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어설 용기 얻는다” 인문학이 희망의 씨앗으로

박진성 기자 2024. 5. 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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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희망의 인문학’ 입학식… 취약계층 1000명, 꿈을 품고 들어와

지난 2016년 한모(52)씨는 소주병을 손에 들고 서울 송파구 천호대교 난간에 올라섰다. 식당 사업이 망한 뒤 서울역 주변에서 노숙 생활을 하다가 “이대로 살아서 뭐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던 한씨는 극단적인 선택 직전에 경찰과 소방의 도움을 받아 구조됐다. 이후 한씨는 노숙인 지원 센터와 거리를 오가며 지냈다. 그러던 중 지난해 6월 지원 센터 직원의 권유로 우연히 ‘인문학 수업’을 듣게 됐다. 서울시가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가출했거나 고아원 생활을 못 이겨 뛰쳐나온 노숙인 등을 대상으로 열고 있는 ‘희망의 인문학’ 강의였다. 한씨는 “신세 한탄만 하는 과거는 잊고 다시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며 “이제는 인문학 책을 읽는 게 취미가 됐고, 인문학 강의 때 보조 강사 역할도 맡고 있다”고 말했다.

30일 서울 동작구 숭실대학교에서 열린 '2024년 희망의 인문학' 입학식에서 오세훈(왼쪽에서 여섯째) 서울시장이 숭실대 관계자, 입학생들과 함께 '인문학과 동행, 나를 바꾸는 힘'이라는 피켓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올해 총 1000명의 노숙인 등 취약 계층이 인문학 수업을 듣게 된다. /서울시

30일 오전 서울 동작구 숭실대 벤처중소기업센터에서 ‘2024년 희망의 인문학’ 입학식이 열렸다. 올해 입학생은 총 1000명. 6~9월까지 주 1~2회, 하루 3~4시간씩 강의를 듣고, 학생 식당에서 서울시가 마련한 무료 식사도 할 수 있다. 강의는 숭실대를 비롯해 서울시립대, 노숙인 지원 시설 등에서 돌아가며 진행하고, 강의 주제는 역사와 문학, 철학, 가족, 사랑, 체육 등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 특히 올해는 수업이 끝난 뒤 바리스타나 호텔 청소 등의 일자리를 가질 기회도 제공한다.

서울시가 운영하고 있는 ‘희망의 인문학’ 강의는 2008년 “삶이 힘겨워 자립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인문학이 희망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오세훈 시장의 아이디어로 시작됐다. 박원순 전 시장 재직 기간 중단됐다가 오 시장이 다시 시장이 되면서 2022년 재개됐다. 지금까지 5000여 명이 이 수업을 수료했다. 오 시장은 “삶을 포기하다시피했던 취약 계층이 다시 일자리를 찾고 노숙 생활을 정리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서울 종로구 한 노숙인 지원 시설에서 노숙인들이 캘리그래피 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 /서울시

고모(49)씨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가출하는 바람에 다섯 살 때부터 고아원에서 지냈다. 오빠도 고아원에서 도망치고, 함께 퇴소한 언니와는 헤어져 생사도 모르고 지낸다. 두 차례 결혼 실패와 가정 폭력으로 결국 세 살배기 아들과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노숙인 시설과 길거리를 전전했다. 그러나 지난 2022년 서울시립대에서 희망의 인문학 수업을 듣고서 새로운 꿈이 생겼다. 고씨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사를 들으며 나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며 “방 두 개가 있는 집에서 아들과 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 강의도 신청해 경제 교육 특강을 들었고, 얼마 전부터는 은행 적금도 들었다.

40대 A씨는 스무 살 때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계모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고시원에 머물며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갔지면 외톨이인 그에게는 모두가 경계 대상이었다. A씨는 신경안정제가 없으면 일상생활이 안 될 정도로 예민하고 불안해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도 “네, 아니요” 정도의 단답밖에 못 할 정도였다. 그에게 인문학 수업은 마흔이 훌쩍 넘어 대인 관계를 배우는 첫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수업 시간이면 손을 들고 스스로 발표를 할 정도가 됐다. 친구들을 만나면 웃으면서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도 한다. 최근에는 거동이 어려운 시설 친구의 팔짱을 끼고 병원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그는 “인문학 수업을 듣고 내 삶을 기록하는 에세이도 써봤다”며 “자존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아가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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