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화위, 한국 연금개혁 지형을 고스란히 드러내다

전혜원 기자 2024. 5. 3.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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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개혁 공론화위원회 시민대표단 투표 결과가 발표됐다. ‘더 내고 더 받겠다’는 응답이 ‘더 내고 그대로 받겠다’보다 높았다. 한국 연금개혁 지형의 현주소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공적연금강화 국민행동이 4월23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한국 사회가 2007년 이후 17년 넘게 연금개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연금개혁을 두고 첫 공론조사가 진행됐다. 공론조사란 별다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여론조사와 달리 학습과 토론 등 ‘숙의(깊이 생각해 충분히 논의함)’를 거치게 한 뒤 의견을 묻는 조사다. 국회 연금개혁 특별위원회 공론화위원회가 시민 1만명 중에서 성·연령·지역, 연금개혁에 대한 의견 분포를 고려해 시민대표단 500명을 선발했다. 공론조사 결과, 끝까지 참여한 492명 중에서 ‘더 내고 더 받기’(1안)를 선택한 시민이 56.0%였다. ‘더 내고 그대로 받기’(2안)를 선택한 이들(42.6%)보다 13.4%포인트 많았다. 이게 무슨 뜻일까?

연금개혁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먼저 월 소득의 몇 퍼센트를 보험료로 내는지를 뜻하는 개념이 ‘보험료율’이다. 현재 9%다. 은퇴 뒤 받는 연금액이 일할 때 벌던 소득의 몇 퍼센트를 대체하는지 나타내는 게 ‘소득대체율’이다. 40년 가입했을 때 40%다. 즉 현행 국민연금은 ‘보험료율 9%-소득대체율 40%’ 체제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1990년생이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2055년에 국민연금은 고갈된다. 이는 국민연금공단이 기금 운용을 잘못해서 벌어지는 ‘사고’가 아니다. 계산상 예측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까지는 가입자들이 낸 돈(보험료)의 두 배 이상을 연금으로 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늘어나던 시기에는 연금을 이렇게 설계해도 미래세대에 부담이 되지 않았다. 세대 간 아름다운 연대가 이뤄질 수 있었다. 이게 달라졌다. 세계 최고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연금을 받을 사람은 더 오래 사는 반면, 보험료를 낼 인구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물론 기금이 고갈된다 해도 연금을 못 받는 일은, 국가가 존재하는 한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지금과 같은 수준의 연금을 기금 없이 보험료로만 지급하려면, 기금 고갈 이후 시점의 일하는 세대가 월 소득의 35%(2078년)까지 보험료로 내야 한다고 추정된다. 같은 소득대체율(40%)의 연금을 받기 위해 이전 세대는 9%만 내던 보험료를 갑자기 4배 가까이 내라고 한다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미래세대는 없을 것이다. 기금 고갈을 최대한 뒤로 미뤄 미래세대의 부담을 덜어주어야 한다. ‘연금개혁’을 논의해온 이유다.

보험료율을 어느 정도 올려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소득대체율이다. 이번 공론조사는 보험료율을 올리되 그에 맞춰 소득대체율도 올릴지, 소득대체율은 그대로 두고 보험료율만 올릴지 시민대표단의 의견을 물었다. 1안은 보험료율을 지금의 9%에서 1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도 40%에서 50%로 올리자는 내용이다(‘더 내고 더 받기’). 2안은 보험료율을 12%까지만 올리되 소득대체율은 40% 그대로 두자는 내용이다(‘더 내고 그대로 받기’). 기금 고갈 시점을 2055년에서 뒤로 늦추는 효과는 1안이 6년, 2안이 7년으로 1년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금 고갈 뒤 미래세대가 내야 할 보험료율이 2안은 35.1%로 ‘현행 유지’와 비슷한 반면, 1안은 43.2%까지 오른다(〈그림 1〉 참조).

이번 공론조사 과정에서 ‘더 내고 더 받는’ 1안을 ‘소득보장론’, ‘더 내고 그대로 받는’ 2안을 ‘재정안정론’이라고 불렀다. 시민대표단 다수는 1안 ‘소득보장론’을 선택했다.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대로라면 기금 고갈 뒤 미래세대가 내야 할 보험료율이 35.0%까지 오른다고 해서 연금개혁을 추진하는 것인데, 시민대표단 다수는 왜 미래세대 최대 보험료율을 43.2%로 오히려 8.2%포인트 더 올리는 소득보장론을 선택했을까?

