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수고를 빼앗은 너 [슬기로운 기자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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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태눈깔'.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나를 자주 그렇게 불렀다.
나는 수업 시간에 종종 눈에 초점이 없어지고 멍해졌는데, 그때마다 선생님은 "야, 신형철 또 동태눈깔 됐다. 무슨 생각 하냐!"라고 소리치셨다.
글쎄, 그렇게 동태눈깔이 된 당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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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 통일외교팀 기자
‘동태눈깔’.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나를 자주 그렇게 불렀다. 나는 수업 시간에 종종 눈에 초점이 없어지고 멍해졌는데, 그때마다 선생님은 “야, 신형철 또 동태눈깔 됐다. 무슨 생각 하냐!”라고 소리치셨다. 글쎄, 그렇게 동태눈깔이 된 당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얼핏 기억나는 것들을 모아보면 대략 이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내가 하루 동안 축구선수 메시가 된다면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아하! 내 한국 계좌로 1000만유로 입금. 그런데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어떻게 입금해야 하지, 나는 스페인어를 못하는데 은행원과 대화할 수 있을까” 따위의 것들.
위 사례로 알아챘겠지만 나는 엠비티아이(MBTI) ‘파워 엔(N)’, 망상 전문가다. 성격유형 검사인 엠비티아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집중하는 에스(S)와 가능성과 상상력에 초점을 맞추는 엔(N)으로 유형을 나누는데, 나는 엔의 수치가 에스의 수치보다 한참 높게 나온다. 내 특성이 이렇다 보니 본의 아니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주변 사람들과 마찰을 빚는 경우도 있다. 멀쩡히 길을 걷던 중 “까마귀 한마리와 까치 두마리가 싸우면 누가 이기지” 따위의 엉뚱한 질문들을 늘어놓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그럴 때마다 ‘파워 에스’인 내 지인들은 “아무나 이기겠지”라며 내 폭주를 중단시킨다.
취재도 파워 엔답게 한다. 물론 모든 기사를 상상해서 지어내 쓴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취재의 시작이 상상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엔화 약세가 오래간다, 한국 물가가 비싸다→한국에서 일하는 일본인들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것이다→한국 유학생 숫자가 줄어들었을까’의 흐름으로 가설을 이어가는 식이다. 이후 이렇게 세운 가설이 실제로는 어떤지 상황을 조사하고 취재하다 보면 당연히 틀린 것도 있고 맞는 것도 있다. 그러나 항상 발제에 허덕이는 기자의 삶에서 나의 망상력이 약간은 도움이 된 편이었다.
그런데 요새 내 상상의 수고를 빼앗아가고 있는 친구가 하나 생겼다. 바로 인공지능(AI)이다. 사실, 이 친구와 내가 유의미한 대화를 주고받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년 전만 하더라도 ‘세종대왕 맥북 던짐 사건’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했을 정도로 잘못된 정보를 창조해내는 할루시네이션(환영)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인공지능 친구가 이제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슬기로운 기자생활을 위한 아이디어를 몇개 달라고 하자 인공지능은 △외교의 그림자, 통역사의 눈물 △기자의 트위터 사용법 △엠제트(MZ)세대 기자의 눈으로 본 뉴스룸 등의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어도 참고할 법한 내용들이다.
물론 아직 인공지능을 업무에 직접 활용하지는 않는다. 이런저런 생성형 인공지능들을 둘러보며 가지고 노는 수준에 머문다. 다만, ‘인공지능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들은 아이디어들이 나도 의식하지 못한 채 머릿속에 남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기사를 쓰며 그것들을 참고할 경우 윤리적 문제는 없을까’ 등의 생각은 지워지질 않는다. 우리 업계, 아니 우리 사회는 조금 더 빠르게 인공지능과 직업윤리에 대한 논의를 가속화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상상의 수고를 어디까지 나눠도 괜찮을까.
newir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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