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우병(血友病)은 ‘피를 나눈 친구병’이 아니다 [말록 홈즈]

2024. 5. 3. 14:1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말록 홈즈의 플렉스 에티몰로지 17]

‘플렉스 에티몰로지’란 ‘자랑용(flex) 어원풀이(etymology)’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쓰는 말들의 본래 뜻을 찾아, 독자를 ‘지식인싸’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작은 단서들로 큰 사건을 풀어 나가는 셜록 홈즈처럼, 말록 홈즈는 어원 하나하나의 뜻에서 생활 속 궁금증을 해결해 드립니다. 우리는 단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쓰곤 합니다. 고학력과 스마트 기기가 일상화된 시대에, ‘문해력 감소’라는 ‘글 읽는 까막눈 현상’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습니다. 단어는 사물과 현상의 특성을 가장 핵심적으로 축약한 기초개념입니다. 우리는 단어의 뜻을 찾아가면서, 지식의 본질과 핵심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와 학교를 떠난 이들의 지식 인싸력도 레벨업됩니다.

“봄이라 날도 좋은데, 어디 국내에 돌아볼 곳 있을까요? 맛있는 음식도 있는 곳으로.”

시엔 형은 맛과 스토리를 좋아합니다. 유쾌한 성격에 탐구정신과 추진력도 대단한 우리 패의 두목입니다.

“미군부대 있는 지역들로 부대찌개 투어나 가보시죠?

서정주 시인을 키운 8할이 바람이었다면, 저를 채운 8할은 농담입니다. 제 날숨에 실리는 이야기들은 대부분이 빈말이나 우스갯소리입니다.

”어, 재밌겠다. 동두천부터 의정부랑 송탄(평택) 찍고 군산까지 가보자!“

마음이 넉넉했던 어느 일요일, 부대찌개 투어의 첫 번째 목적지인 동두천으로 향합니다, 푸른 듯 흐린 하늘빛이 옷차림에 고민을 던집니다.

‘우산을 챙겨야 하나, 들고 다니기 번잡한데?’

‘점퍼를 걸칠까, 낮엔 더울 텐데?’

결국 슬링백을 벗고 배낭을 멥니다.

시엔형과 황쿠쿠와는 정오에 동두천중앙역에서 접선할 예정입니다. 지하철 7호선으로 도봉산역까지 가서 1호선 소요산행 열차로 갈아타는 루트를 잡았습니다. 사가정역을 지날 무렵, 톡을 주고받다 보니, 황쿠쿠가 같은 열차 다른 칸에 타고 있습니다. 몇 칸 앞으로 이동하니 슬램덩크의 변덕규 같은 미니 킹콩이 앉아 있습니다. 황쿠쿠입니다. 자상하게 무뚝뚝한 아부지답게 늦둥이 아들 지후를 데려왔습니다. 올해 9세인 지후는, 일에 치어 팍팍했던 황쿠쿠의 삶에 구세주, 아니 구세자 같습니다. 가끔 철강왕 카네기보다 강철 같고 진지했던 모습이, 많이 다정해진 걸 느끼곤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와 이 친구가 처음 만났던 1983년, 우리도 아홉 살 인생이었습니다.

두런두런 도란도란 이야기에 어느새 도봉산역에 도착했습니다. 소요산행 열차로 갈아탑니다. 연휴의 한가운데라 객차 안이 대체로 한산합니다. 등산객 무리를 지나,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앉아 말을 건넵니다.

“얼마 전 합스부르크 왕족들의 초상화를 다룬 글을 읽었어. ‘합스부르크 턱’이라고 불리는 돌출턱의 원인이 근친혼 유전 때문이래.”

“고귀한 사람들이 안 고귀해 보여서 고민했겠네.”

“그 턱에 몰린 시선을 분산시키려고 깃이 목 위까지 올라오는 옷을 즐겨 입었고, 심지어 모습이 왜소하고 기괴한 애완동물인간을 데리고 다녔나 봐. 그런 모습을 그린 초상화도 많았고.”

“하긴, 오스트리아에서 스페인까지 뻗어가면서, 그 많은 사람들 놔두고 가까운 친족들끼리만 번식했으니. 근친 기형이 나타나는 건 자연의 섭리일지도 모르겠다.”