20대는 왜 ‘소득보장론’에 찬성했을까

숙의 토론에서 소득보장론 측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43.2%라는 미래세대 보험료율은 지금으로부터 70년 뒤의 연금재정을 계산해서 나온 수치인데, 지나치게 비관적이다. 국가가 저출산 고령화에 적극 대응하면 2055년에 기금이 소진되지 않을 수도 있다. 미래에는 자동화로 생산성이 올라갈 수 있고, 소득대체율을 올려 연금액이 늘어나면 내수도 활성화된다. 더욱이 기금이 바닥나도 보험료로만 연금을 충당할 필요는 없다. 국가 재정을 투입하면 된다.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올릴 경우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민연금에 지출하는 총금액은 2082년 최대 11.8%다. 물론 현행 제도를 유지하는 경우보다 2.3%포인트 늘어나긴 하지만, 그 정도 부담은 한국의 경제 규모에서 충분히 가능하다.’

이에 대한 재정안정론 측의 반박 논리는 이랬다. ‘국민연금 지출액이 2025년 GDP 대비 2.1%인 것을 고려하면, 2082년 11.8%는 지금보다 크게 늘어난다고 봐야 한다. 다른 나라는 이렇게 급격히 연금 지출이 늘어나지 않으며, 이미 받는 연금만큼 보험료를 내고 있다. 국고를 투입한다지만 세금 역시 미래세대의 부담이다. 향후 고령화로 의료비 지출도 커질 것을 고려하면, 현 세대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까지 높여 미래세대 부담을 키워선 안 된다. 출산율이 높아지고 경제성장률도 회복되면 좋겠지만, 쉽지 않다. 연금 재정추계는 인구 예측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 방법이고 다른 나라도 쓴다. 따라서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면 미래세대에 부담이 된다.’

시민대표단이 4월14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국민연금을 어떻게 개혁할지 결정하는 숙의토론을 하고 있다. ⓒKBS 유튜브 갈무리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소득보장론과 재정안정론 측 전문가들은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면 미래세대에 부담이 되는지 안 되는지’ 자체를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를 둘러싼 ‘낙관’과 ‘비관’ 사이에서 ‘낙관’이 선택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시민대표단 다수가 ‘미래세대에 부담을 주더라도 소득대체율을 올려야 한다’고 판단했다기보다는, ‘국가 재정으로 감당 가능한 수준이며 큰 부담이 아니’라고 봤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청년들은 미래세대가 감당해야 할 보험료 부담에 좀 더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을까? 공론조사 결과, 소득보장론에 가장 많이 찬성한 세대는 40대(66.5%)와 50대(66.6%)이긴 하다. 그런데 18~29세의 절반 이상인 53.2%도 소득보장론에 찬성했다. 전체 평균(56.0%)과 비슷한 수준이다. 오히려 60대 이상은 절반이 안 되는 48.4%만이 소득보장론에 찬성했다(30대는 48.6%).

여기엔 두 가지 측면이 작용했을 수 있다. 첫 번째, 청년 세대 역시 연금개혁에서 말하는 ‘미래세대’와는 거리가 있다. 현재 18~29세는 1995~2006년생이다. 설령 기금 고갈 뒤 최대 보험료율이 43.2%에 달한다고 해도, 해당 시점인 2078년에 일하는 세대는 그보다 더 후세대인 2019~2060년생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현재 5세 이하인 아이들, 말하자면 ‘현재 청년층의 자식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 경향이 강한 현 세대 청년들에게는 ‘자식 세대의 부담’이 자기 문제로 와닿지 않았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2030 세대의 노후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소득대체율을 올려야 한다’고 소득보장론 측 전문가들이 주장했고 이것이 상당수 시민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2030 세대는 향후 오를 보험료를 가장 오래 감당하며 노동시장에 남아서 일할 사람들이다. 이들로서는 보험료를 1%포인트 더 내고 소득대체율을 10%포인트 더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적어도 자신의 노후에는 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터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인 노인 빈곤율을 떠올리면 이런 불안은 당연하다.

그런데 정말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올리면 노후 빈곤 걱정이 없을까? 이것이 재정안정론 측 전문가들이 제기한 의문 중 하나였다. 사실, 소득대체율 40%는 40년 동안 보험료를 꼬박꼬박 부은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명목’ 수치일 뿐이다. 현재 국민연금 평균 가입 기간은 20년 정도에 불과하다. 국민연금은 최소 10년은 가입해야 받을 수 있고, 일부 재분배 기능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소득이 높고 오래 가입할수록 받는 연금액도 많다. 이런 상태에서 명목 소득대체율을 올리면, 결과적으로 가입 기간이 긴 고소득층일수록 추가로 받는 연금액이 증가한다.

