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충돌 지각변동기…정치는 ‘19세기의 실패’를 기억하라”

곽정수 기자 2024. 5. 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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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14회 학현학술상 수상 이제민 명예교수
제14회 학현학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제민 연세대 명예교수가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 사옥에서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조선이 19세기 말 실패한 것은 우물 안 개구리식으로 세계정세에 무지했고, 군사력으로 본 국가역량이 너무 취약했으며, 내부분열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계정세 파악이나 군사력은 괜찮지만, 정치가 여전히 내부결속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제14회 학현학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제민(74) 연세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현재 한국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이 헤게모니를 두고 충돌하면서 국제질서가 지각변동하는 시대를 맞고 있다”면서 “역사적으로 보면 14세기(원·명 교체기와 조선 건국), 17세기(명·청 교체기와 병자호란), 19세기(제국주의 침략)와 비교할 수 있는데, 두 번째와 세 번째 모두 실패한 경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대표 수상작인 영문 저서 ‘한국의 경제발전:성장과 굴곡의 과정’에서 한국의 전통사회로부터 최근까지 한국경제의 전환과 발전과정을 분석·평가했다. 그는 “경제발전은 경제적 분석만으로는 이해를 못 하고 역사, 정치, 사회 같은 다른 학문과의 학제적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면서 “경제발전 과정을 정치·역사적 변화와 연결해서 설명하고자 노력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제대로 하지는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심사위원단은 장기적 경제발전에 관한 세계 학계의 논의 틀 속에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설명한 것이 저서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선정 이유에서 밝혔다. 최근 장기적 경제발전과 관련한 주요 연구주제 중 하나는 근대 이후 유럽과 아시아 간의 격차 확대이다. 중국사 권위자인 케네스 포메란츠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이를 두고 ‘대분기’(그레이트 다이버전스)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에 더해 이 교수는 20세기 이후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의 경제적 추격에 주목해 대수렴(그레이트 컨버전스)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 교수는 “과거 유럽 주도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 중에서 한국이 유일하게 선진국 진입에 성공했고, 중국도 대수렴의 길에 들어섰다고 봐야 한다”면서 “수백년간 지속한 서구의 지배가 뒤집히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데,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려고 했다”고 집필 배경을 설명했다.

영문 저술 ‘한국의 경제발전…’에서
전통사회부터 경제전환 과정 되짚어
식민지에서 선진국 발돋움 배경 연구
“헤게모니 충돌 시대, 역사에서 교훈을”

“정부, 물가불안 수습 위해 통화긴축을
재정 지출 줄이고 세금은 올려야”

그는 조선이 초기 산업화에 동참하지 못해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한국이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을 시작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일제 강점기가 남긴 인프라, 공업화 경험 등의 유산에다, 1950년대 냉전체제 하에서 대다수 신생독립국과 다른 경제체제가 성립한 것을 들었다. 대다수 신생독립국이 사회주의나 제3세계 민족주의를 추구한 결과 경제발전에 실패했지만, 한국은 자본주의 경로를 밟았다. 이런 조건 위에서 박정희 정권이 국가역량 향상을 통해 정책의 유효성을 높임으로써 고도성장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 모든 것들이 일제의 식민지배, 분단과 전쟁, 박정희의 권위주의 정치 등 어두운 면과 같이 진행됐다는 것을 균형 있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나아가 한국이 어렵게 시작한 고도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에서 더 중요한 성공의 이유를 찾았다. 그는 한국이 위기가 빈발하는 속에서도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던 과정을 거시경제 관리, 구조전환, 사회갈등 관리 등 세 측면에서 설명했다. 이 교수는 거시경제 관리의 사례로 1979년 위기 극복을 꼽았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이어진 물가불안과 외채위기 위에 제2차 석유파동과 박 대통령의 암살이 겹치면서 큰 위기를 맞았다.

이제민 연세대 명예교수.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1979년 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심각했는데, 전두환 정권이 수습했다. 물가불안은 경제 전문가들이 안정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도록 해서 잡고, 외채불안은 일본으로부터 40억 달러(경제협력자금)를 빌려서 해결했다.” 그는 이어 “당시 일본이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 하자, 한국은 냉전체제의 최전방에서 막대한 국방비를 부담하는데 일본은 무임승차하면서 돈도 빌려주지 않는다고 레이건 미 행정부를 설득해서, 일본에 압력을 넣도록 했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을 1979년 위기와 달리 국제질서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에서 찾았다. 이 교수는 “당시 외환위기는 일본 은행들이 한국 은행들에 빌려준 단기자금을 자체 사정 때문에 급격히 회수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면서 “위기 이후 일본이 아시아통화기금(AMF)으로 한국 등 위기에 처한 동아시아 국가들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미국의 강경한 반대로 무산됐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반대한 것은 미국 경제의 주도권이 금융부문으로 옮겨가고, 냉전종식으로 미국 헤게모니의 성격이 변했기 때문인데, 한국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과 관련 “물가불안의 수습을 위해 통화긴축을 하면서, 재정도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올리는 수축정책이 필요하다”면서 “현 상황에서 감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고, 성장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낮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경제발전학회와 경제사학회 회장을 지내고 문재인 정부에서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을 맡아 정책자문도 했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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