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사명대사 출가했던 절, 직지사…사시사철 아름다운 3만평 큰절 [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2024. 5. 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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㉕경북 김천 직지사(直指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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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직지사 대웅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앞마당엔 연등이 내걸려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 낸다.

‘진리는 자신의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다.’

‘모든 사람이 참된 마음을 깨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불교 선종의 주요 교리인 직지인심(直指人心)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

고려 말 청주 흥덕사에 머물던 승려 백운화상이 부처님의 깨달음인 ‘직지인심 견성성불’(직지심체)의 주요 대목만 골라 요약한 책을 금속활자로 펴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의 탄생이다.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됐는데 현재 파리 국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청주의 흥덕사는 현재 폐사지로만 남아 있고 그곳에서 110km 떨어진 경북 김천시에 있는 직지사(直指寺)가 이름만을 간직하고 있다.

백두대간 줄기 추풍령을 넘어 경북 김천 황악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는 직지사. ‘해동(과거 ‘우리나라’를 일컫던 말)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이라는 현판을 달고 방문자를 맞이하는 절이다.

1500년의 유산을 간직한 큰절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불교를 들여왔다. 한참 동안 귀족들의 반대로 백성들 사이에서만 퍼지다가 법흥왕 14년(527년)에서야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했다.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我道和尙)은 신라 포교에 진심이었다. 417년 구미에 살던 불교 신자 모례(毛禮)의 집에 은거하며 신라 최초 사찰인 도리사를 창건했다. 직지사는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하면서 418년 황악산 자락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다.

직지사로 이어지는 첫 번째 문.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 현판이 걸려 있다.

직지사라는 이름이 남종선(南宗禪)의 가르침인 ‘직지인심(直指人心)’에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아도화상이 직지사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절을 지으라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과 고려시대에 능여대사가 이 절을 중창할 때 자(尺)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 손으로 손수 측량하였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내려온다.

930년과 936년에 천묵대사와 능여대사가 각각 중창하며 대가람(큰절)이 되었다. 조선시대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출가하여 득도한 절로도 유명하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활약한 까닭에 왜군으로부터 혹독한 보복을 받았다. 일주문, 천왕문, 비로전만 남기고 전소했고 1610년 광해군 때에 이르러 복구했다.

풍광이 빼어난 절이기도 하다. 면적이 3만여 평에 이르러 경내로 들어서려면 울창한 노송과 맑은 계곡, 초록의 숲길과 함께 대웅전 가는 길목까지 여러 문(門)들을 지나친다. 초입에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을 지나 1km 남짓 숲길을 걷다 보면 ‘황악산 직지사’라 새겨진 일주문이 나온다. 이후 대양문, 금강문을 지나 천왕문에 다다른다. 최근에 이곳 사천왕이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후 친근한 배불뚝이 포대화상이 불자들을 맞이하는 만세루를 통과하면 비로소 대웅전 앞마당에 도착한다. 꽤나 긴 거리다. 그만큼 절이 드넓다.

일주문
천왕문

대웅전과 비로전 사이에 관음전, 사명각, 웅진전, 약사전 등 주요 건물이 들어섰다. 절 안에 조성된 단풍나무길은 명소다. 대웅전 앞마당엔 보물로 지정된 3층 석탑 2기가 우뚝 서 있다. 대웅전은 크고 화려하지만 절제되고 짜임새가 있는 형식미를 갖춰 종교적 장엄함을 풍긴다. 초파일을 앞두고 달아둔 연등과 어우러지니 더욱 아름답다. 대웅전 안에는 여러 부처들이 설법하는 장면을 표현한 삼존불 후불탱화 3점이 있다. 모두 6m가 넘는 거작으로 웅장함을 넘어 사람을 압도한다. 대웅전과 후불탱화도 모두 보물이다.

직지사 대웅전 내부. 삼존후불탱화 3점이 걸려 있다.
비로전에는 천개의 불상이 있다. 이 사이에 벌거벗은 동자승 불상이 있다.

천불(千佛)이 모셔져 있는 비로전에는 벌거숭이 동자승이 섞여 있는데 이 불상을 찾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때문에 불자들이 눈에 불을 켠다는 이야기도 있다. 필자도 찾아봤지만 주위 눈치 보느라 동자승을 발견하진 못했다. 비로전 앞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측백나무와 문경 도천사지에서 옮겨온 3층석탑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직지사의 많은 문화재 중에는 도천사지나 구미 강락사지 등 폐사지에서 옮겨온 유물들도 있다.

경북 북부지역 불교 문화재를 보관·전시하는 성보박물관은 마침 휴관일이어서 아쉬웠다. 신록의 숲향기, 풀내음에 취해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대양문으로 돌아왔다. 대양문 좌측의 조그만 문을 통과하니 놀라운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꽃잔디 미로길이라는 대형 설치물이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보이는 것은 일명 해인도(海印圖)라고도 불리는 ‘화엄일승법계도’인데 의상대사가 화엄경 80권 방대한 분량을 간결한 시(詩)로 요약한 법성계(法性界)를 54각(角)의 도장 문양으로 만든 상징물이다.

직지사 경내의 단풍나무길
직지사의 명물 가운데 하나인 해인도. 미로를 연상시키는 이 건축물은 의상대사가 화엄경을 요약한 법성계의 내용을 도장모양으로 만든 상징물이다.

불심으로 법성(法性)을 발견하고자 하든, 그냥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서든 ‘법계도’ 꽃길을 따라 많은 이들이 걷고 있었다. 5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우리나라 사찰에서 가장 큰 한옥 건물이라고 하는 만덕전에 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건립을 지원했다고 한다. 덕현스님은 직지사를 두고 “우리나라 사찰 중에 완주 송광사와 더불어 계단이 없는 사찰”이라고 했다. 실제로 만세루에서 대웅전 올라가는 몇 계단을 제외하곤 넓은 사찰 안에 경사는 있어도 계단이 없음을 알았다. 단(段)을 두지 않는 깊은 뜻을 혼자 추측만 해 본다.

