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부터 교육 이주까지, 의대 증원의 풍경

이상원 기자 2024. 5. 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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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증원 발표 이후 사교육업계는 달아올랐다. 입시 분석가들은 공포 마케팅을 지적하지만, 사교육 과열 가능성 자체는 부인하지 않는다. 의사 수가 늘어도 의대의 메리트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4월18일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한 학생이 의대 입시학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수요일 낮 3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는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거리에 사람은 많았다. 노란색 밴에 탄 초등학생부터 시내버스를 채운 고등학생까지 학생들이 계속해서 대로로 쏟아져 나왔다. 일부는 길가의 큰 학원 건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골목에 입간판을 세운 상가로 향했다. 대부분 말없이 발걸음을 재촉할 뿐 10대 학생 특유의 떠들썩한 소리를 내는 이는 드물었다. 탕후루를 먹으며 걷는 학생조차 얼굴은 굳어 있었다. ‘DFLHS’라고 적힌 체육복이 특히 많이 보였다. 올해 서울대 합격자를 전국 두 번째로 많이 배출한 한 외국어고등학교의 영어 약자다.

겉보기에 조용한 대치동은 사실 한껏 달아올라 있다. 윤석열 정부의 의과대학 증원 발표 때문이다. 대형 학원은 잇따라 “비상” “긴급” 타이틀을 붙여 입시설명회를 열었다. 정부가 ‘필수의료정책 패키지’와 정원 2000명 증가를 발표하고 여기에 반발한 의료계가 집단행동에 나선 2월에 특히 활발했다. 2월은 대학 등록과 재수학원 개강이 맞물린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의 사교육비는 계속해서 늘었고, 2023년 학생 1인당 사교육비는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사교육비 대책으로 꺼내든 ‘킬러 문항 제거’ 카드가 도리어 역효과를 불렀다는 평가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들은 의대 증원 이슈가 활황을 부채질할 것이라고 본다. 의대 재도전을 노리는 최상위권 이과대학 재학생만이 이들의 고객은 아니다. 1980년대생 직장인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까지, 학원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지금도 많으며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다.

올해 입시설명회의 주요 대상은 최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친 대학 재학생이었다. 최근 입시에서 의대는 합격 점수가 가장 높다. 사교육업체들은 점수가 모자라 의대에 가지 못한 최상위권 이공계 재학생들에게 “문이 넓어졌으니 수능에 재응시(‘N수’)하라”고 설득한다. N수생의 증가는 사교육업계의 호재다. 최상위권 대학 진학을 지망하는 학생 대부분이 사교육 도움을 받는다. 이공계 대학생에게 의대 재도전은 충분히 해볼 법한 선택이다. 정부가 발표한 증원 규모 2000명은 서울대 이공계열 전체(1775명)보다 많다. 2000명이 늘면 전국 의대 정원은 5058명이 되는데,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 이공계열 정원 총합(4882명)보다 많아진다. 입시 전문가들은 이공계 대학생뿐만 아니라 약대, 치대, 한의대생 등이 의대 지원을 위해 수능을 새로 치고, 내년 입시를 통해 대거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N수생 외 새로운 고객 생겨나다

N수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증원 이전에도 이미 의대 정시모집 합격자 절반 이상은 N수생들이 채우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 지원자 외에 사교육이 눈독 들이는 새로운 고객이 보인다. 특히 주목받는 현상은 ‘직장인 의대반’이다. 의대 증원 발표로 직장인의 관심이 늘면서 야간·주말 시간대에 강의를 개설하는 학원이 늘고 있다. 온라인 강의로 이름난 대형 사교육업체 메가스터디가 올해 처음으로 직장인반을 개설했다. 이 밖에도 직장인반 개설 예정이거나, 정부의 확정 발표를 기다리며 개설을 준비 중인 업체가 적지 않다.

몇 년 전 대치동에서 개업한 한 입시 전문학원은 지난해 중반께 일찌감치 야간·주말반을 만들었다. 의대 입시생이 주고객으로, 의예과 출신 조교진을 두고 있다. 이 학원 관계자는 “사실 직장인반도 배우는 내용은 같으니, 학원 입장에서는 품이 많이 들지도 않는다”라고 말했다. 수강을 문의하는 사람 중에는 수학·과학 학원 강사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평범한 직장인이고, 문과 출신도 있다. 수능을 친 지 꽤 된 분도 연락이 온다”라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정부 발표 후 직장인을 현혹하는 사교육’이라는 인상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정원이 늘었다고 의대가 가기 쉬운 곳은 아니다. 학원에 왔다가 하루이틀 만에 도망가는 분도 있다. 수강에 성적 제한을 두지는 않지만, 이전 수험 성적이나 면접으로 미리 의지를 확인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그는 “사교육에서 학습 효율을 극대화하면 6개월 정도에 공교육 수능 수학을 돌파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수능을 친 지 오래된 문과생들은 주로 한의대를 목표로 삼는다고 말했다.

