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기생수〉를 완전히 잊기로 했다”

임지영 기자 2024. 5. 3.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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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연상호 감독이 쉼 없이 작품을 쓰는 비결은 스스로를 가두는 데 있다. 자신에게 외주를 맡기는 방식으로 몰아붙인 결과다.
연상호 감독은 다작으로도 유명하다. 스스로 1년에 각본 두 편을 쓰기로 정해놓았다. ⓒ넷플릭스 제공

연상호 감독은 1년에 각본 두 편을 쓰기로 정해놓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한다. “스스로에게 외주를 준다고 보면 된다. 외주를 주면 하기 싫어도 어떻게든 하게 된다.” 그렇게 쓴 각본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이 중 일부는 직접 연출한다. 모두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안 되면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인다”. 다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연상호 감독에게 쏟아지는 질문 중 빠지지 않는 건 이런 종류다. ‘다작의 동력은 무엇인가.’ ‘(이제) 그렇게까지 쓰지 않아도 되지 않나.’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기생수: 더 그레이〉가 공개된 직후 연 감독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독립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연상호 감독은 2011년 개봉한 〈돼지의 왕〉이 이듬해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으로는 처음으로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받으며 주목을 끌었다. 2016년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룬 첫 실사 장편영화 〈부산행〉이 천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으나 초능력을 소재로 한 다음 영화 〈염력〉은 관객 99만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이후 애니메이션 〈사이비〉 〈서울역〉, 영화 〈반도〉 〈방법: 재차의〉 〈정이〉, 드라마 〈방법〉 〈지옥〉 〈괴이〉 〈선산〉 〈기생수: 더 그레이〉에 이르기까지 스릴러·좀비·오컬트·SF·크리처 등 각종 장르물의 각본·기획·제작·연출에 관여하고 있다.

〈부산행〉은 여러모로 연 감독에게 기점이 되었다. 널리 이름을 알린 대표작인 동시에, 헤어 나오기 어려운 부담감을 안긴 작품이다. “가장 안 좋았던 시기가 〈부산행〉 직후였다. 천만 관객이 들고 나서 힘들었다. 앞으로 잘해야 할 것 같았고 잘하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잘해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요즘에는 그런 생각을 못한다. 바로 뒤에서 (다음 작품이) 빵빵대기 때문에 생각할 여유가 없다.” 다양한 기획을 시도하고 매번 대중성을 염두에 두는 것도 그때의 경험 때문이다. “투자 쪽에서는 〈부산행〉 같은 영화에 관심을 보인다. 작품이 잘되어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데 잘 안 되면 하던 것만 하게 된다. 오래오래 작품을 하려면 일정 부분 성과가 나와야 한다. 그래야 기회가 주어진다.”

연상호 감독의 신작 <기생수: 더 그레이>에는 인간의 뇌를 점령해 숙주로 삼는 기생수가 등장한다.ⓒ넷플릭스 제공

4월5일 공개된 〈기생수: 더 그레이〉는 ‘일정 부분’ 이상의 성과를 거둔 작품이다. 연 감독이 류용재 작가와 함께 각본을 쓰고 연출한 6부작 드라마로 4월17일 기준 2주 연속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시리즈(비영어) 부문 1위를 차지했다. 미국의 영화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는 신선도 100%를 기록해 호평을 받았다. 전 세계적으로 누적 판매 2500만 부 이상을 기록한 일본 만화가 이와아키 히토시의 〈기생수〉를 원작으로 한다. 인간을 숙주로 삼는 기생 생물과 이들을 저지하려는 전담팀 ‘더 그레이’가 싸움을 펼치는 가운데 기생 생물과 공생하게 된 인간 수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원작 〈기생수〉는 SF 액션 〈아키라〉와 더불어 연상호 감독의 ‘최애’ 만화다. “일본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다른 데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했다. 클라이맥스스튜디오(제작사)의 변승민 대표와 그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재미있어 하면서 알아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판권 구입을 못할 줄 알았는데 금세 고단샤(원작 출판사)와 미팅이 잡혔고, 그 자리에서 긴 시간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 내용을 (원작자) 선생님께 전달했다고 들었다. 아이디어를 재미있어 하신 것 같다.”

