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의 산썰(山說)] 23. 산성(山城)의 성벽을 가볍게 보지 말라

최동열 2024. 5. 3.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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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비탈에 기대어 길게 뻗은 대공산성의 성벽이 등산의 감흥을 더한다.

■강릉 대공산성(大公山城)-영동지역 산성의 걸작품

등산을 하다보면 옛 성벽을 만나는 일이 종종 있다. 주로 그 지역에서 이름 깨나 하는 산의 험준한 산세에 기대어 돌로 쌓은 성벽이 버티고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외침이 있을 때, 적에게 식량이 될 수 있는 들판의 알곡과 집안의 곡식을 모두 태우거나 거둬버리고, 산에서 농성하면서 적을 지치게 만드는 청야(淸野) 전술을 즐겨 사용했기에 산성이 유난히 많다. 경사진 산비탈, 그 자체만으로도 천험의 요새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성벽까지 더했으니, 이중삼중의 보호막을 친 셈이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쌓은 성벽 안에는 산 정상부 혹은 중턱임에도 계곡물이나 샘물이 있고, 많은 사람이 숙영할 수 있는 비교적 너른 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곳이 강릉 대공산성(大公山城)이다. 대관령 줄기 백두대간 곤신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 대공산성은 영동지역에서는 매우 드물게 잘 쌓아 올린 성벽의 실체가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들어 옮길 수 없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도 없는 돌덩이를 다듬어 켜켜이 쌓아 올린 성벽을 보고 있자면, 옛사람들의 노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대공산성 안에는 줄잡아 수백 명의 군사를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숙영 공간과 함께 우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큰 샘물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생명수가 있었기에 외침을 받았을 때 군사나 주민들이 산성으로 몸을 피해 장기전 저항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대공산성은 1895년 을미의병 때 민용호(1869∼1922년)가 이끈 관동의병이 일본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등산 중에 만나는 옛 성벽은 서울 북한산, 인왕산 등 도성의 성곽처럼 도시 인근에 거의 새로 축성하다시피 대대적 보수를 한 성벽을 제외하고는 거의 허물어져 형체만 간신히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록 너덜 바윗돌이 곳곳에 널브러져 형체만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성벽은 산행 중에 만나는 반가운 볼거리이다. 강릉 대공산성 처럼 이끼가 켜켜이 낀 성벽이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는 마치 옛 유적 하나를 새로 발견한 것처럼 묘한 기분에 휩싸이기도 한다. 성벽은 전망 좋은 터는 자리를 펴고 앉아 땀을 식히거나 간식을 먹으면서 산행 에너지를 재충전하기에도 최적의 장소가 된다.

▲ 강릉 대공산성. 강릉시 성산면 보현산에 있는 산성이다. 백두대간 곤신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데, 잘 보존된 산성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장성(長城)은 민초들의 무덤-반란·봉기의 단초

그러나 사실 우리 산 곳곳에 남아 있는 산성의 성벽은 옛 민초들의 피땀으로 탄생한 시설이라는 점에서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다. 오죽하면 중국 만리장성은 ‘세계에서 가장 큰 축조물이면서, 가장 거대한 무덤’이라고 부르겠는가. 장성을 쌓다가 인부가 무거운 돌에 깔려 숨을 거두면 그대로 그 위에 돌을 얹어 성벽을 쌓았다고 하니, 지구상 최대의 성벽 구조물에 놀라워하는 한편으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장성을 쌓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 노역이었으면 반란의 단초가 되기도 했겠는가. 성을 쌓다가 죽으나, 도망쳐 싸우다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니, 마지막 안간힘이나 써 보자는 심정으로 도망자가 되고,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중국 진(秦)나라 말에 일어난 최초의 농민 봉기인 진승과 오광의 반란이 그러하고, 한(漢) 고조 유방 또한 마찬가지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냐”며 반란을 일으킨 진승은 사실 가난한 농민 둔장(屯長) 출신이었다. 기원전 209년 7월, 농민 900여 명과 함께 어양(漁陽), 지금의 북경시 부근 수비와 부역에 동원된 진승은 이동 중에 갑자기 큰비를 만나 길이 끊기는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다. 예정된 기일에 어양까지 갈 수 없게 되자 그가 선택한 것이 봉기였다. 당시 진의 가혹한 형벌 체계에서는 정해진 기일에 부역 장소로 가지 않을 경우 목을 베는 참형에 처했기 때문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심경이었다.

▲ 대공산성 안에 남아 있는 샘물. 일반적으로 등산 중에 만나는 샘물보다는 규모가 크다.

만리장성을 쌓고 진시황릉 등의 거대한 토목공사를 잇따라 일으켜 백성들을 쥐어짜고, 변방 수비와 전쟁, 토목공사에 수많은 백성을 동원하는 가혹한 학정이 결국은 농민 반란을 부른 것이다. 진승은 봉기 6개월 만에 휘하 장수에게 살해당하고 그가 세운 농민 정권인 장초(張楚)도 곧 무너지고 말았지만, 진시황 사망(기원전 210년) 이듬해에 진승·오광으로부터 촉발된 농민 봉기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 결국에는 3년 뒤인 기원전 206년, 거대 제국 진의 멸망을 촉발했다.

