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기의 과유불급] 정치 망가트리는 ‘날카롭고 선명한’ 언어

전영기 편집인 2024. 5. 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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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치가 '뾰족하고 선명한 메시지' '일방적 전달'만 쓸모 있는 것으로 취급하는 풍토는 유감이다.

정치 언어엔 가끔 침묵, 때로는 비유나 뭉툭함, 은근한 눈빛 교환 같은 비언어적 태도가 중요하다.

따라서 특히 정치 언어에선 사실을 적시해 선명하게 표현했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나라 운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톱 정치인들부터 '쓸모없는 것의 쓸모 있음' 즉, 무용지용의 원리를 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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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전영기 편집인)

요즘 정치가 '뾰족하고 선명한 메시지' '일방적 전달'만 쓸모 있는 것으로 취급하는 풍토는 유감이다. 정치 언어엔 가끔 침묵, 때로는 비유나 뭉툭함, 은근한 눈빛 교환 같은 비언어적 태도가 중요하다. '덜 날카로우며 복합적인 메시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가 쓸모 있을 때도 많다.

예를 들어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영수회담에서 이 대표가 무슨 선언문 낭독하듯 15분간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날린 것은 문제다. 자기 진영에선 환호를 받았을지 몰라도 대통령과 대화를 하기 위해 만난 점을 감안하면 썩 좋은 태도가 아니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집무실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이재명·홍준표·박지원의 욕심과 도취

마찬가지로 비공개 회담으로 전환한 후 윤 대통령이 혼자 거의 85%를 얘기했다는 소식(민주당 측 전언)을 듣고는 기가 막혔다. 두 사람 다 침묵의 미덕 또는 대화의 기술 같은 것에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상대를 힘으로 제압하려는 욕심이 큰 탓이다.

다행히 2시간15분 전체를 뾰족하거나 일방적인 발언만으로 채운 건 아닌 모양이다. '민정수석실 설치'나 '이태원 참사 특별법안' 등에 대해 부분적이나마 접점을 찾았으니 말이다.

북한 선거를 방불케 하는 전국 최고 득표율 92%에 취한 것일까. 전남 해남-완도-진도의 박지원 국회의원 당선자도 '뾰족한 메시지'의 덫에 걸렸다. 차기 국회의장이 되려면 당내 라이벌들보다 선명해야 한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현 김진표 국회의장을 지칭해 "아주 개XX…(민주당에서) 복당을 안 받아줘야 한다"고 유튜브 생방송에서 욕설을 내뱉은 것이다. 손주 보기에도 부끄러운 '81세 최고령 정치인'답지 않은 저질 언어였다.

홍준표 대구시장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그는 총선 이후 윤 대통령과 독대한 후 "비서실장에 장제원, 국무총리에 김한길을 추천했다"고 즉각 공개했다. 입이 근질근질했나. '김한길 총리' 가능성은 아직 남아있지만 결과적으로 '장제원 비서실장'은 물 건너갔다. 홍 시장이 침묵을 지켰다면 인사안은 윤 대통령의 마음에서 싹트고 영글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자신과 만난 사실을 시도 때도 없이 세상에 알리는 정치인을 자주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듯하다.

이른바 '대통령실 비선라인'으로 지목되는 일부 참모가 "비서실장 양정철, 국무총리 박영선"을 언론에 흘린 것도 정보가 너무 구체적이고 선명해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을 갖게 했다. 특정인들의 실명 대신에 "여야 협치 차원에서 과거 정권 사람도 두루 검토하고 있다"고 흘렸으면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따라서 특히 정치 언어에선 사실을 적시해 선명하게 표현했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 불투명하고 모호한 언어, 은근하고 복합적인 표정이 좋은 정치를 가져온다.

침묵·비유·모호함에 눈빛 교환까지 할 수 있어야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라는 우화로 유명한 중국의 고대 사상가 장자(莊子)가 있다. 장자는 '쓸모없는 것의 쓸모 있음(無用之用·무용지용)'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다. "사람이 땅을 평안하게 걸을 수 있는 것은 자기가 내딛지 않은 주변에 땅들이 넓게 퍼져있기 때문이다. 만일 발이 닿는 필요한 부분만 남기고 불필요한 다른 땅들을 도려낸다면 사람은 좁은 길을 걷기 어려울 것이다." 학의 긴 다리나 사람이 내딛지 않은 주변의 땅들은 쓸모없는 것 같아도 우리가 모르는 큰 쓰임새가 있을 수 있다는 교훈을 장자는 가르치고 있다.

직설이나 비난, 공격은 메시지의 명료성 덕분에 쓸모 있어 보인다. 수다나 농담, 유머는 일견 쓸모없는 듯해도 지나고 나면 더 크게 쓸모 있을 때가 많다. 냉랭한 사람 관계를 한순간에 누그러뜨려 논의를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바꾸곤 한다. 나라 운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톱 정치인들부터 '쓸모없는 것의 쓸모 있음' 즉, 무용지용의 원리를 새겼으면 한다.

전영기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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