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개발 단기수익만 좇는 한국 日모리 같은 대형 디벨로퍼 안나와

손동우 기자(aing@mk.co.kr) 2024. 5. 1. 15:5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도시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인 시대…사업 현장서 보니
손지호 네오밸류 의장

지난해 11월 일본 도쿄 중심부에 아자부다이힐스가 문을 열었다. 롯폰기힐스로 유명한 일본 대표 디벨로퍼 모리빌딩컴퍼니가 주도한 프로젝트로 저성장·고령화된 일본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한 콤팩트 시티를 표방한다. 상업시설은 물론 주거시설과 녹지 공간, 학교, 병원, 호텔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우리나라 용산의 5분의 1 정도 되는 땅에 부촌과 판자촌이 뒤섞여 있던 이곳이 연간 3000만명이 찾는 도쿄 대표 중심지로 떠올랐다.

40여 년 전 만들어진 철도 차량기지를 재개발한 뉴욕 맨해튼 허드슨 야드. 릴레이티드와 옥스퍼드프로퍼티라는 두 디벨로퍼가 합작해 뉴욕시와 함께 현대적인 업무 공간과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공원, 문화 공간과 호텔을 조성했다. 21세기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도시개발 사례로 꼽힌다.

인간이 도시를 만들면서 문명은 시작됐다. 수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부터 지금의 뉴욕과 런던, 서울까지 도시의 본질적인 목적은 항상 똑같았다. 사람들이 먹고, 놀고, 자고, 쉬면서 일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인류는 동굴을 나와 집을 짓고, 건물을 세우고, 도로를 놓았다. 도시와 인간은 함께 성장했다. 좋은 도시에는 유능한 사람들이 모였고, 더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도시는 발전하고 이를 위한 투자와 개발이 동반됐다.

지금도 더 나은 도시 공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미 개발할 땅이나 공간 수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곳도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세계 각국 도시들은 더 나은 환경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때 부동산 디벨로퍼들은 비전을 제시하고, 청사진을 현실로 구현하며 큰 역할을 담당한다. 앞서 언급한 모리빌딩컴퍼니나 릴레이티드, 옥스퍼드프로퍼티가 대표적인 사례다.

손지호 네오밸류 의장

미국이나 일본처럼 대형 개발 사업자가 없다고 여겨지는 영국에서도 디벨로퍼의 역할은 확실하다. 런던 템스강 남쪽에 있는 배터시 화력발전소는 1930년대에 완공돼 50여 년간 운영된 이후 사실상 폐허로 방치됐다. 2010년 런던시는 지역 민간 개발 사업자와 손을 잡고 일대를 기회지역으로 지정했다. 지방자치단체는 대중교통을 확충하고 인프라스트럭처를 개선했고, 민간 기업은 창의적인 사업 기획과 투자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배터시 화력발전소 주변의 낙후됐던 복스홀과 나인엘름스는 복합문화 공간이자 상업 공간으로, 애플 런던 본사를 포함해 많은 회사가 입주하는 런던의 대표 명소로 탈바꿈했다. 허드슨 야드와 함께 2000년대 최고의 대형 개발 사례로 꼽히는 킹스크로스 프로젝트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례를 봐도 민간 디벨로퍼의 투자와 공공의 과감한 인센티브, 지역 주민들의 참여가 있어야 도시는 계속 개선될 수 있다.

해외의 유수한 개발 사례를 접할 때 만날 수 있는 단어를 두 개 꼽자면 '장기적인 시야'와 '지역 협력'이다. 런던, 도쿄, 뉴욕, 어디든 할 것 없이 도시 공간을 재구성하는 데는 이해 관계자들끼리 수없는 고민과 합작의 과정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롯폰기힐스와 아자부다이힐스는 재개발 계획이 세워지고 준공되기까지 각각 17년과 34년이 걸렸다. 각각 1987년과 2001년 시작한 킹스크로스와 허드슨 야드는 아직도 개발이 진행 중이다. 두 프로젝트는 각각 40년과 25년을 사업기간으로 잡고 있다고 한다.

살기 좋은 도시는 국가의 경쟁력과도 직결된다. 도시가 국가의 경쟁력과 미래를 좌우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고 싶고,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도시가 많아지면 해당 국가도 부유해질 수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시에는 자연스럽게 돈이 유입되고, 여러 일자리도 창출되기 때문이다. 세계 여러 국가와 도시 경영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도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다.