한(漢)나라 400년 대업을 일으킨 유방의 거병도 진승과 비슷하다. 만리장성을 쌓는 토목공사에 죄수들을 징발하라는 명을 받은 유방은 죄수 호송 중에 다수의 탈주자가 발생하는 예기치 않은 변고에 직면하게 됐다. 당시 엄하기 이를 데 없었던 진의 법치(法治) 하에서 중형을 면하기 어려웠던 유방은 결국 반란의 길로 들어선다. 때는 진승이 농민 반란을 일으키면서 중국 전역 도처에서 우후죽순처럼 반란군이 봉기하던 혼란기였다. 이후 초나라 패왕 항우와 천하를 다툴 정도로 세력이 커진 유방은 드디어 진나라 3세 황제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자신보다 출신과 세력이 모두 월등했던 천하의 용장 항우를 해하(垓下)라는 곳에서 포위, 죽음의 길로 몰아넣으면서 천하의 주인으로 우뚝 서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항우를 기원전 202년, 해하성에서 고립무원의 처지로 몰아넣은 최후의 승전은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로 더욱 유명하다. 외로운 성에 고립된 항우와 초나라 군사들을 심리적으로 더욱 위축시키기 위해 유방이 자신의 군사들로 하여금 초나라 노래(楚歌)를 부르게 했다는 일화이다. 성 밖 사방에서 고향의 애잔한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항우는 “초나라 군사들이 이렇게 많이 달아났단 말이냐. 유방이 이미 초나라를 빼앗은 것이냐”고 낙담했고, 오랜 전쟁에 지친 군사들은 군사들대로 고향의 노래에 더욱 진한 향수를 느껴 급격히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거대제국 진나라의 멸망과 한나라의 탄생은 무리하게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수탈하고, 부역에 동원하는 등 가혹한 학정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준다. 옛사람들이 남긴 가장 거대한 축조물인 성벽이 백성들의 피땀과 눈물의 결정체라는 것을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 동해시 무릉계곡에 있는 두타산성. 신라 파사왕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임진왜란 항전지이기도 하다. 비록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졌지만, 산성의 잔해가 완연하다.

■산성은 피땀의 산물-우리 민족 생존의 보루

그럼에도 험산의 지형에 의지해 쌓은 산성이 우리 땅에서 방어에 얼마나 긴요한 존재였는지는 병자호란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인조 때 우리나라를 침략한 만주족(여진족) 청(淸)이 남한산성을 포위, 46일 만에 항복을 받으면서 맺은 ‘정축화약(丁丑和約·1637년)’에는 ‘성을 다시 쌓거나 개축하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조선군이 남한산성이나 강화도 섬에 들어가 다시 저항하는 것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이를 무시하고 조선이 이듬해에 곧바로 남한산성을 다시 쌓자, 청의 사신이 불같이 화를 냈다는 기록도 실록에 전한다. 청의 사신은 개축한 남한산성을 살펴본 뒤 “어떤 간계를 품고 있기에 이런 짓을 했는가”라고 화를 내면서 산성을 다시 허물 것을 요구했다. 청군이 비록 남한산성을 포위, 조선 조정을 고립무원의 처지로 몰아넣어 결국 항복을 받기는 했으나, 공격을 통해 산성을 직접 함락하지는 못했듯, 산성이 그만큼 위협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 남한산성. 병자호란 때, 한겨울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조선 인조 조정이 46일간 농성한 곳이다.

등산 중에 만나는 산성은 만리장성이나 남한산성처럼 거대한 구조물은 아니지만, 축성과 유지·보수에 엄청난 고충과 노고가 수반되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산 중턱이나 꼭대기까지 돌을 옮겨 쌓아야 하고, 수많은 인력이 장기간 동원돼야 했다. 그냥 두발로 오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밑에 차는 가파른 산등성이까지 큰 돌을 옮겨 쌓는 고된 노동을 감내해야 비로소 천험의 요새인 산성 하나가 완성될 수 있으니, 피땀의 결정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주변에서 돌을 구경하기 어려운 토산(土山)에 거대한 띠를 두른 듯 석성(石城)이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저 큰 돌을 어디서 구해서 옮겨 왔을까”하는 물음표를 던지게 마련이다. 성을 쌓는 것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침략한 적에게 당하는 고통보다는 감내할 만하다는 자기희생과 전쟁 대비 의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등산 중에 만나는 산성의 돌무더기 잔해가 더 경외롭다. 산성은 끊임없는 외침에 시달린 우리 민족 생존의 보루였기에 더욱 그러하다.

최동열 강릉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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