이 절은 불교문화 전파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위한 최신 시설을 갖췄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특별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방문했을 때에도 설법전에서 설법을 듣는 사람이나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많이 보였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직지사엔 불자와 관광객이 늘 복작거린다.

직지사와 사명대사 유정
직지사 사명각 안에 걸린 사명대사 유정의 영정
평창 오대산 월정사에 있는 사명대사 영정. 사명대사의 영정은 여러점이 전해오는데,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직지사는 의병장 사명대사 유정(1544~1610년)이 출가한 곳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단풍나무길에 있는 사명대사의 진영을 봉안한 사명각은 정조 11년(1787년)에 처음 조성됐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직지사를 즐겨 찾았다. 현판 글씨는 대통령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직지사는 대구, 구미와 인접한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박정희, 노태우 두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듯 보인다.

천왕문 입구에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인 신묵화상과의 이야기가 담긴 널찍한 바위돌이 있다. 이곳 안내판은 직지사와 사명대사의 인연이 설명하고 있다.

“사명대사는 14세 때 모친을 여의고 15세 때 부친마저 돌아가시자 정신적 방황을 하였다. 그러던 중 직지사에 왔다가 은행나무 그늘 아래 널찍한 바위를 발견하고 낮잠을 잤다. 당시 주지 신묵화상이 벽안당에서 참선하던 중 사천왕문 앞에 황룡이 승천하는 환영(幻影)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나가보니 한 아이가 바위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신묵대사는 이 아이가 자신의 꿈에서 본 황룡임을 직감하고 거두어 제자로 삼았으니 그가 사명대사이다. 16세 되던 1560년 직지사에서 출가한 사명대사는 17세 때에 승과의 선과(禪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73년에 직지사 주지로 임명되었다.”

일명 사명대사 바위
사명각 전경

유정은 출가하여 당대 명사들과 종교를 초월한 교류를 하며 시회(詩會)를 즐기고 유학을 깨우치기도 했다. 선종의 본산인 서울 봉은사 주지직 등 모든 승직을 버리고 묘향산의 서산대사를 찾아가 3년간 수행하며 선맥(禪脈)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이후 전국을 돌며 참선하고 제자들을 길러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승군을 모집해 왜군과 싸웠다. 평양성 전투와 서울 탈환 작전 등에서 크게 활약했다. 7년의 왜란 동안 전설적인 일화와 전공을 세웠고 전쟁 후에는 강화를 위한 사절단에 합류해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전란으로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조선으로 귀환하기도 했다. 이후 스승의 사리탑이 있는 묘향산 보현사 주지를 하다가 낙향한 뒤 1610년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했다. 사명대사는 ‘살생금지’의 계율을 지키는 것과 ‘왜군과 맞서 싸움으로써 백성을 지키는 일’ 중 후자를 택한 승려다. 그의 호국사상과 중생구제사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사명대사 명상길

대웅전 뒤편으론 4.5km에 이르는 둘레길인 ‘사명대사 명상 길’이 있다. 이 길은 향토음식점 지구(직지상가)까지 이어진다.

얼마 전에 방문했던 밀양 표충사엔 사명대사의 사당과 유물기념관이 있었다. 그의 거룩했던 일생을 살펴볼 수 있었고 그 곳에는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와 임진왜란 때 전사한 영규대사 진영(얼굴그림)이 함께 모셔져 있다. 사명대사 출생지인 밀양시 무안면 진중산 기슭에는 1742년 후대 법손이 세운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가 있다. 비 비석이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렸다 해서 ‘땀 흘리는 비석’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천의 대표적 명승지
직지사의 돌다리. 경내 곳곳의 풍광이 이처럼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직지사를 품은 황악산(해발 1112m)을 절 마당에서 보니, 마치 학이 날개를 편 것처럼도 보인다. 최고봉인 비로봉을 비롯해 백운봉(770m), 신선봉(935m), 운수봉(680m) 등 큰 봉우리가 직지사를 감싼 덕분이다. 한국 100대 명산에 포함되는 산으로 백두대간에 위치하고 있다. 직지사 뒤편으로 정상까지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다.

구미김천KTX역에서 자동차로 30여분 거리에 직지상가(향토음식거리)가 있고 그곳까지는 김천 시내버스들이 자주 들락거린다. 그곳부터 직지사 가는 길은 온통 공원이다. 직지문화공원, 세계도자기박물관, 백수문학관, 친환경생태공원(선인장 온실), 사명대사 공원 등으로 이 일대는 김천의 최대 관광지다.

특히 사명대사 공원은 한옥형 숙박시설과 다양한 체험시설로 채워진 훌륭한 관광자산이다. 사명대사길(4.5km), 직지문화모티길(4.5km) 등 트레킹 코스도 잘 조성돼 있다.

직지사 덕현스님의 이야기 중에는 녹원스님(1928~2017)이 수차례 등장한다. 직지사의 지금이 있기까지 발전의 초석을 다지고 수행 기풍을 다진 큰스님이다. 직지사 교구본사 초대 주지부터 7번이나 주지를 연임했고 조계종 총무원장, 동국대 이사장도 지냈다. 어느 절이든 존경하는 큰스님이 있다는 것은 행복의 또 다른 표현이다. 사명대사와 녹원스님이 계셨던 직지사의 상큼한 봄기운을 듬뿍 받고 발걸음을 서울로 돌렸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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