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프리즘] 주인 행세하는 고양이

2024. 5. 1.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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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상승 따라 인류 농사 시작
식량 노린 쥐 창궐, 고양이 불러
먹이도 안주니 주인 취급 안 해
기후 변해 반려동물화 아이러니

1969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국제동요경연대회에는 네 살짜리 여자아이가 등장했다. 그 아이가 부른 노래 제목은 볼레보 운 가토 네로(Volevo un gatto nero). 우리말 제목은 ‘검은 고양이 네로’. 매우 귀여운 노래이지만 나는 이 노래를 두려워했다. 노래보다 먼저 시청한 TV영화 때문이었다.

에드거 앨런 포 원작의 ‘검은 고양이’가 그것이다. 검은 고양이 플루토의 눈을 파서 목 매달아 죽였는데, 똑같이 생긴 고양이를 아내가 집에 데려온다. 어느날 주인공은 아내를 죽여 지하실 벽 속에 감췄는데, 나중에 벽에서 아내의 시체와 함께 두 번째 검은 고양이가 나온다는 이야기다. 에드거 앨런 포 때문에 고양이, 특히 검은 고양이는 내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마치 그 영화의 주제가인 것처럼 들리는 이탈리아 동요 역시 무서운 노래가 되었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고양이과 동물의 조상은 2500만년 전에 아시아에 등장했다. 이후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여 여러 종으로 진화했다. 2300만~500만년 전에 지구에는 중대한 기후변화가 일어났다. 기후가 더 시원하고 건조해진 것이다. 숲은 줄어들고 초원이 늘었다. 광대한 초원에서 풀을 먹는 초식동물이 본격적으로 진화했다.

고양이과 동물들은 묘한 상황에 놓였다. 먹잇감은 늘었는데 확 트인 풍경에서 사냥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림의 떡이었다. 그림의 떡이라도 먹어야 하니 기술이 필요했다. 은밀하게 이동하고 민첩하게 사냥하는 기술을 터득한 고양이과 동물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현생 야생동물세계에서 최고의 포식자가 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펠리스 리비카(Felis lybica)라고 하는 아프리카 들고양이가 있었다. 펠리스 리비카는 원래 사막과 사바나 지역에서 번성했는데 자연스러운 위장, 야행성 습관, 고독한 사냥 습성이 있다. 날씬한 체격과 예리한 감각 같은 신체적 적응은 오랜 시간에 걸쳐 험난한 환경에 적합하도록 연마되었다. 건조한 지역과 초목이 우거진 지역 모두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펠리스 리비카의 유연성이 결국 펠리스 카투스(Felis catus), 즉 집고양이에게 이어졌다.

펠리스 카투스 역시 다른 고양이과 동물처럼 고독한 사냥꾼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집고양이는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이것 역시 기후변화의 결과다. 지금으로부터 2만년 전에서 1만년 전 사이 동안 지구의 평균기온이 한꺼번에 4~5도가 상승했다. 이때 마지막 빙하기가 끝났고 지구에는 처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후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당시 인류는 때마침 농사를 발명하고 신석기인이라는 명함을 팠다.

수렵채취와 농사의 결정적인 차이는 ‘잉여’다. 수렵한 고기와 채집한 과일은 저장할 수 없지만 농사로 수확한 곡식은 얼마든지 저장할 수 있었다. 드디어 인류사에 재산, 빈부차이, 계급이 등장하게 되었다. 잉여 곡식은 쥐를 불렀다. 쥐의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 같았다. 쥐가 들끓는 인간 서식지는 고양이에게도 매력적이었다. 인간 근처에만 오면 쉽게 사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고양이과 동물은 접었다 펼 수 있는 접이식 발톱이 있다. 먹이를 추적할 때는 발톱은 접어넣고 푹신한 발바닥 패드로 조용히 쫓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강력한 뒷다리 근육과 유연한 허리를 이용하여 단번에 먹잇감을 후려친다.

인간에게 고양이는 친해지기는 어렵지만 고마운 존재였다. 게다가 따로 먹이를 줄 필요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고양이는 사람을 주인 취급하지 않는다. 우리가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삼게 된 게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기후변화의 결과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어촌 마을에는 고양이가 없었다. 고양이가 어디서나 고마운 것은 아니다. 어물전의 고양이는 곳간의 쥐와 같은 존재다. 우리 사회에도 쥐와 고양이 같은 존재가 있다. 고양이는 쥐만 잡아 먹는 게 아니다. 주인의 생선도 훔쳐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접이식 발톱으로 주인을 할퀼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얻어 먹는 주제에 주인 행세를 하는 고양이는 누구인가? 나는 그 고양이가 더 두렵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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