귀나 코를 통해 인간 몸에 침투하는 외계 생명체는 뇌를 점령해 인간을 숙주로 삼고 조종한다. 원작에서는 주인공 신이치의 뇌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고 오른팔만 장악하게 된 기생수가 등장한다. 〈기생수: 더 그레이〉의 수인 역시 기생수가 얼굴의 절반만 지배한다. 기생수 하이디와 수인은 한 몸을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력하며 지내야 한다. 수인은 이 기묘한 공생관계가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안정감을 느낀다.

‘기생 생물이 한국에서 나왔다면?’

기생 생물의 특성 이외에는 전부 새로 만든 이야기다. ‘기생 생물이 한국에서 나왔다면?’ 연상호 감독의 상상에서 시작했다. “원작이 공존과 공생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수인과 하이디라고 하는 전혀 다른 인물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것인가를 핵심에 놓았다. 소통의 어려움을 좀 더 강조했다.” 평소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힘을 발휘할 때 몸의 일부가 촉수처럼 뻗어 나가 칼날이나 이빨 등으로 변해 인간을 해치는 기생수의 모습이 어떻게 CG로 구현되었을지 기대를 모으기도 했다. 수인의 머리에서 뻗어 나오는 기생수가 선보이는 일명 ‘상모돌리기’ 액션이 눈길을 끌었다.

<기생수: 더 그레이> 촬영 현장에서 연상호 감독(가운데)이 배우들에게 장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매 작품 비슷한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관을 그려내는 작가 연상호를 두고 ‘연니버스(연상호+유니버스)’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대체로 장르물이고 디스토피아를 비롯해 미래 세계를 다루기도 하지만 그의 작품은 항상 현재의 ‘문제적 상황’을 연상하게 만든다. 어딘가 불편한 지점을 건드리는 데 인정사정없는 편이다. 만듦새의 기복이 있고 그에 따라 대중의 평가도 나뉘지만 폭력의 기억을 그린 〈돼지의 왕〉은 ‘이야기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는 드문 애니메이션(이동진 평론가)’이었고 〈부산행〉은 ‘좀비 호러를 가장한, ‘헬조선’에 대한 강력한 언급(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지옥〉을 통해서는 ‘이질적일 수 있는 요소들을 하나의 호흡 속에 묶어’ ‘연상호 특유의 상상력과 독특한 세계관(송경원 평론가)’을 보여주었고 오컬트 드라마 〈방법〉은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해가고 혐오가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사회에 대한 탁월한 은유(김선영 칼럼니스트)’였다. 공통적으로 어느 국면에서도 발휘되는 인간의 탐욕을 그리되, 끝내 희망을 놓지는 않는다.

최근 작품에서는 조직과 개인을 둘러싼 이야기가 자주 눈에 띈다. 지옥의 사자들이 등장해 사람들에게 ‘지옥행’ 선고를 내리는 설정의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에는 대혼돈 속에서도 부흥을 꾀하는 종교 단체 새진리회가 등장하고 이번 작품에도 종교 단체, 경찰, 조직폭력배가 나온다. 종교 단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동하는 집단이어서다. “지금 직면한 문제를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는데 요즘은 이데올로기의 세상 아닌가. 뭘 믿고 살아야 할지 모르는 세상에서 나 역시 혼돈을 느끼다 보니 그런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국가도 마찬가지지만 종교가 특히 그런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연상호 감독의 작품에는 종교 단체가 자주 등장한다. 위는 <기생수: 더 그레이>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장르물을 다루다 보니 연상호 감독의 작품에는 CG가 많이 쓰인다. 연출하기 쉽지는 않다. 촬영 현장에서 배우들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감독 스스로도 확신이 필요하다. “감독이 현장을 압도하지 않으면 사실 (연기하기) 힘든 행동들이기 때문에 일부러 확신을 가지고 하는 편이다.” 이번에는 수인의 ‘상모 돌리기’ 액션에 대한 기대가 있다. “작품의 ‘시그니처’가 되는 동작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편이다. 공감을 얻은 적도, 아닌 적도 있지만 서브컬처 장르를 다루려면 그런 데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된다.” 〈부산행〉 당시 보조 출연자들에게 좀비의 움직임을 가르칠 때도 다소 과격한 동작들이 있었다. 당시 연 감독이 살던 아파트 앞을 지나는 초등학생들이 영화에 나오는 좀비 자세를 흉내 내기도 했다. 그걸 보며 ‘아, 저거는 된다(흥행한다)’라는 감이 왔다. “약간 우습거나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무난한 동작이 오히려 위험하다. 액션 스타일에 대해서는 주장을 많이 했다.” 그의 바람 중 하나는 ‘기생수 상모’가 출시되는 것이다.