직장인 의대반보다 더 삼엄한 현장은 초등학생 대상 의대반이다. 대치동의 초등 의대 전문 A 학원에 가서 학부모라고 밝히고 직접 수강 상담을 했다. ‘늦지 않았다’는 직장인 의대반 학원의 모토와는 정반대되는 말을 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생 아이가 학과 외 선행학습을 한 적 없다고 하자 실장은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믿기 어려운지 ‘창의 수학도 한 적이 없느냐’ ‘2학년 2학기 심화 과정도 배운 적 없느냐’고 재차 물어왔다.

아무 경험이 없다고 하자 그는 “부모님께서 (아이의 의대 진학에) 뜻이 있고 아이가 욕망이 있다면 사실 좀 많이 늦었다. 지금 상태로는 ‘의대를 준비하세요’라고 말씀드리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이 학원 의대반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갈 수 있는데, 시험을 치고 들어가는 ‘정규 과정’과 맞춤형 진도 과정으로 나뉜다. 실장은 기자에게 맞춤형 진도 과정과 창의 수학 두 개를 권했다. 수업당 한 타임(3시간)에 6만원으로 주 2회씩 수강하면 다 합쳐 월 100만원 이상 든다. 그는 몇 주 뒤 학원에서 의대 설명회가 열린다고 말했다. 수험생이나 학부모 전체가 아니라, ‘초등학생 학부모’만 대상으로 하는 의대 설명회였다.

또 다른 의대 전문 B 수학학원도 가격은 같았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이 학원은 초등학생부터 재수생까지 다양한 수강생을 받아 “과외 형식으로” 가르친다. 기자가 찾은 낮 시간대에는 초등학생이 많았다. 작고 마른 남자아이 하나를 앉혀놓고 원장은 일대일로 수학 문제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아이가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간 초등학교 2학년생인데 이미 중학교 과정까지 다 뗐다”라고 원장은 말했다.

3월31일 한 대형 학원의 의대 증원 관련 입시설명회에서 참석자들이 발표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이 학원은 사실상 연령에 따른 반 구분이 따로 없다. 초등학생이라도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치면 고1 모의고사 문제를 풀게 한다. 대입 준비가 너무 이른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부모들은 ‘1년만 일찍 시작할걸’ 하며 한탄한다. 이게 미친 짓이라면 왜 저 작은 애들을 계속 학원에 보내겠나?”라고 반문했다. 원장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와중에도 강의실의 아이들은 문제집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정부는 놀랄 만큼 별다른 대책이 없다. 2월22일 교육부와 서울시교육청이 강남구 학원가 합동 점검을 실시했는데, 교습비 과다 징수 여부가 주된 내용이었다. 선행학습 유발 광고에 대해서도 특별 점검하겠다고 밝혔으나 실제 입학 상담 과정에서 대부분 학원 관계자들은 “중학교(또는 고등학교) 과정을 미리 떼놔야 한다”라고 입을 모았다. 학원가에서는 의대 증원 발표 후 사교육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부는 의대 증원이야말로 근본적 사교육 억제책이라고 믿는 듯하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2월13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의대 과열은) 의사 수를 늘리는 게 해결책이다. (중략) 지금까진 공급부족 문제가 너무 크니까 (금전 보상이) 의사에게 쏠렸다. 앞으론 학부모, 학생도 진로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 의대 문이 넓어졌다고 의대에 가려는 건 신중하지 못한 선택이며, 의사 수가 늘면 벌이가 줄기 때문에 의대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부총리는 “합리적으로 의대 열풍이 가라앉는 게 맞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교육업계가 여기에 맞서는 논리도 헐겁지만은 않다.

‘의사가 늘면 의대의 인기가 줄어든다’는 주장에 대해 사교육업계는 ‘의대가 아니면 어디로 가는가?’라고 되묻는다. A 학원 실장은 “자녀들이 이공계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의대에 가라고 더 ‘푸시(압박)’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라고 말했다. 자신은 60대인데 “50대만 돼도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지속하기에) 좀 불안정한 면이 있다”라는 것이다. A 학원에 일찌감치 등록하려는 학부모들 역시 ‘라이선스(자격증)가 없으면 힘들다’는 자신의 경험 탓에 자녀를 의대에 보내려 한다고 말했다. B 학원 원장은 정부 정책을 보면 앞으로도 지원자가 의대에 쏠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공계에 투자하고 과학자들을 제대로 대접해주면 나라가 산다. 우리나라는 각자도생밖에 없으니 갈 곳이 의대밖에 없고 난리가 나는 거다. 지금 SKY 이공계 학생들이 괜히 입학 등록을 안 하는 게 아니다.”

한 입시 전문가는 “지금 의대는 사실상 사교육의 뇌관이다. 킬러 문항보다 훨씬 큰 이슈인데 정부가 의대 증원을 사교육 정책의 시각에서 보질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사교육 시장은 의대 지원자 또는 메디컬(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 지원자 위주로 개편된 지 오래다.