재정안정론 측 전문가들은 소득대체율을 올리는 데 국가 재정을 써서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계층이 더 많은 액수의 혜택을 보게 하기보다는, 당장 보험료를 못 내고 있는 영세 자영업자나 프리랜서 등 저소득 지역가입자들에게 보험료를 지원하거나, 군복무·출산·실업 기간을 가입 기간으로 인정해주는 크레딧 제도를 통해 가입 기간을 늘려 실질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데 국고를 우선 지원하자고 주장했다. 은퇴해서 받는 연금이 국민연금만 있는 건 아니다. 국민연금 보험료를 많이 붓지 못했거나 최소 가입 기간인 10년을 채우지 못한 사람을 세금으로 지원하는 ‘기초연금’도 있다. 현재 빈곤 노인을 포함한 소득 하위 70%에게 월 33만원을 지급하는데, 재정안정론 측 전문가들은 이 대상을 좁혀서 가난한 사람에게 더 많이 주자고 했다. 또 월 소득의 8.33%를 사업주가 적립하는 ‘퇴직금’도 있다. 아직까진 대부분 일시금으로 수령하는데, 다른 나라처럼 은퇴 뒤 다달이 받는 퇴직연금으로 정착시키자고도 했다. 이렇게 ‘기초·국민·퇴직연금으로 구성된 연금 3총사’로 최소한의 노후 소득을 보장할 수 있다고 재정안정론 측은 제시했고, 소득보장론 측은 ‘국민연금 하나로 노후 빈곤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론화조사 결과, 이 두 의견 가운데 적어도 현재 한국 사회 여론 지형은 후자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상균 국회 연금특위 공론화위원장이 4월22일 연금개혁 공론조사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연합뉴스

공론화위원회는 시민대표단을 모집하기 전 시민 약 1만명을 대상으로 연금개혁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초조사를 했다. ‘재정 안정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개혁(34.4%)’해야 한다는 입장보다 ‘소득 보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49.0%)’해야 한다는 입장이 14.6%포인트 높았다. 이 비율을 반영해 시민대표단 500명을 구성했다. 즉 애초 시민모집단은 소득보장론 입장이 더 많도록 구성했다. 원래 공론조사는 일반 시민의 기존 여론을 반영해 참여자를 모집한다고 한다. 그래야 숙의에 따른 변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팩트 점검부터가 안 됐다”

모집한 직후인 3월22~25일 1차 조사를 실시했다. 그런데 이때는 ‘재정 안정’과 ‘소득 보장’ 같은 개념 대신, 수치를 제시하며 의견을 물었다. ‘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50%‘로 대표되는 1안과 ’보험료율 12%-소득대체율 40%’로 대표되는 2안을 선택지로 내밀었다. 노동조합과 사업주 단체 등 이해관계자로 구성된 의제숙의단이 재정안정론과 소득보장론을 수치로 구체화해 추려낸 안이다. 그랬더니 재정안정론에 해당하는 2안이 44.8%로, 소득보장론에 해당하는 1안(36.9%)보다 높았다.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18.3%였다.

이후 시민대표단은 각자의 집에서 자료로 학습한 뒤, 숙의 토론에 들어가기 직전인 4월13일 오전 2차 조사에 답했다. 이때 다시 소득보장론이 50.8%로 재정안정론(38.8%)을 ‘역전승’했다. ‘잘 모르겠다’는 10.3%로 줄었다. KBS 방송과 유튜브로 일부 생중계된 숙의 토론은 4월13~14일과 4월20~21일 나흘간 하루 종일 진행했다. 모든 학습과 토론을 마친 4월21일 3차 조사를 실시했다. 소득보장론 56.0%, 재정안정론 42.6%로 2차 조사보다 둘의 격차가 더 벌어졌다(12.0%포인트→13.4%포인트).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1.3%로 거의 사라졌다.

