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칸트 내면에서 벌어지던 철학적 대공사 [책&생각]

고명섭 기자 2024. 5. 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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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300돌을 맞은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 위키미디어 코먼스

인간의 조건
칸트의 인본주의
백종현 지음 l 아카넷 l 2만2000원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 탄생 300돌을 기념해 칸트 전문가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의 ‘인간의 조건’이 나왔다. 반세기에 걸친 칸트 연구 도정에 발표한 논문 중에서 “칸트 철학의 정수를 밝힌 수편을 뽑고 칸트의 인본주의 사상의 요점을 정리해 묶은” 책이다. 칸트 철학 세계를 탐사하는 데 길잡이 노릇을 해준다.

칸트는 역사상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독일의 칸트협회는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이 칸트에 모여 있고, 칸트 이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부터 흘러나왔다”고 칸트 철학의 역사적 위상을 평가했다. “칸트를 추종하거나 반대하면서 철학할 수는 있어도, 칸트를 모르고서는 철학할 수 없다”는 오늘날의 평가도 칸트 철학의 영향력을 가늠하게 해준다.

칸트는 1724년 4월22일 프로이센왕국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에서 마구를 만드는 아버지와 독실한 경건주의 신앙인 어머니의 아홉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16살에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 입학해 철학·수학·자연과학을 공부하고 22살 때 ‘활력의 참 측정에 대한 견해들’이라는 논문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부모를 여읜 가난한 칸트는 이후 9년 동안 가정교사로 생계를 유지하며 학업을 계속했다. 31살 때 박사학위 논문 ‘불에 관하여’를 쓰고 이어 교수자격을 얻어 철학·자연과학·신학·인간학을 강의하는 사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41살 때인 1765년 왕립도서관 부사서직을 맡아 생에 처음으로 고정 급여를 받았고, 46살이 되던 1770년에야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형이상학과 논리학’ 강좌 정교수가 됐다. 이후 거의 모든 사교생활에서 물러나 10년 동안 연구에 매진해 1781년에 주저 ‘순수이성비판’을 내놓았고, 이어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을 출간해 철학사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칸트는 말년까지 탐구를 계속해 상당량의 유고를 남긴 채 1804년 세상을 떠났다.

칸트의 사상 편력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으로 귀결했다. 이 물음의 답을 찾는 여정에서 인식론적 물음, 윤리적 물음, 종교적 물음을 물어 나갔는데, 이 책은 그 물음들에 대한 칸트의 답변을 차례로 답사한다. 이중 ‘인간의 세계 인식’을 다루는 첫번째 장은 칸트의 인식론과 그 인식론이 피히테-셸링-헤겔의 독일 관념론으로 변주되는 과정을 살핀다. 칸트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고, 우리의 감성이 수용해 지성으로 파악한 대상일 뿐이라고 보았다. 우리의 인식 주관이 파악한 그 대상을 칸트는 ‘현상’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현상’ 너머의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 이로써 사물 자체에 대한 앎에 토대를 둔 기존의 형이상학이 붕괴했다.

그러나 칸트 당대에 피히테는 칸트의 주관 철학을 나름대로 해석해, ‘자아가 자아 안에서 비아를 맞세우고 그 비아에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형식을 부여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자아가 비아 곧 세계를 정립한다는 얘기다. 피히테의 주장은 자아가 ‘사물 자체’를 포함한 세계를 세운다는 뜻을 포함한다. 셸링은 피히테의 형이상학을 더 멀리 밀고 나아가 절대적 자아에서 시작하는 ‘초월적 관념론 체계’를 세웠다. 1799년 칸트는 ‘피히테의 지식론에 관한 해명서’를 발표해 “피히테의 지식론 체계는 전혀 유지할 수 없는 체계”라고 비판했다. 피히테가 ‘사물 자체’ 개념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초월철학(선험철학)을 왜곡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말년의 유작에서 칸트는 피히테와 셸링의 관념론과 유사하게 “세계 일반을 정초하는” 형이상학으로 나아가는 사유의 궤적을 보여준다. 죽음을 앞둔 칸트의 내면세계에서 “‘나’의 토대 위에 땅의 나라와 하늘의 나라 모두를 건립하는” 대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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