메디컬은 예전 ‘SKY’가 누리던 최상위권 대학의 자리를 대체했을 뿐만 아니라, 사교육 수요자 간에 일종의 양극화를 낳았다. 이들 대학에 합격하는 순간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보상과 안정성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성적이 좋은 ‘메디컬 지원군’은 사교육을 비롯한 각종 투자를 아끼지 않고, 여기에 미칠 수 없는 이들은 일찌감치 투자를 줄인다. 2022년 메가스터디 창업자인 손주은 회장은 이런 맥락에서 “한국적 사교육은 10년 안에 사라질 것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시사IN〉 제770호 ‘사교육의 괴수가 사교육 붕괴를 말하다’ 기사 참조).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4월5일 충남대 보운캠퍼스에서 의대 교수와 학생들의 항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학원가 공포 마케팅 빛 발할 것”

의대 증원은 이 물줄기를 뒤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입시 업계에 오래 몸담은 이들은 “요즘에는 성적이 되는데 적성이 안 맞아서 의대를 안 가려는 학생을 찾아보기 어렵다”라고 입을 모은다. 2000명은 많은 수이지만, 여전히 의대 입학 수요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문이 넓어지는 만큼 경쟁에 뛰어들어 사교육 투자를 늘릴 이들도 더 많아진다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20년 이상 대입 상담을 해온 하귀성 비전과멘토 대표는 “대치동에 불안감을 조장하는 업체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나는 의대 조기 준비가 효과적이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공포 마케팅이 학원가의 오래된 전략이라고 그는 말했다. “대치동이나 서초동, 목동의 학원 설명회를 갔다 오면 학부모들이 불안하다고 말한다. ‘우리 아이만 뒤처진 것 같고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다’는 말을 한다. 몇몇 업체가 영업이익을 위해 지나치게 공포 마케팅을 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어릴 때 선행학습을 해야 수능을 잘 본다’ ‘대치동 사교육을 받아야 의대에 갈 수 있다’는 등의 상업적 변설이 사실인지와 별개로, 의대 증원으로 사교육이 과열될 가능성은 높다고 말했다. 증원으로 의대 지원층이 늘어날 것은 확실하고, 이 경쟁에서 앞서가기 위해 학생과 학부모가 먼저 사교육을 찾는다는 것이다. 하 대표는 초등 의대반을 개설한 학원 중 몇몇은 중·고등부 입시학원이 확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조기 의대 교육 학원들은 ‘의대는 수학이 중요하니 수학을 일찍 선행학습해야 한다. 중학교 과정에서 영어는 전부 끝내고, 이후 내신을 잘 챙겨 수시로 가야 한다’는 논리를 세웠다는 게 하귀성 대표의 말이다. “사교육은 선행학습 수요를 따라가고 선행학습 수요의 계기는 정책이다. 학원은 콘텐츠가 있다. 정책이 생겨 수요가 늘면 7세 미취학 아동부터 영재교육, ‘사고력 수학’ 교육을 시킬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사교육비 증가를 넘어 ‘교육 이주’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부의 의대 지역인재 선발 전형 확대 권고 때문이다. 지역인재 선발 전형은 대학 소재지 출신 수험생만 지원할 수 있는 모집 전형이다. 비수도권 의대 지역인재 선발 비중을 정원의 60% 이상으로 높이라는 게 정부 권고다. 2028학년도 대입부터는 중·고등학교 6년을 지역에서 살아야 한다. 3월31일 종로학원 설문조사에 따르면, 학부모 1446명 중 75%가 ‘의대 입학을 위한 지방 유학’에 대해 긍정적 입장이었다. 충청권이 특히 선호 지역으로 꼽혔다.

하귀성 대표가 초등학생 학부모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도 이 대목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단 지켜봐야 한다, 강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답한다고 했다. “3월 정도면 증원에 대한 확정적 발표가 나왔어야 하는데, 아직도 불확실한 요소가 많다고 본다. 학부모들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주를 고민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N수생들의 불만도 높다.”

만약 대규모 증원과 지역인재 선발 비중이 60% 이상으로 확대된다면? 혹시 의대 사교육업체들의 마케팅이 약화되고, 더 나아가 학원가 근처 부동산 가격에도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여기에도 대치동은 나름의 답변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방으로 가실 수도 있다. 그런데 가시면 내신 성적 톱(수위권) 찍으셔야 한다. 세종 같은 웬만한 중소도시 학교는 쉽지 않다. 전국에서 한 학교 1등씩만 뽑아도 (수시 의대) 정원 다 맞춰진다(A 학원 원장).” “아이가 환경에 영향을 덜 받는다면 지방에 가는 게 유리할 수 있다. 그런데 주변 아이들이 다 놀면 내 아이도 놀 수 있다. 지방은 학교 분위기가 (8학군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B 학원 원장)."

데드라인은 머지 않았다. 4년제 대학 협의체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대학입학전형기본사항’에 따르면, 의대 정원 조정 기한은 올해 5월 말까지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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