소득보장론 측 전문가로 숙의 토론에 참여한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연금개혁에 관한 정보가 균형 있게 제공될 경우 시민들의 선택이 어떨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 증거다. (…) 시민대표단은 미래보험료 35%라는 주장은 근로소득에만 보험료를 부과할 것을 전제한 것임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거부했다”(〈경향신문〉 4월25일자 칼럼)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구체적 안을 물은 1~3차 조사를 보면, 회차를 거듭할수록 소득보장론이 재정안정론을 앞지른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최종이라 할 수 있는 3차 조사 결과는, 대략적 개념을 물었던 맨 처음의 기초 조사와 의견 분포가 비슷하게 나왔다. 중간에 질문이 달라졌기 때문에 숙의의 영향을 해석하기가 간단치 않다.

2020년 3월25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무료급식소 앞에서 노인들이 주먹밥 배식을 기다리고 있다.ⓒ시사IN 이명익

분명한 것은, 마지막까지 양측이 사실관계를 두고 공방을 벌였다는 점이다. 모든 숙의 토론을 마치고 투표 전 소감을 묻는 자리에서, 시민대표단으로 참여한 서울 시민 유성호씨(63)는 이렇게 말한다. “소득 보장과 재정 안정 측의 미래에 대한 데이터 산정 방식이 서로 너무 달라 팩트체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어 결론 도출에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재정안정론 측 전문가로 참여한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도 이렇게 지적했다. “‘소득대체율 인상은 노인 빈곤 개선 효과가 미미하다 vs 노인 빈곤이 심각하니 소득대체율을 올려야 한다’, ‘13%-50% 방안은 미래 재정을 악화시킨다 vs 현재보다 재정이 나빠지지 않는다’…. 사실 이 내용은 연금개혁에서 서로 강조하는 가치, 주장과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를 확인하면 정리되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제한된 시간과 토론 형식으로 반박의 기회를 갖기 어려웠고 시민대표단은 이를 지켜보며 내내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공론화 자리에서조차 팩트 점검을 하지 못하는, 우리 연금개혁 지형의 부끄럽고 어처구니없는 현주소이다(〈경향신문〉 4월25일자 칼럼)."

복지정치 연구자인 김영순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기초교육학부)는 자신의 책 〈코끼리 쉽게 옮기기〉(후마니타스)에서 영국의 연금개혁 과정을 복기한다. 영국 노동당 정부가 2002년 시작해 2011년에 마무리한 일련의 연금개혁은, 이전의 대처 정부가 민영화·자유화·개인화했던 연금제도 전반에 대해 다시 국가 개입을 강화했다. 김 교수는 당시 3명으로 구성된 영국 연금위원회가 최소한 “상태 분석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기초적인 사실을 제시하는 데 주력했고, 2005년에는 영국 8개 지역에서 ‘전 국민 연금 토론’이 열리는 등 광범위한 대중 협의가 진행되었다며 이렇게 쓴다. “시민들은 숙의 과정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게 되었고, 노후 대비의 비용과 책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공로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사실들’을 보여주는 연금위원회의 기초 작업에 있었다.”

김영순 교수는 이번 연금개혁 공론조사에 대해 “공론화 실험은 특정 장소에 모인 사람들끼리만 깊이 공부하고 토론해서 결론을 내는 과정이 아니다. 그걸 하는 동안 (시민대표단) 바깥에서도 활발하게 논쟁이 일어나면서 공통의 사실 인식에 도달하고 그를 바탕으로 견해를 발전시키는 게 핵심이다. 그러려면 토론이 벌어지기 전 한 달 정도는 매주 신문과 TV에서 연금개혁을 특집으로 다룰 만큼 전 사회적 화두가 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숙의 토론은 총선 직후(4월13~14일, 4월20~21일) 급박하게 이뤄졌다. 공론조사에 참여한 ‘미니 퍼블릭’이 전체 시민들과 연계되지 못하고 섬처럼 떨어져 있었다. 학습과 토론의 근거가 될 숙의 자료집과 이러닝 영상은 공론조사 기간 막바지인 4월15일과 4월17일 각각 올라왔다. 공론화 목적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학습과 토론에 쓰인 숙의 자료집과 이러닝 영상의 오류가 뒤늦게 발견되기도 했다. 소득보장론 측 전문가 김연명 중앙대 교수(사회복지학)가 만든 학습 자료의 한 대목에서다.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올리면 국민연금에 40년 가입한 생애 평균 월소득 150만원인 저소득층의 월 연금이 현 63만원에서 113만원으로 50만원 오른다고 돼 있으나, 실제로는 90만원에서 113만원으로 23만원 오르는 게 맞다. 즉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릴 경우 국민연금에 40년 가입한 저소득층은 23만원, 평균 소득자는 30만원, 고소득층은 45만원 연금이 오른다. ‘저소득층에게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효과가 미미하다’는 재정안정론 측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인데, 거꾸로 저소득층에게 소득대체율 인상의 효과가 더 큰 것으로 수치를 잘못 기재했다. 김연명 교수는 “수치가 잘못된 게 맞다. 고친다고 생각해놓고 놓쳤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발표문) 슬라이드의 수치 한 개가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중앙일보〉에 해명했다.

