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착취·혐오… 유전자에 속박된 인류의 비극[북리뷰]

2024. 5. 3.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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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전자 지배 사회
최정균 지음│동아시아
50년 유전자 결정론의 ‘종합판’
진화생물학·신경과학 등 집약
유전자, 오로지 자신만 신경 써
시장경제, 정치적 통제 없으면
극단적 불균형 상태로 귀결돼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
위험 피하는 면역반응서 생겨
게티이미지뱅크

구애 예능의 전성시대다. 달콤한 밀당에서 노골적 추파까지 싱글 남녀들이 벌이는 온갖 짝짓기 행태는 연애도, 혼인도 힘든 시대에 적잖은 대리만족을 준다. 좋은 사람 만나기가 이토록 어려운데, 이별도, 이혼도 무척 흔하다. 익히 알듯, 그 사유론 성격 차이가 압도적이다. 서로 견딜 수 없을 만큼 다르다면, 애초에 사랑은 어떻게 했나 싶다.

최정균 카이스트 교수의 ‘유전자 지배 사회’에 따르면, 인간은 이러한 사랑의 모순을 피하기 힘들다. 유전자 탓이다. 인간은 짝짓기할 때 자신과 유전적 차이가 큰 대상을 선택하는 이류 교배 성향이 있다. 다양성을 늘려야 유전자 보존에 더 유리해서이다.

사랑의 밑바탕엔 유전자 활동이 있다. 가령, 면역 반응을 유도하는 MHC 유전자는 체취(페로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체취를 통해 자신과 다른 MHC 유전자 변이를 가진 대상을 가려내고, 그에 빠져든다. 그래야 후손들이 다양한 병원균에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키, 체질량지수, 학업성취도 등 물리 조건과 더 관계있을 때 동류를 더 선호한다. 날씬한 사람은 날씬한 사람을, 고학력자는 고학력자와 사귀려 하는 것이다.

성격은 다를 때 더 매력을 느낀다. 사색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은 밝고 외향적인 사람에게 끌린다. 문제는 둘이 함께 생활하면서 나타난다. 차이가 불편으로, 불편이 갈등으로 변하는 것이다. 매력을 형성한 바로 그 유전적 힘이 증오로 이어진다. 우리가 나쁜 남자나 팜파탈에게 쉽게 빠져들고,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이유다. 비극은 번식의 목표가 자연선택에 유리한 유전자의 생성이지 개체의 행복이 아니라는 데에서 온다.

이처럼 오늘날 유전자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인간 행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이제 생명 현상이나 인간 행위의 근원을 신의 뜻과 같은 종교 서사에서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과 우정, 이타성과 협력, 영성과 창조성 같은 극히 인간적인 현상을 유전학적으로 해명하려는 흐름이 사회 전반에 확산하고 있다.

‘유전자 지배 사회’는 지난 50년 동안 꾸준히 그 영향력을 키워 온 유전자 결정론의 종합판에 해당하는 책이다. 이 책은 유전학, 진화생물학, 신경과학 등의 최신 연구 성과를 집약해서 유전자의 활동이 인간 사회를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낱낱이 보여준다. 이 책에 따르면, 유전자의 작용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극단적 불평등을 촉발하고,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혐오를 생성하며, 정치적 보수와 진보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다.

유전자는 만족을 모르고, 무한히 번식하고자 한다. 이에 지배받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학의 가정과 달리, 독립적인 경제 주체를 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쟁하게 내버려 두면, 자연 균형 상태에 이르기보다 독점과 착취가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다. 유전자는 오로지 자기만 신경 쓰므로, 아무 제약 없는 경쟁은 약자에 대한 무한 착취를 부르고 불균형과 불평등을 심화할 뿐이다. 진화 경제학에 따르면, 경제가 정치의 거름망을 통해 적절히 통제될 때 비로소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

혐오는 본래 병을 유발할 수 있는 대상을 무조건 피하려는 면역 반응에서 생겨났다. 이를 주관하는 기관이 뇌 속의 편도체다. 편도체 반응은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위험 대상을 즉각적으로 분별해 거부감을 일으킨다. 새로운 건 일단 멀리하는 게 더 생존에 유리하다. 따지고 살피는 사이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어서다.

따라서 보수가 진보보다 진화 본능에 더 가깝다. 낯설어 보이는 것을 피하고, 기존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이 생존율과 번식 성공률이 높기 때문이다. 편도체 반응을 일으키는 대상엔 포식자나 위험 물질뿐 아니라 이주민, 장애인, 비만인, 성소수자 같은 이질적 존재도 포함된다. 보수주의자는 편도체가 더 크게 발달해 있고, 위계질서 확립 행위를 촉진하는 세로토닌 분비가 활발하다. 이들은 고정관념, 편견, 차별도 심하다. 위험을 빠르게 가려내려면 자신의 신념을 믿고 미리 정해둔 대로 무조건 분류하는 게 더 나아서다. 그렇기에 보수주의자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확증편향에 빠지곤 한다.

반면에 진보주의자는 고통에 대한 보상 회로와 관계된 도파민 분비가 활발하다. 이들은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도전하며, 그 성취에서 쾌락을 얻는다. 진화로부터의 일탈이고 자연 체제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지만, 변화의 적응에 유리하다. 세로토닌과 도파민이 균형 상태를 이룰 때 인간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276쪽, 1만75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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