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끝없이 연결된 세상… 세상엔 홀로 고립

김용출 2024. 4. 30.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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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다섯 번째 시집 펴낸 박연준 작가
현대사회 스마트 기기 역설 담은
시편 ‘혼자와 세계’ 등 58편 엮어
작은 인간·작은 것에 대해 천착
시집 제목으로 ‘작은 인간’ 고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쓸 것

세상이 피로해졌다. 혼자 있어도 스마트폰만 열면 인스타그램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포털을 통해 세계 어디로든 연결이 된다. 지나치게 세상과 연결이 된다. 도무지 혼자가 될 수 없다. 삶의 피로는 점점 심해갔다.

어느 날 스마트폰 사용을 전격 중단했다. 처음에는 금단 증상이 나타났다. 자꾸 스마트폰에 눈길이 간다거나 뭔가 조금만 궁금해도 스마트폰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점점 생각이 많아지더니, 어느 순간 무엇인가를 공책에 끄적이는 자신이 보였다. 한 달 정도 지나자 시가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를 막 쓰고 싶었다.

시는 물론 소설의 세계까지 활발히 오고 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박연준 작가가 다섯 번째 신작 시집을 펴냈다. 박 시인은 “제 삶이 꾸준히 달라지고 있기 때문에 시도 달라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작가 제공
팬데믹이 시작되기 직전인 2018년, 시인 박연준은 스마트폰 사용을 중단한 뒤에 절감할 수 있었다. 디지털 기기가 많은 편리함을 주지만 사람을 바보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시와 디지털 기기가 서로 맞지 않다는 것을. 비록 일 년 반 만에 다시 스마트폰의 세계로 돌아왔지만, 디지털 기기로 인해 개인이 완전한 고독 속에 있는 건 극기에 가깝다는 것을.

“한두 해만의 느낌이 아닙니다. 최근에는 챗GPT까지 나와서 귀찮고 어려운 일을 대신하기도 하지요. 사람들이 어렵고 불편한 일을 직접 해봐야 똑똑해질 텐데, 이러다가 점점 무지해지고 무능력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구나 책도 잘 읽지 않으니까 어떤 위기감을 느끼게 된 거죠.”

어느 순간 현대인들의 죽음이라는 것도 그냥 브라운관이 꺼지듯 끊기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됐다. 시가 그에게 들어왔다. 한 해 전 그는 시를 썼다.

“…혼자는 스스로를 사육한다/ 혼자는 지구를 굴린다/ 지구보다 더 큰 원이 된다/ 혼자는 파트너를 만들어 사용한다/ 닫힌 시공간을 항해하며/ 다른 혼자들을 구경한다// 혼자는 아주 작고/ 혼자는 전부다/ 혼자는 외로운 순간에도 바쁘다// 어느 날 혼자는 브라운관이 꺼지듯/ 끊긴다”(‘혼자와 세계’ 부분)

시는 물론 소설의 세계까지 오고 가며 독자들을 활발히 만나고 있는 박연준 작가가 현대사회 스마트 기기의 역설과 부조리를 묘파한 ‘혼자와 세계’를 비롯해 58편의 시편을 엮은 신작 시집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문학동네)을 들고 돌아왔다. 소시집 ‘밤, 비, 뱀’ 이후 5년 만이자 그의 다섯 번째 신작 시집이다.

이번 시집은 무엇보다 작은 존재에 집중한 시선이 인상적이다. 작게 말하면 작은 인간이 되고(‘작은 인간’), 작은 것에 집중할수록 구별이 무색해지며(‘구원’), 작은 죽음을 아파할 줄 알고(‘작은 돼지가 달구지를 타고 갈 때’), 작은 세계에 복무하겠다(‘유월 정원’)고 노래한다. 작은 것은 사소한 것이 아닌 오히려 본질에 가까운 것이고, 미시적 세계를 잘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바로 시의 일이라고 역설한다.

등단 20주년을 맞는 박연준 작가가 바라본 작고 미시적인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박 시인을 최근 이메일과 전화통화로 만났다.

―시편 ‘혼자와 세계’는 현대사회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인데.

