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놀이가 밥인데… 학원만 가라하고 놀이터선 시끄럽대요”

조율 기자 2024. 5. 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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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 권리 돌려주세요”… 송중초 6학년들이 말하다
마음 편히 놀고 싶어요  지난 4월 25일 서울 강북구 송중초 6학년 2반 학생들이 ‘나에게 놀이란’이란 주제로 수업을 한 뒤 ‘우리는 얼마나 놀고 있을까?’ ‘우리는 왜 놀 수 없을까?’ 질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적은 글과 그림을 들고 웃고 있다. 윤성호 기자

오는 5일은 102번째 ‘어린이날’이다. 2010∼2020년도에 태어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어린이들은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옛노래 가사 말에 공감할 수 있을까. 문화일보는 지난 4월 25일 서울 강북구 송중초 6학년 2반 학생 21명을 만나 ‘놀이’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놀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친구와 놀기’, ‘놀이터에서 놀기’, ‘축구’ ‘농구’ 등을 말했다. 하지만 놀이터에서, 운동장에서 뛰어놀기를 꿈꾸는 아이들의 현실에는 놀 ‘시간’도 ‘장소’도 ‘사람’도 없었다.

놀 시간이 없어요
놀이가 밥·공기만큼 중요한데
하루 학업 시간만 8시간 30분

◇“놀이는 물, 산소, 밥인데…시간이 없어요” = 아이들에게 ‘놀이’가 무엇인지 묻자, 아이들은 ‘물’, ‘불’, ‘밥’ ‘산소’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의 몸에는 물이 70%가 있듯 가끔 제 머릿속의 70%가 ‘놀고 싶다’는 생각일 때가 있어요. 그리고 지금 시기에는 노는 것이 물을 마시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권태윤 양은 놀이를 ‘물’에 비유했다. 박태준 군에게 놀이란 ‘밥’이다. “맛있는 밥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고 중요하듯, 놀이와 휴식도 우리 삶에 필요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1명 학생 중 5명은 놀거나 쉬는 시간이 하루 1시간 30분이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바쁜 학교·학원 생활과 숙제였다. 박은호 군은 “공부와 놀이는 정반대라고 생각해요. 성적을 올리려면 공부를 해야 하니 놀기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권태윤 양은 “일주일에 학원을 8개를 다녀요. 학원을 마친 뒤 숙제를 하면 잠에 들기 바빠요”라고 답했다. 아이들의 노는 시간도 ‘학교와 학원, 학원과 학원 사이’, ‘귀가 후 숙제를 다 끝낸 뒤’가 전부였다. 별도의 ‘놀이 시간’을 가지고 있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2일 아동복지 전문기관 초록우산이 발표한 ‘2024년 아동행복지수’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동·청소년은 (초 1학년∼고 2학년) 하루 학업 시간으로 8시간 34분, 여가 시간은 4시간 27분을 할애하고 있다. 하루 학업 시간 중 2시간 45분은 학원·과외 등 ‘학교수업 외 학습’이다.

놀 장소도 태부족
공공놀이터 590명당 1곳 불과
아파트서 놀땐 어른들 눈치 봐

◇아이들은 놀 때도 어른들 눈치를 본다 = 박서현 양은 “공부하는 시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이 줄어들면서 놀이터나 키즈카페 등 어린이들의 놀이 장소도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이들이 마음 편히 뛰어놀 수 있는 공공놀이터는 부족한 상황이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전국에 설치된 ‘어린이 놀이시설’은 8만2086개다. 그러나 주택·아파트 등 단지 내 위치한 놀이터는 4만3712개인 데에 반해 공공놀이터는 1만1848개에 불과했다. 올해 4월 기준 0∼18세 미만 인구가 700만여 명이란 것을 감안하면, 아동·청소년 590명당 공공놀이터 1개가 있는 꼴이다.

아이들은 어렵게 찾은 놀이터에서마저도 어른들로부터 제재와 차별을 경험하기도 했다. 서현 양은 “저는 주택에서 살고 친구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자주 노는데, 아파트에 사는 한 할아버지가 ‘이 놀이터는 아파트 주민 거야!’라고 해서 저만 쫓겨난 적이 있어요. 속상했어요”라고 털어놨다. 구자현 군은 “놀이터에서 농구를 하는데 어떤 아저씨 아줌마가 나오면서 시끄럽다며 저희가 놀던 농구공을 저 멀리 날려버렸어요”라고 말했다. 서로의 경험을 공유한 아이들은 “우리가 불쌍하다” “놀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어른들에 화가 난다”고 말했다.

송중초 6학년 2반 한 학생은 ‘놀이’를 ‘물’이라고 정의했고, 한 학생은 ‘우리들이 놀 수 없는 이유’를 ‘공부’ 때문이라고 했다.

친구들은 다 학원에
시간나도 친구랑 스케줄 달라
방에서 게임에 몰두할 수밖에

◇결국 ‘사이버 세상’으로 = 놀 시간, 놀 공간이 부족한 아이들은 같이 놀 ‘친구’마저 없었다. 김다연 양은 “놀고 싶어도 친한 친구와 학원 스케줄이 서로 안 맞아 같이 못 놀 때가 많아요. 그럴 때는 그냥 집에서 핸드폰을 해요”라고 말했다. 김민준 군 또한 “평일에는 애들이랑 일정이 안 맞아서 보통 혼자 게임을 하며 논다”고 했다. 실제로 대부분 아이들은 여가 시간 중 대부분을 스마트폰·인터넷 등의 미디어를 보는 데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초록우산의 ‘2024년 아동행복지수’에 따르면 아동·청소년들은 하루 총 4시간 27분의 여가 시간을 보내는데, 이중 미디어를 보는 데 1시간 49분을 활용했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이 지난 3월 발표한 ‘2023 스마트폰 과의존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5년 유·아동(3∼9세)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은 12.4%, 고위험군은 1.7%이었는데, 2023년에는 과의존 위험군이 25%, 고위험군이 3.6%로 모두 두 배로 증가했다. ‘주 여가활동 1순위’를 스마트폰 이용이라고 대답한 초등학생은 56.7%에 달하기도 했다.

이날 수업에서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도 ‘놀이시간이 주어졌을 때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자 그 누구도 스마트폰이나 게임을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숨바꼭질’‘경찰과 도둑(술래잡기)’, 보드게임, 야구·축구 등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는 놀이였다. 놀 수 있는 공간과 시간, 친구가 있다면 아이들은 ‘사이버 세상’을 선택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배성호 담임 교사는 “100여 년 전 아이들이 즐겁게 놀 수 있는 놀이터와 환경을 마련해줄 것을 제안하셨던 방정환 선생을 비롯한 많은 분의 제안이 오늘날 더욱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조율 기자 joyul@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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