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이 없어야 뜬다? ‘논스크립트 콘텐츠’ 전성시대

정덕현 문화 평론가 2024. 5. 3.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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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100》부터 《연애남매》까지…최근 주목되는 논스크립트 콘텐츠의 세계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최근 방송계에서는 그간 장르로 나뉘던 예능, 교양, 드라마 같은 구분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 구분법은 이제 옛날 방식이 됐다는 이야기다. 대신 대본의 유무에 따라 스크립트와 논스크립트 콘텐츠로 나누는 새로운 구분법이 등장했다. 

JTBC 예능 《연애남매》의 한 장면 ⓒJTBC 제공

아직도 예능·교양이라 부르는가 

지난해 백상예술대상 TV 부문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됐던 건 유튜브 콘텐츠인 피식대학의 《피식쇼》가 예능 작품상을 받은 사건이었다. 사실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는데, 상까지 거머쥐었다. 그 파격에 호평 또한 쏟아졌다. 그건 이제 예능 프로그램의 향방이 지상파, 케이블, 종편 중심에서 유튜브 같은 새로운 채널로도 확장되고 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예능 작품상에 《피식쇼》를 선택하면서도, 제기된 문제 중 하나는 '예능'이라는 표현이 여전히 지금의 달라진 환경 속에서 적합한가 하는 점이었다. 예능, 교양, 드라마 같은 지칭은 지상파 시절의 프로그램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피식쇼》가 보여주듯 새로운 채널에서 시도되는 이런 콘텐츠들을 그저 예능이라는 과거의 지칭 안에 포괄할 수 있을까 싶은 의문들이 제기됐다. 

이러한 문제는 과거 교양으로 분류됐다가 지금은 예능의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관찰카메라(리얼리티쇼)에도 제기됐다. 《환승연애》나 《나는 솔로》 같은 연애 리얼리티가 예능의 트렌드로 떠올랐지만, 리얼리티쇼는 사실 다큐 같은 교양의 영역에서 시작된 거였다. 올해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예능 작품상에 후보에 오른 《사상검증구역-더 커뮤니티》 같은 프로그램은 예능으로 분류돼 있지만, 많은 이가 교양 프로그램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서바이벌 형식으로 사상 문제를 사회적 실험처럼 풀어내다 보니 '교양적인 성격'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과거 분류인 예능과 교양은 그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고, 앞으로는 점점 구분이 어려워지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래서 새로운 대안으로서 서구에서 부르는 방식인 스크립트와 논스크립트로 분류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대본의 유무 혹은 대본의 활용도 차이에 따라 나뉘는 이 분류는 기존 예능과 교양의 영역을 논스크립트라는 하나의 틀로 묶어놓는다. 작년 11월 국제논스크립트콘텐츠협회에서 주최한 '세계 최초 논스크립트 콘텐츠 포럼'에는 그래서 나영석 사단에서 《꽃보다 청춘》 《윤식당》 등에 참여한 김대주 작가와 《피지컬: 100》을 연출한 장호기 PD, 그리고 《나는 신이다》를 연출한 조성현 PD가 한자리에 모였다. 과거 분류라면 예능과 교양으로 구분되었겠지만 논스크립트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제공됐다. 

최근 드라마를 제외하고 대중의 시선을 잡아끄는 콘텐츠들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공통으로 걸쳐있는 한 가지 요소가 눈에 띈다. 그건 바로 '실제 리얼(real)'을 담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최근 웨이브에 소개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연애남매》 같은 콘텐츠는 인물들의 감정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우연과 필연이 뒤섞여 여러 관계의 복잡한 순간들이 겹쳐지면서 생겨나는 예측 불허의 결과들이 주는 쫄깃한 긴장감이 《연애남매》 같은 연애 리얼리티가 현재 대중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유다. 

마찬가지로 최근에 시즌2까지 나온 《피지컬: 100》 같은 스포츠 기반 콘텐츠도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표현 그대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작년에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나는 신이다》 같은 다큐멘터리는 어떤가. 가장 크게 공분을 불러일으킨 정명석 교주 이야기는 과연 그가 어떤 처벌을 받을 것인가에 대해 예측할 수 없는 현실과 공명하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최근 몇 년간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던 그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은 어떤가. 조작 논란에 엄청난 후폭풍이 일었던 사실을 떠올려보면 대본 없이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은 이들 프로그램이 가진 가장 핵심적인 재미 요소였다. 

