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시인은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100쇄 눈앞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5. 2.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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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요 시선집 분석해보니
문학과지성사 기형도 압도적
창작과비평은 정호승 1위
‘슬픔이 기쁨에게’ 45쇄 넘겨
2000년대 이후는 박준·황인찬
문지 600호·창비 500호 돌파
한국 독자에게 가장 꾸준히 사랑받았던 시집은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로 나타났다. 2000년대 이후 근래 시집 중에선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등이 꾸준히 읽히는 것으로도 조사됐다. 시집 독자가 갈수록 줄어들지만 이들 시집은 많게는 90쇄, 적게도 20~30쇄를 꾸준히 증쇄했다.

1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600호, 창비시선 500호 돌파를 기념해 두 출판사를 비롯해 시인선을 발간 중인 민음사·문학동네에 ‘최다 쇄(刷)를 찍은 스테디셀러 시집 톱10’을 각 사별로 집계한 결과,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은 최근 94쇄를 돌파한 것으로 확인됐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는 메모로 시작되는 이 시집은, 1989년 이후 문지 시인선 80호로 출간돼 24쇄를 찍었고, 개정판도 70쇄를 더 찍어 현존 최다 쇄로 기록됐다. 수년 내 100쇄 돌파가 확정적이다.

창비시선 19호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는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로 열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로 닫히는 정호승의 대표작이다. 이 시집은 1979년 처음 선봰 뒤 1992년 신판이 출간됐는데, 1992년 이후 32년 동안에 찍은 쇄수만 45쇄였다. 창비에 따르면 1979~1992년은 전산화 이전 시기인 데다 편집본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쇄수 판정이 불분명하다. 따라서 ‘슬픔이 기쁨에게’의 쇄수는 ‘입 속의 검은 잎’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

‘시인들의 시인’으로 기억되는 최승자의 1981년작 ‘이 시대의 사랑’은 43년간 57쇄를 기록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시 ‘일찌기 나는’),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시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등 전설적인 시가 수록된 이 시집은 여전히 생명력이 약동한다. 시인의 방랑은 그가 작년 말 영세식(천주교의 세례)을 치르면서 결국 신앙으로 귀결됐다.

문지의 20세기 시집 중에선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57쇄),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67쇄),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35쇄)의 증쇄가 두드러진다. 2000년대 이후로는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33쇄),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45쇄), 이병률 ‘바다는 잘 있습니다’(34쇄), 문태준 ‘가재미’(29쇄) 등이 약진했다. 2020년 이후 최다 쇄는 2년 전 출간된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25쇄)였다.

1975년 첫 출간된 창비시선 1호 신경림 ‘농무’는 1992년 이후 34쇄를 달성했다. 정호승 시인은 ‘슬픔이 기쁨에게’와 함께 1997년 출간된 창비시선 161호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로도 45쇄를 찍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39쇄), 김용택 ‘섬진강’(35쇄)과 ‘그 여자네 집’(41쇄),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37쇄)도 눈에 띈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로 끝나는 시 ‘노숙’이 수록된 김사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은 2006년 이후 29쇄를 찍었다.

민음사 ‘민음의 시’는 2022년 9월 300호를 돌파했는데 최다 쇄를 기록한 스테디셀러는 2012년 김수영문학상 수상시집인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로 22쇄를 돌파했다. ‘민음의 시’는 김수영문학상 수상시집일수록 유독 꾸준한 강세를 보였는데 2017년 수상시집 문보영 ‘책기둥’, 2018년 수상시집 이소호 ‘캣콜링’도 10쇄를 나란히 넘기며 꾸준히 독자와 만났다.

작년 10월 200호를 넘긴 문학동네시인선 중에선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압도적인 쇄수를 기록했다. 이 시집의 현재 쇄수는 62쇄로, 100년 남짓의 한국 현대문학사를 통틀어 단일 판본의 쇄수로는 ‘입 속의 검은 잎’에 이어 2위가 확실하다. 오은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29쇄), 신철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17쇄)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조사는, 단기간에 관심이 폭증해 많은 판매부수를 기록하며 베스트셀러가 될 순 있어도, 스테디셀러의 꾸준한 관심도를 보여주는 건 ‘증쇄’라는 판단하에 쇄를 기준으로 집계한 수치다. 출판사별로 500부, 1000부 단위로 소량 인쇄하더라도 증쇄가 연거푸 지속된다는 건 오래토록 사랑받는 시집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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