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인 척 돈 받고 "나도 속았다"…보이스피싱 수거책 잇단 '무죄' 왜?

류원혜 기자 2024. 5. 1.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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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임종철 디자이너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조직의 지시에 따라 '현금 수거책' 역할을 했던 이들이 잇따라 무죄 판결을 받고 있다.

법원은 피고인들이 보이스피싱 범죄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몰랐다고 하면 무죄냐"며 엄중한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보이스피싱은 유기적으로 발생하는 범죄이므로 피해 방지를 위해서는 현금 수거책도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수거책들이 단순 회사 업무로 오인하고 범죄에 가담하는 만큼 기업에서 취업 공고를 낼 때 관련 내용을 명시하도록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금 수거책' 대학생, 무죄…"사회 경험 없어서"
최근 광주지법 제2형사부(재판장 김영아)는 사기 방조 혐의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대학생 A씨(24·여)에 대한 검사 항소를 기각했다. 그는 2021년 10월 피해자로부터 2438만원을 받은 뒤 보이스피싱 조직에 무통장 입금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어머니 생일 선물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한 것으로 조사됐다. 범죄 조직은 A씨에게 'VIP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환전 업무'라고 속이며 아르바이트시켰다.

1심은 A씨에게 범죄 인식과 의사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수사기관에서야 자신이 현금 수거책이었다는 걸 인지했고, 곧바로 피해자에게 자신이 취득했던 30만원보다 훨씬 많은 800만원을 지급해 합의했다"고 밝혔다.

판결에 불복한 검사는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입금하다 ATM 기계가 고장 나자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등 자신의 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다"며 "피고인은 당시 만 20세로, 사회생활 경험이 없는 대학생이었다. 범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시에 따랐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시했다.
"나도 속았다" 줄줄이 '무죄'…"단순 회사 업무인 줄"
기업 채용을 가장한 보이스피싱 조직의 구인 광고에 속았다고 했던 B씨(29·여)도 최근 무죄를 선고받았다. B씨는 구인·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넣어 문제의 업체에 입사했다. 면접을 보거나 직원을 만나지도 않았고, 텔레그램으로만 업무 지시를 받았다.

B씨는 피해자들로부터 현금을 받으면 1건당 20만~30만원을 떼고, 나머지는 업체가 알려준 계좌로 100만원씩 쪼개 무통장 입금했다. 그는 "가구 자재를 납품하는 회사인 줄 알았다"며 자재 대금을 송금하는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B씨가 근무량에 비해 보수를 많이 받은 점 등을 고려해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 7명 중 4명은 무죄, 3명은 유죄 평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행을 예측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은 들지만, 검찰이 제시한 증거만으로 범죄가 증명됐다고 보기 힘들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현금 수거책이었던 외국인 C씨(30)도 지난달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다. 1심 재판부는 C씨가 범죄를 인식했다고 보고 징역 2년을 선고했다. C씨는 "나도 속았다"며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국내에서 생활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범죄에 대한 인식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다.

보이스피싱 범죄에 가담한 D씨(50·남)도 지난 1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D씨는 '저금리 대환 대출' 수법에 속은 피해자에게 은행원인 척하며 돈을 건네받았다.

그러나 1심과 2심 재판부는 '부실 채권을 추심하는 일인 줄 알았다'는 D씨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D씨가 △피해자에게 실명을 말한 점 △범행 다음 날 친동생으로부터 '보이스피싱 범죄'라는 말을 듣고 자수한 점 △범행 지시를 경찰에 알려 추가 피해를 방지한 점 등도 무죄 근거가 됐다.

현금 수거책이었던 프랑스 남성 E씨도 지난해 12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텔레그램으로 조직원 지시를 받았고, 피해자들이 특정 장소에 둔 9900여만원을 수거해 전달했다. E씨는 법정에서 "SNS 구직 광고를 보고 가구 업체에 취업했다"며 지방 고객으로부터 대금과 보증금을 받아 서울 도매상에게 전달하는 일인 줄 알았다고 주장했다.
"수거책, 범죄 인식했을 것"…무죄 선고 이유는
/사진=임종철 디자이너
장두식 변호사(법무법인 정향)는 보이스피싱 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현금 수거책도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변호사는 "최소 2~3회 전달 행위에 가담한 경우 성인이라면 자신의 행위가 사기 방조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며 "보이스피싱은 총책과 중간 연락책, 전달책이 유기적으로 행동하면서 발생하는 범죄다. (현금 수거책도)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달받은 금액을 총책 지시에 따라 제3자 명의 계좌로 나눠 보내는 일까지 했음에도 '범죄 연루 사실을 인식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면서 무죄를 선고한 판단이 확정된 걸 보면 피해 회복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최충만 변호사(법률사무소 충만)는 보이스피싱 범죄 수법이 진화해 같은 조직원인 현금 수거책도 범죄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며 "우리 형법은 고의 없는 금융 범죄를 처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수거책들이 정상적인 회사 업무나 거래로 착오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되면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며 "그래서 보이스피싱 조직들이 이런 상황을 악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 변호사는 "보이스피싱 범죄를 실효성 있게 막을 대책은 없다. 홍보와 교육을 통해서도 사실상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도 "기업에서 취업 공고를 낼 때 '현금 수거책 업무 등을 맡기지 않는다'는 내용을 명시하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방법이 있다"고 조언했다.

※보이스피싱 사기, 예방만이 최선! 늘 의심하고, 꼭 전화 끊고, 또 확인하고! 보이스피싱 피해를 봤다면 경찰청(112), 금감원(1332), 금융회사(콜센터)에 피해 신고와 지급정지를 요청할 수 있다.

보이스피싱 대처 요령 사이트./사진=이학렬


류원혜 기자 hoopooh1@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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