우리나라 도시 개발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미래까지 고려해 장기 계획을 수립한 후 도시 개발에 나서는 영국, 일본 등 선진국들과 달리 한국 도시 개발은 그렇지 못해 아쉽다. 환경이 이렇다 보니 멋진 상상력이나 기획안을 품고 장기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디벨로퍼도 뿌리내리기 어렵다. 인허가 과정에서 문제가 계속 발생하는 것처럼 개발 사업을 바라보는 관점이 지원보다는 규제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프로젝트에 되레 지원이 없다 보니 개발 사업을 오래 진행할수록 손해가 나는 구조다. 지원 없이 규제만 중첩된다면 개발 사업의 유연성은 낮아지고, 디벨로퍼는 장기적인 관점을 갖기 어렵다. '도시 공간 재창출'이라는 본질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이런 이유로 국내 도시 개발은 지금까지 단기 수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급속한 도시화라는 한국 특유의 역사적 배경도 영향을 줬다. 1970~1980년대에는 턱없이 부족한 주택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장기 계획을 만든 후 도시를 만들 상황이 아니었다. 만성적인 주택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투자금 회수와 이익 분배를 빨리하려는 목적으로 단기 분양 사업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세월이 흘러 한국은 세계 경제강국으로 성장했고, 소비자의 안목과 취향도 성숙했다. 하지만 아직 대다수 디벨로퍼는 기존 방식 그대로 사업을 추진한다. 소비자 효용이나 고객 가치, 건물과 공간의 디테일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지 않는다.

도시와 공간의 실제 주인은 사용자인데, 사용자의 입장보다 공급자(개발자)의 이익 추구를 더 우위에 놓고 공간을 설계한다. 한 가구당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에 달하는 아파트를 분양받는 과정에서 고객에게 며칠 동안 모델하우스와 카탈로그만 보여준 채 돈을 미리 내라고 요구(선분양)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척박한 국내 환경에서도 의미 있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광교와 인천에 선보인 앨리웨이는 '문화가 있는 살기 좋은 동네'를 표방했다. 개발 회사가 아파트 입주민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대규모 상가를 분양하지 않고 직접 보유하고 운영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덕분에 입주민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모여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즐기는 커뮤니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넓은 광장에서는 아이들이 뛰놀고, 동네 책방과 개성 있는 주인이 있는 가게들이 골목마다 들어서 있다. 집 앞에서 세계적인 예술 작품을 경험할 수 있고, 이웃 주민들과 함께 김치와 고추장을 담가 나누어 먹는다. 삭막한 신도시에 풍성한 라이프 스타일과 이웃 공동체가 생겼다.

누디트는 서울 내 구도심의 문화가 담긴 커뮤니티 장소다. 서교동에 있는 '누디트 홍대'에서는 홍대 권역에서 거주 또는 근무하는 크리에이터들이 모여 함께 살며 일하고 문화를 즐긴다. 개성 강한 홍대의 20·30대는 공유 오피스에서 만나 일하고 교류한다. 저녁이 되면 공유 주거 공간으로 돌아가 자신의 취향이 담긴 라이프 스타일을 즐긴다.

개발 회사가 청사진을 갖고 공간 개발은 물론 공간 안에 들어가는 콘텐츠 개발·운영까지 총괄 책임을 한 덕분에 앨리웨이와 누디트는 일정 부분 성과를 냈다. 한국의 다른 개발 사업자들도 긴 안목으로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이 생겼다.

하지만 최근 이 같은 디벨로퍼들 노력은 원점으로 돌아갈 위기에 빠졌다. 장기화한 부동산 침체 속에서 매일 프로젝트파이낸싱(PF) 정책 비판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정부와 금융당국은 긴급 대책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시 발전에 꼭 필요한 사업장마저 좌초 위기에 있으며 시장은 점점 더 얼어붙고 있다.

작년 말 태영건설의 워크아웃(기업 개선 작업) 신청을 기점으로 금융당국이 부실 PF에 대한 '옥석 가리기'를 주문하면서 건설 현장의 자금줄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금융회사들이 정부 눈치를 보느라 신규 PF 대출을 거의 허용하지 않고, 기존 대출 연장도 깐깐하게 하면서 자금 조달이 막히는 사례가 이어지는 것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3월 말까지 신규 PF 대출은 8건밖에 이뤄지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경제성이 있고 미래 전망이 꽤 좋은 사업장조차 엎어질 위기에 빠진 곳이 상당수다. 디벨로퍼들 사이에서는 "과거 금융위기 때에도 매달 10건 이상은 PF 대출이 이뤄졌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상황이 안 좋다"는 얘기가 횡행한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보증이 있거나 지자체가 직접 추진하는 사업장, 국내 5대 건설사의 연대 보증이 있는 경우에만 대출이 간신히 이뤄진다고 한다.

부동산 PF 구조조정을 위한 정부 주도의 정상화 펀드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펀드는 7개월여간 단 한 건의 투자를 집행하는 데 그쳤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풍요로운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점차 사라지고 공급자 위주의 천편일률적이고 특색 없는 도시로의 몰락이 우려된다. 도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옥석 가리기를 통해 미래가치가 있는 사업장이 '돈맥경화'로 좌초되지 않게 하는 정부 정책과 근본적인 PF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도시가 풍요로워지면 우리 삶이 바뀐다. 미래 세대가 풍요로운 도시 속에서 삶의 순간들을 의미 있는 곳에 쓰고 머무르며 일상을 향유하기를 바란다. 자연과 함께 숨 쉴 수 있는 공원이 넓게 펼쳐져 있고 가족, 친구들과 추억을 쌓을 수 있는 다채로운 경험이 가득한 도시 말이다. 우리는 어떤 도시에 살고 싶은가.

[손동우 기자 정리]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