알론소 산체스 코엘료, ‘인판타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와 막달레나 루이즈’, 1585~1588년
황쿠쿠에겐 배울 점이 많습니다. 특히 역사와 문화 분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합니다. 심지어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항상 공부합니다. 대체 환갑 땐 뭐가 되려는 건지.

“‘합스부르크’ 어감은 합죽이 같은데, 뜻은 ‘매의 성(Hawk’s Castle)’이란다. ‘부르크’, ‘베르크’, ‘버그’가 다 성이란 뜻이니까. 만약 매부리코가 유전됐다면, 동네 이름을 바꿨을 것 같지 않아?”

“여러 지역에서 근친혼을 계속한 배경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다. 단순히 의학적 무지와 아집만은 아니었을 거야.”

“신라 성골이랑 이집트 클레오파트라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 얘기하는 거지?”

“지금 시각으로 보면 당연히 무지의 소치겠지만, 그 시절엔 통치세력이 신성한 존재였고 거기서 불순한(?) 피가 섞이면 특별한 핏줄이란 상징성이 오염됐을 거야. 어찌 보면 논리를 부여하기 위해 울며 겨자를 먹었던 걸지도 모르지.”

황쿠쿠는 대단한 친구란 생각이 한층 더 굳어집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 시절엔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을 거야. 반대로 지금은 아닌 걸 과거의 고정관념으로 옳다고 고집할 수 없는 것 같다.”

꽉 막혔던 오랜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듯 명쾌해집니다.

“그나저나 ‘합스부르크 턱’은 혈우병이랑 비슷하네. 왕가의 유전병이니까.”

황쿠쿠가 화제 확장에 시동을 겁니다.

“혈우병도 근친번식이 원인이야?”

“혈우병의 원인이 근친혼이었고, 영국 왕조의 공주들이 유럽 여러 나라 왕비로 시집가면서, 2세 왕자들의 혈우병이 유행이었대. 빅토리아 여왕이 대표적인 혈우병 보인자였고.”

*빅토리아 여왕(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갑자기 혈우병의 뜻이 궁금해집니다.

“혈우병이란 말의 뜻은 뭐야?”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고도, 우리는 한자사전과 영어어원사전을 뒤적이기 시작합니다.

“혈우병(血友病), 피 혈, 벗 우, 병 병. ‘피의 친구가 되는 병이야?”

제 원초적 질문에 황쿠쿠가 분석을 시작합니다.

“영어로는 헤모필리아(hemophilia), 헤모가 피, 필리아가 사랑. 흡혈귀, 뱀파이어는 아닌 것 같은데.”

긴 침묵이 이어지고 폰을 뒤적대는 손가락이 분주합니다.

“필리아를 기질, 경향(tendency)으로 해석하면 답이 나올 것 같은데…”

쿠쿠가 실마리를 풀기 시작합니다.

“오!!! 헤모를 혈액(blood)가 아니라, 출혈(bleeding)으로 해석하면?”

말록이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아!!! 피를 계속 흘리는 성질의 질환!!!”

“그럼 혈우병(血友病)의 우(友)는 친구가 아니라, 어떤 증상을 지속하려는 성질로 해석해야겠네!”

황쿠쿠의 유레카와 동시에 지하철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이번 역은 동두천중앙, 동두천중앙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30분이 훌쩍 달렸습니다. 어원풀이도 벗과 함께하니, 길이 넓어지고 속도가 붙습니다.

“아빠, 이번에 우리 내려요? 아빠랑 삼촌이랑 되게 신나 보여요.”

아홉 살 지후가, 아빠와 삼촌에게 뽀송뽀송한 웃음을 선물합니다. 동두천 부대찌개가 유난히 맛깔스러울 것 같습니다.

<사진 출처: 말록이네>
*감수: 안희돈 교수(건국대 영어영문학과). 건국대 다언어다문화연구소 소장. 전 한국언어학회 회장

[필자 소개]

말록 홈즈. 어원 연구가/작가/커뮤니케이터/크리에이터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22년째 활동 중. 기자들이 손꼽는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커뮤니케이터. 회사와 제품 소개에 멀티랭귀지 어원풀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어원풀이와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융합해, 기업 유튜브 영상 제작.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