사실 이런 '실제 리얼'을 가져와 대본 없는 재미를 추구하기 시작한 건 이미 《1박2일》 초창기부터였다. 복불복 게임으로 대변되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와 돌발 변수가 늘 존재하는 여행이라는 소재의 결합이 대본 없는 재미를 가능하게 했다. 당시 나영석 PD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1박2일》의 재미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100%를 기획하지만 50% 정도만 기획을 충족시킬 때 《1박2일》만의 재미가 만들어집니다." 그는 일종의 기획서 같은 대본이 존재하지만 그건 그대로 흘러가야 할 각본이 아니라 그저 많은 선택지 중 하나를 그려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걸 오히려 벗어날 때 진짜 재미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tvN 예능 《서진이네》의 한 장면 ⓒtvN 제공

논스크립트 시대가 만들어내는 변화들 

《무한도전》의 레전드로 남았던 '망해서 성공한' 좀비특집이나 아마존에서 제작진의 생고생까지 담아 화제가 됐던 《아마존의 눈물》, 김병만이 리얼로 보여준 《정글의 법칙》 같은 것들이 모두 논스크립트 시대의 전조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흐름은 그래서 현재까지 이어져 《서진이네》나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같은 예측 불허의 여행 콘텐츠가 만들어지게 됐고, 《피지컬: 100》은 물론이고 《뭉쳐야 찬다》 《골 때리는 그녀들》 같은 스포츠 소재 콘텐츠들의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나는 솔로》 《솔로지옥》 《환승연애》 같은 연애 리얼리티는 물론이고 《장사천재 백사장》이나 《오은영 리포트》 《개는 훌륭하다》 같은 실제 현장에 개입하는 전문가 솔루션 콘텐츠들도 마찬가지였다. 

논스크립트 콘텐츠의 핵심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들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돌발 변수'는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반겨야 하는 어떤 것이 됐다. 나영석 PD가 일찍이 《1박2일》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에 발이 묶여 예정했던 섬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돌발 변수는 근처 작은 방을 빌려 벌인 복불복 게임으로 오히려 흥미로운 반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됐다. 여기서 중요해진 건 이러한 돌발 상황을 적당히 즐길 줄 알거나 그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순발력을 가진 출연자다. 백종원이나 기안84, 곽튜브 같은 인물들이 주목받게 된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논스크립트라는 표현에는 '대본이 없다'는 뜻이 들어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밑그림이 없다는 건 아니다. 논스크립트 콘텐츠 포럼에 참여했던 김대주 작가는 대본이 필요 없는데 작가는 왜 필요하냐는 질문에 작가나 대본이 불필요한 게 아니라 작가와 대본의 역할이 달라졌다고 답했다. 그는 '이제 작가가 지문과 대사를 쓰는 방식의 대본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을 만드는 대본을 쓴다'며 그것을 놀이터 만드는 것에 비유했다. 출연자들을 구성하고 그들이 놀 수 있는 상황이나 공간들을 꼼꼼하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그들이 그 안에서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을 마음껏 벌일 수 있게 해주는 게 작가와 대본의 새로운 역할이라는 것이다. 

갈수록 카메라에 익숙해지고 영상이 일상화되면서 대본으로 짜인 영상보다는 실제 상황을 보여주는 논스크립트 콘텐츠에 대한 요구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논스크립트라는 새로운 구분의 틀이 그간 예능과 교양으로 나누어 놓았던 소재나 형식들을 이제는 뒤섞어 새로운 것들을 창출해낼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의 장들도 생겨나고 있다. 《피지컬: 100》의 장호기 PD처럼 한때 교양에서 일했던 PD가 현재 예능으로 불리는 콘텐츠를 만드는 새로운 풍경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혼종의 시대에 논스크립트 콘텐츠라는 새로운 틀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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