<그림 2> 저소득층 연금 인상액 수치가 잘못 기재된 숙의자료집의 한 대목.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하면 저소득층 연금액은 월 50만원이 아니라 23만원 증가한다.

한국 사회에서 소득보장론은 주로 진보 진영이, 재정안정론은 주로 보수 진영이 주장해왔다. 2007년 노무현 정부는 당시 60%이던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점진적으로 40%까지 내리고, 보험료율(9%)을 올리지 않는 대신 기초연금과 퇴직연금을 도입했다. 소득대체율은 엄밀히는 올해 42%이고 2028년부터 40%가 되는데, 진보 진영은 이 추세를 되돌려 소득대체율을 45%나 50%로 올리자고 주장해왔다. 양대 노총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을 요구하는 조직 ‘공적연금강화 국민행동’은 “이제 국회의 시간”이라며 공론조사 결과대로 연금개혁을 하라는 취지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소득보장론, 국민의힘은 재정안정론에 가까운데, 둘 다 구체적인 개혁안은 내놓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윤석열 정부가 뚜렷한 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여야가 두 방안의 절충안(예컨대 보험료율 12%, 소득대체율 45%)을 합의할 여지도 없지는 않지만, 제21대 국회 임기가 종료되는 5월29일 안에 합의를 이루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숙의 토론이 생중계된 유튜브 댓글창에서 가장 많이 보인 댓글은 ‘더 내고 더 받겠다’라거나 ‘더 내고 그대로 받겠다’가 아니라 ‘안 내고 안 받으면 안 되느냐’였다. “폐지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의 연금제도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높일지가 핵심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소득보장론’과 ‘재정안정론’ 사이에 선을 긋는 지금의 구도가 과연 유용한지 잘 모르겠다.” 정재철 전 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 선임연구위원(사회정책 박사)의 말이다. 국민연금의 ‘재정 안정’은 시민들의 노후소득 보장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동시에 노후 ‘소득 보장’을 하지 못하는 기금 안정은 의미가 없다. 어쩌면 공론조사가 새삼 깨닫게 한 사실은, 우리 공동체의 목표가 둘 다여야 한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개혁안’ 지지부진한 사이 ‘해체론’ 떠올라

정재철 박사는 일본의 연금개혁 과정을 연구했다. 일본도 우리처럼 재정계산 결과가 발표되는 5년마다 연금 불신이 불붙었다. 하지만 2004년 의회에서 대대적인 연금개혁안을 통과시켰다. 2003년 13.6%이던 보험료율을 2017년 18.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도 낮추었다. 이때 소득대체율이 일정 기준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도록 하고 보험료율 상한도 18.3%로 못 박았다. 또한 인구구조 변화에 따라 연금액을 조정하는 ‘자동 안정화 장치’를 도입했다. “‘보험료를 둘러싼 세대 간 대립’에서 ‘미래세대의 연금액 확보를 위한 세대 간 양보’로 프레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후생노동성 관료와 정치인, 전문가 집단의 공통된 문제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도 연금제도 불신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이 이상은 보험료를 올리지 않겠다, 정부가 이 이상은 연금을 깎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시민들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처럼 연금 고갈과 그로 인한 보험료율 폭등을 전제로 선택지를 제시하는 방식으론 어렵다. 노후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청사진을 보여줘야 한다(정재철 박사)."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국민연금을 ‘구연금’과 ‘신연금’으로 나눠 구연금의 재정적자는 국고로 충당하고, 2006년생부터 적용할 신연금은 보험료(15.5%)를 낸 만큼만 연금을 받는 방식으로 개편하자고 제안했다. 이준석 대표의 개혁신당이 사실상 지지하는 안인데, 600조원에 이르는 구연금 재정적자를 메울 방안이 마땅치 않다. 무엇보다 신연금을 받는 세대의 연금액이 매우 낮아질 위험이 있다. 연금개혁은 지지부진하고 거대 양당이 책임 있는 안을 내놓지도 않는 사이, 이 같은 ‘연금 해체론’이 일각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시간이 없다.

전혜원 기자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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