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아름다운 연주자

권애숙 시인 2024. 5. 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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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애숙 시인

니, ‘우정’하고 ‘허공’ 아나? 친구의 느닷없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게 뭔데, 무슨 이름이가? 으, 하모니카 교실에서 배우는 곡인데 노래를 모르니까 악보 보고 불기가 쉽지 않네. 친구의 푸념에 곧바로 검색을 했더니 들어봤거나 불러본 노래더군요. 녹음을 해서 보내주었습니다. 이참에 같이 하모니카를 배우자는 말에 잠깐 솔깃했지만 악기를 다루는 것은 전병이라 그냥 혼자 즐기는 게 낫겠다 싶어 가방 속에 넣어 둔 묵은 하모니카를 꺼내 닦았습니다.

악기를 배울 기회도 여유도 없었지만 어쩌다 연이 닿았을 때조차 도중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하모니카는 휴대하기 쉽다는 이유로 가방 한 쪽에 끼워 다닌 지 수십 년째. 하지만 여전히 제대로 불 줄은 모릅니다. 어쩌면 내심 이 상태를 벗어나고 싶지 않은 지도 모르겠어요. 옛 기억을 더듬듯 혼자서 음을 찾아 불다 보면 가끔 애틋한 소리가 흐르기도 하니 그럼 된 거지요. 그리움이 묻어있는 것들은 그 자체로 완성이 아니겠는지요.

중학생이 되고 첫 소풍날이었어요. 읍내 앞 큰 냇가에 소풍 가방을 풀어놓고 노래 한 곡 불러 달라 선생님을 졸랐지요. 새댁인 선생님은 자신의 중학생 시절 담임선생님이 흰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불러주던 노래를 잊을 수 없다며 모래 둔덕에 올라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냇물 소리를 따라 그윽하게 흐르던 ‘메기의 추억’은 그렇게 내게 와 닿았지요. 선생님과 선생님의 선생님까지 그립게 만든 그 노래는 여직 살아 나를 깨우고 흔듭니다.

요즘은 내 어여쁜 손녀를 위해 노래를 부릅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곁에서 자주 돌보아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고 아쉬워 만날 때마다 노래를 불러줍니다. ‘메기의 추억’이지요. 속 모르는 아들은 왜 늘 같은 노래만 부르느냐고 하지만 우선은 내 목소리를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속셈이 더 있다면 먼 훗날에도 이 노래로 나를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지요. 낯을 가리기 시작한 손녀가 오랜만에 보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도 ‘옛날에 금잔디’ 하면 안심한 얼굴로 안깁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데는 아주 소소한 것이 열쇠가 되기도 하지요. 사람에 따라 기억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내 경우 대부분의 기억을 소리로 소환합니다.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하나 목소리를 들으면 대개는 그들을 기억해 냅니다. 소리에도 지문처럼 성문이 있어 사람마다 고유의 형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득하게 먼 옛날에 듣던 목소리가 기억 속 선명한 무늬를 들추며 수십 년 저쪽 이쪽을 연결시켜주나 봅니다.

나는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시각적인 세계보다 청각적인 세계는 훨씬 더 깊고 넓지요. 소리가 주는 매력에 끌려 고요하게 눈을 감고 상상 그 깊은 속으로 빠져들다 보면 생각지 못한 것들에까지 가 닿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설렘과 기쁨이 크지요. 더러 소음이나 소란이 뒤흔들어놓을 때도 있지만 그 따가운 소리의 뒤편까지 더듬어 들어가다 보면 또 다른 소리의 진원을 만나 귀를 틔울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누가 책을 보내주면 작품 중 일부를 발췌해 읽어 음성메일로 답장을 보냅니다. 투박한 사투리 발음에 매끄럽지 못한 낭독이지만 문자메시지나 전화 한 통으로 마음을 전할 때보다 진심이 더 진하게 가닿는 것 같습니다. 소리 내어 읽는 동안 내 떨림이 작품 속으로 스며들어 작가에게 그대로 전해질 수도 있겠지요. 그 작품을 쓸 때의 기억을 새삼 떠올리게 하여 감동의 시간을 갖게 하고픈 독자로서의 의도된 마음이기도 합니다.


변덕스런 시절을 건너오며 닫혔던 것들이 너나없이 문을 열고 생명의 색깔과 소리를 쏟아냅니다. 꽃들이 피고 지는 소리, 비오고 멎는 소리, 새 울고 바람 부는 소리. 그 속을 비집고 드는 소음마저 맑게 정화되는 철입니다. 어느 쪽도 무늬가 깊습니다. 이런 날은 세상의 파동에 몸을 실어 그 울림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어요. 아침의 숲길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세상의 모든 소리와 하모니를 이루고 있나요? 당신은 이미 아름다운 연주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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