푸틴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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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의 예술과 정치
“예술밖에 난 몰라.” 정치권력의 변화나 사회흐름에서 자유롭고 싶어하는 아티스트들이 흔히 하는 말이지만, 과연 그럴까. 특히 대규모 자본이 움직이는 클래식 업계는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지금 세계 클래식 공연예술계에서 벌어지는 현상의 배후에 있는 정치적 함의를 업계 전문가의 눈으로 파헤친다. -편집자 주
두 공연의 연이은 취소 사태에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 3월 4일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은 이들 공연이 “러시아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경시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같은 달 15일 자하로바 공연이 전격 취소됐다. 그러자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문화예술분야 협력이 정치적 게임의 인질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논평을 냈고, 발레앤모델 볼쇼이 발레 내한을 두고도 우크라이나, 러시아 모두 한국 정부와 민간 반응을 살폈다. 결국 이 공연도 취소에 이르자 러시아 외무부는 현지시간 19일 대변인 논평으로 “한국의 러시아 문화 말살이 계속되면 가시적 보복을 고려할 수 밖에 없다”고 반발했고, 27일에는 미국, 한국 등 비우호국을 대상으로 수입 관세를 인상했다. 29일에는 친 우크라이나 성향의 재한 러시아인 그룹이 5월 예정된 친푸틴 바이올리니스트 스피바코프 내한공연 취소 집회를 잠실에서 열었다.
전쟁 틈타 마린스키·볼쇼이 통합 관철
‘발레앤모델 슈퍼 발레 콘서트’ 같은 갈라 형태의 볼쇼이 발레단 행사도 러시아 밖에선 노골적 친러 성향의 벨라루스, 중동 균형추 역할의 오만 무스카트에서나 열렸다. ‘푸틴의 오른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마린스키 극장에 이어 지난해 12월 볼쇼이 극장 총감독에 오르자 서방의 볼쇼이 보이콧 흐름은 더 선명해졌다. 1956년 이래 볼쇼이 발레단을 정기적으로 초대한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는 러-우전쟁 확전 직후 볼쇼이 발레단의 2022년 방영(訪英)을 취소했고 재초청 기약도 없다. 1957년 시작된 볼쇼이 발레단 일본 투어도 2017년을 끝으로 코로나 팬데믹, 러우전쟁 여파로 중단됐고 재개될 조짐은 없다. 영국 오페라하우스부터 일본 에이전시까지, 지금은 볼쇼이 보이콧을 최소한의 윤리적 도리로 본다.
현 시점, 볼쇼이 발레단 아시아 투어의 잠재 파트너는 러시아 우방인 중국의 베이징과 상하이 국가대극원, 홍콩 아트페스티벌 정도다. 그런데 투어가 국가간 교류성 사업으로 진행되면 통상적으로 국립 예술 단체 개런티는 민간 초청 때보다 현저히 낮아진다. 볼쇼이 발레단으로선 민간 에이전시가 흥행 목적으로 부를 때 제값을 받는다. 발레앤모델은 국내 매체 인터뷰에서 4년간 볼쇼이 발레단 내한 공연권 독점을 밝혔었다.
볼쇼이 발레단 재정이 건전해지려면 러시아와 서방간 외교 관계 회복이 절실하다. 올 가을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하면 볼쇼이 발레단은 현상 타개를 기대할 수 있다. 러-우전쟁 종전을 시사한 트럼프가 집권한다면 백악관이 위치한 워싱턴 케네디센터에 예전처럼 볼쇼이 발레단이 투어를 나오는 그림을 자연스레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케네디센터에는 러시아 예술 홍보 업적으로 푸틴이 수여한 러시아 정부 메달을 받은 사업가 수전 레어먼이 거액 후원자로 자리 잡고 있다. 볼쇼이 발레단이 미국을 가면, 일본 재팬아츠, 영국 빅터 호흐하우저 에이전시도 볼쇼이 발레단 초청 사업을 재개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향후 한-러 관계가 회복돼도 푸틴 정권과 한몸으로 인식되는 게르기예프와의 관계 설정은 유의해야 한다. 과거에 국내 정치권은 게르기예프와 연결에 적극적이었다. 2015년 당시 서병수 부산시장은 부산 오페라하우스 건설을 논의하기 위해 게르기예프와 만났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해 게르기예프를 ‘서울 글로벌 대사’에 임명했었다. 2020년대 후반 예상되는 국내 지자체간 오페라극장 건립 경쟁에서 게르기예프는 외교 관계 호전 여부에 따라 다시 인기를 누릴 공산이 크다.
