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어로 읽는 청오 차상찬] 5. 가련한 소녀 (1925년 4월 ‘개벽’ 제58호)

이현준 2024. 5. 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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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에서 나는 어떤 친구의 초대로 영성관(永盛館)이라는 요릿집에 갔었다.

그 집에는 명색 기생이 3, 4명이 있는데, 그중에 나이가 불과 13~14세 되는 소녀 하나가 있었다.

그 소녀는 또 귀에 대고 "어머니가 어떤 사주쟁이에게 저의 사주를 보니까 일곱 번이나 과부가 될 팔자인데, 기생이 되면 말년 운이 좋겠다고 해서 서울에 기생으로 입적시키려고 하다가 아버지가 남에게 부끄럽다고 이리로 보내서 왔습니다"라며 두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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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가 가져온 소녀의 불행 한탄 …어린이 인권 수호자
1923~1925년 ‘조선문화 기본조사’ 실시
전국 13도 순회 14회 답사 중 11회 참여
충청북도서 만난 여학생 기구한 삶 서술
미신 탓 기생 신세 안타까운 시선 엿보여
아이들과 함께 동물원 방문 등 활동 다양
어린이날 주도적 제정·계몽 운동 힘써
1925년 4월 ‘개벽’ 제58호 에 실린 차상찬의 글 ‘가련한 소녀’

충주에서 나는 어떤 친구의 초대로 영성관(永盛館)이라는 요릿집에 갔었다. 그 집에는 명색 기생이 3, 4명이 있는데, 그중에 나이가 불과 13~14세 되는 소녀 하나가 있었다. 그 소녀는 나를 보고 반가워도 하며 또 부끄러워도 하는 표정으로 인사를 하더니 한참 있다가 내 곁으로 와서 귀에다 대고 “선생님! 여기는 어떻게 오셨으며 또 언제 오셨어요?”라고 묻는다.

나는 깜짝 놀라서 “네가 어떻게 나를 아느냐?” 하니, 그 소녀는 또 귀에다 대고 “네! 저는 본래 서울 ○○여학교 학생으로 ○○○소년회를 다녔었는데, 그때 선생님을 자주 뵈었습니다”라고 한다. 나는 반갑고도 또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그 소녀에게 어찌하여 기생이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 소녀는 또 귀에 대고 “어머니가 어떤 사주쟁이에게 저의 사주를 보니까 일곱 번이나 과부가 될 팔자인데, 기생이 되면 말년 운이 좋겠다고 해서 서울에 기생으로 입적시키려고 하다가 아버지가 남에게 부끄럽다고 이리로 보내서 왔습니다”라며 두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더니 다시 귀에다 대고 “서울 가시거든 우리 선생님 보시고 이 말씀을 하지 마시고, 저의 동무를 만나셔도 아무런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한다. 이어 노래를 하는데 아직 기생의 소리는 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배운 창가와 소년회가(小年會歌) 또는 소년 가극을 할 때 하던 창가를 한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잘한다고 재미있게 들으나, 나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아! 가련한 소녀! 전날에 천진난만하던 그 순결한 몸이 어찌 오늘에 이 악마의 굴에 빠질 줄 알았으랴? 단지 무식하고 사리에 어두운 그 부모의 죄악이며, 미신 많은 우리 사회의 죄악이다. 이 세상에 이런 비참한 일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 해설

차상찬은 어린이를 사랑했다.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했고, 그 사랑은 가정을 넘어 조선팔도로 향했다. 그리고 그 흔적은 고스란히 ‘조선문화의 기본조사’에도 남았다.

개벽사는 1923년 2월부터 1925년 11월까지 근 3년에 걸쳐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를 시행했다. 제주도를 제외한 13도를 박달성, 김기전 등 개벽사의 주요 인사가 직접 답사했다. 그중에 가장 많은 답사를 한 사람이 바로 차상찬이었다. 그는 총 14회의 답사 중 11회에 참여했고, 문헌조사와 취재를 통해 일제 치하의 조선 사회상을 꼼꼼히 담아냈다.

‘가련한 소녀’는 이 과정에서 겪은 경험담을 서술한 글이다. 차상찬은 강원도를 포함해 5도를 동행 없이 혼자 답사했는데, 이 글은 ‘충청북도 답사기’에 실려 있다. 불과 몇 년 전 ‘천도교소년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어린 여학생의 기구한 삶에 대해 담고 있으며, 무지와 미신에 둘러싸인 어린이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차상찬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차상찬은 주도적으로 어린이날을 제정했을 뿐만 아니라, 답사 중에도 각지의 어린이 운동이 잘 이뤄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독려했다. 또한 강연 등을 통해 어린이와 어른들을 계몽하려 애썼고, 어린이들과 동물원을 가거나 교통조사를 함께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아이들의 인권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또 5월이 왔다. 차상찬 선생의 계절이다. 늘 청년이길 희망하고, 자신의 호마저 ‘청오靑吾’라고 지었던 그에게 5월은 푸른 날의 상징이다. 또한 천도교소년회의 일원으로 방정환 등과 함께 어린이날을 공식 선포한 그 5월이기도 하다. 당시 선생의 바람만큼 우리 사회의 어린이들이 보호받고, 사랑받고, 주체적인 존재로 인정받는지 생각해 볼 시점이다.

아이들이 푸르게 웃는, 푸른 바람이 부는, 다시 5월이다.




· 해설=이현준 한림대 강사·강원문화교육연구소 차상찬연구팀

· 발췌문헌=1925년 4월 ‘개벽’ 제58호

· 현대어 번역=강원문화교육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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