“원래 대중적이지 않은 사람, 애썼다”

연상호 감독은 누구보다 유연한 창작자이기도 하다. 영화, TV 드라마, OTT 등 다양한 플랫폼을 넘나들며 6부작 시리즈를 연출하거나 2시간 남짓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12부작 드라마의 각본도 썼다. 지난 몇 년, 계속해서 달라지는 콘텐츠 업계의 복잡한 지형에서 그 혼돈을 몸으로 체득한 편이다. 최근 6부작 시리즈를 연달아 했는데 영화 두 편을 찍는 느낌이었다. 더 길어지면 힘들 거고, 이제 6부작 정도면 알차게 일한다는 느낌으로 집중력 있게 작업할 것 같다.

연 감독이 썼거나, 쓰고 연출한 작품이 매년 한 편 이상 대중과 만난다. 기획하고 각본을 쓴 〈선산〉이 지난 1월 공개됐고 〈지옥 2〉도 올해 선보일 예정이다. 일을 많이 해달라고 주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로지 본인의 요청이다. 사실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연 감독이 쉼 없이 쓰는 비결은 스스로를 가두는 데 있다. “기획이 없는 상태에서 어떤 기획을 만들어야 한다고 틀을 만들어 그 안에 내 자신을 던진다. 생쥐처럼 그 안에서 뺑뺑이를 돈다. 돌다 보면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내 자신을 잘 안다. 가둬놔야지만 하지 내버려두면 아무것도 안 한다.”

최근 예전에 만든 작품들을 훑어보았다. 굉장히 낯설었다. 스스로도 B급 감성이라는 그로서는 “원래 대중적이지 않은 사람인데 그걸 하기 위해 애쓰는 게 보였다”. 관객의 반응도 중요하지만 그 무게감은 빨리 내려놓으려 한다. 흥행 성적이 좋아도 이삼 일 내에 그런 분위기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창작의 괴로움은 반복되지만 안 풀리던 장면이 풀렸을 때의 쾌감이 있다. 또 작품을 완성하는 동안 오래 함께 일한 스태프들과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 자체가 연 감독에게는 ‘힐링’이다.

<기생수: 더 그레이>는 공존과 공생에 관한 이야기다. ⓒ넷플릭스 제공

〈돼지의 왕〉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은 게 13년 전이다. 아직도 이 작품을 연 감독의 최고작으로 꼽는 팬들이 있다.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같고, 또 다를까. “그때의 연상호와 지금의 연상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상업영화로 넘어왔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바뀌기 때문이다. 그때는 미혼이었고 지금은 아이가 둘이다. 경제력만의 문제는 아니고 나이를 먹고 기성세대가 되다 보니 당시 감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없다. 작품에 대한 생각도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그가 얼마 전 기억을 더듬었다. 촬영하려고 새벽에 집을 나서는데 편의점 앞에서 젊은이들이 술을 먹고 있었다. 밤새워 마신 분위기였다. “‘그래, 저 기분 알지’ 그런 느낌이 좀 있었다. 그런데 내가 거기 있으면 그냥 술 취한 아저씨이고 기성세대다. 그 자리에 있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대로 봐주지 않기 때문에 바뀌어야 한다. 그게 자연스럽다.” 지금 촬영하는 작품 〈계시록〉은 CG 요소가 전혀 없다. 그렇게 그의 작품은 또 바뀔 예정이다. 〈기생수: 더 그레이〉가 공개된 지 나흘째, 인터뷰를 마친 뒤 “나는 이제 기생수를 완전히 잊기로 했다”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연상호 감독의 티셔츠에 ‘최애’ 만화라던 〈아키라〉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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