푸틴과 게르기예프는 서방의 러시아 보이콧을 ‘캔슬컬처’로 규정하면서 상부상조하고 있다. 게르기예프는 지난 3월 크로커스 콘서트장 테러 희생자 추모 공연을 지휘했고, 각지에서 러시아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축제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푸틴 정부는 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한 예술인 공개서한에 동참한 블라디미르 우린 볼쇼이 총극장장 사표를 수리하고 지난해말 게르기예프를 5년 임기의 신임 총극장장에 임명했다. 서유럽에선 손절당했지만, 게르기예프는 전쟁 덕에 오랜 개인적 염원인 마린스키-볼쇼이 극장 통합을 관철했다.
그뿐아니다. 게르기예프는 블라디보스토크, 세바스토폴, 칼리닌그라드의 마린스키, 볼쇼이 분관 인사와 프로그램 책임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공연장 건설 관련 이권은 가스프롬, 스트로이가스몬타슈 등 친 푸틴 기업이 선점했다. ‘캔슬컬처’를 비난하며 활동 반경은 자국내로 줄었지만, ‘친 푸틴’ ‘친 게르기예프’ 예술가와 업체는 그리 배고프지 않다. 러시아에선 전쟁 중단 서명에 이름을 올린 예술가들이 ‘캔슬컬처’ 최대 피해자들이다.
서방 핍박 받는 이미지 힘입어 앞길 활짝
유롭스키는 시민권을 거절했지만, 아테네 출신의 동갑내기 테오도르 쿠렌치스 현 무지카 아테르나 예술감독은 같은 제안을 수용했다. 쿠렌치스는 러-우전쟁 기간, 명시적으로 푸틴 지지를 표시하지 않았으나 무지카 아테르나가 서방 제재 대상인 VTB은행 지원을 받은 데 대한 입장 요구에 침묵했고, 서유럽 대부분의 공연장에서 퇴출됐다. 그러나 서방에서 핍박받는 이미지에 힘입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마린스키를 승계할 ‘포스트 게르기예프’ 1순위 입지를 확고히 했다. 쿠렌치스도 게르기예프처럼 전쟁을 통해 본진에서 원하는 바를 얻은 셈이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러시아가 열강을 유지하는 방편은 정치적으론 독재정 회귀, 경제적으론 에너지의 무기화, 군사적으론 나토(NATO) 와해, 문화적으론 게르기예프 역할 극대화로 요약된다. 쿠렌치스는 서방에서 러시아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호평받은 게르기예프의 성공 공식을 따랐고, 지금 태도는 ‘전략적 침묵’으로 읽힌다. 게르기예프가 위원장을 맡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한국인 입상자나 그와 정기적으로 연주한 협연자, 마린스키와 볼쇼이 소속 단원 역시 현재의 외교 상황에 소신을 표하기 어렵다.
표면적으로 현재 러시아 공연 예술은 슬라브주의를 숭상하는 전제 군주제 시절로 돌아갔고, 이는 게르기예프가 푸틴과 협력해 일군 생태계다. 러시아의 예술적 정체성은 무엇이고, 볼쇼이와 마린스키를 장악한 게르기예프와 그의 뒤를 따르는 쿠렌치스가 이를 대표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러시아에선 사실상 토론이 불가능하다.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사망에 러시아 예술가들의 추도가 공개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마린스키-볼쇼이 통합이 온당한가에 대한 토의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냉전 시절 정치적 박해를 피해 서방으로 이주한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처럼, ‘반 푸틴’ 노선을 분명히 한 유롭스키와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이 푸틴 생전에 모스크바로 돌아가 연주할 날이 과연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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