“디지털과 스마트폰, SNS 과잉으로 도저히 ‘혼자’가 될 수 없는 인간의 슬픔에 대해 쓴 시다. 필요해 사용하지만 절망적이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혼자 있어도 SNS를 통해 끊임없이 세계와 연결된다. 지나친 연결이 우리를 단절시킨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를 3년 동안 보지 못해도 SNS를 통해 친구가 올려둔 삶을 ‘구경’했기에 늘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건 편집된 삶이기 때문에 진짜 친구의 삶이 아니다. 우린 혼자이지만 혼자가 못 되고,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계속 단절돼 있다.”

시편 ‘작은 인간’은 이번 시집에 특징적인 작은 세계 또는 작은 존재에 대한 사유가 도드라진 작품이다. 시의 노래를 따라서 작은 존재를 찾아가다 보면 어느새 전 우주가 눈앞에.

“작게 말하면 작은 인간이 된다// 작은 인간은 작은 상자/ 사적인 영역/ 항아리 요강 무릎담요 속 캄캄한 전진/ 아스팔트 위가 아니라 아스팔트 아래/ 회전문을 밀치고 밀치다, 되돌아오기/ 돌고 돌아 소용돌이 속 정적 되기/ 먼지들의 집/ 빗자루 되기// 작은 인간은 작은 우주를 들고 나간다// 사소한 걸 이야기하면 사소해진다/ 공책을 펼치면 거기/ 작은 인간을 위한 광장/ 납작하게,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는/ 이름들/ 사소한 명단이 걸어다닌다/ 작은 이름표를 달고 작게 작게”(‘작은 인간’ 부문)

―왜 작은 인간인가.

“시집의 제목을 ‘작은 인간’이라고 지을까 고민했을 정도로 ‘작은 인간’ ‘작은 것’에 천착했다. 어느 날 이 문장이 떠올랐다. ‘작게 말하면 작은 인간이 된다.’ 이 문장엔 미시적인 것부터 거시적인 것까지, 미물부터 인간까지, 동물부터 비동물까지, 나부터 우리까지…, 많은 것이 문제적으로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 저는 문학이 ‘작은 존재’를 공들여 들여다보는 일에서 시작해, 먼 곳으로 나아가는 일이라고 믿는다. 작은 존재를 오래 바라보고, 집요하게 풀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번 시집에도 사랑의 시선은 여전하다. 시집 표제가 담긴 시편 ‘불사조’에는 첫사랑의 상처성과 함께, 그럼에도 다시 몰입하게 하는 사랑의 불가항력이 놀라울 정도로 경쾌하게 그려져 있다.

“당신에게 부딪혀 이마가 깨져도 되나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날았고/ 이마가 깨졌다// 이마 사이로, 냇물이 흘렀다// 졸졸졸/ 소리에 맞춰 웃었다// 이곳에서는 깨진 것들을 사랑의 얼굴이라 부른다/ 깨지면서 태어나 휘발되는 것/ 부화를 증오하는 것/ 날아가는 속도로 죽는 것/ 누군가 숲으로 간다//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며칠째 미동도 않잖아.’// 내가 말하자 날아가는 조약돌// 돌아와서는/ 아직이요―, 한다// 아직?// 아직”(‘불사조’ 부문)

―어떤 사랑을 노래한 것 같은데.

“한 5년 전쯤 첫사랑에 대한 시를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시다. 첫사랑은 기억 속에서 죽여도, 자꾸 살아난다. 사랑하지만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쓰기 시작했다. 사랑의 불가항력적인 속성에 대해 쓰고 나서 마지막에 불사조란 제목을 붙이니 괜찮았다.”

1980년 서울에서 나고 자란 박연준은 2004년 시 ‘얼음을 주세요’가 중앙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이후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 장편소설 ‘여름과 루비’ 등을 발표했다.

―시인, 소설가 등 작가로서의 포부나, 희망 또는 비전은.

“쓰나마나한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지만 늘 존재하는 것에 대해 쓰게 될 것 같다. 스스로를 믿으면서(어려운 일이다!), 꾸준히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

젊은 시절에는 새벽까지 자주 깨어 있곤 했지만, 지금은 졸려서 그렇게 오래 깨어 있지 못한다고. 자정쯤 눈을 감고 오전 7시 반 정도에 일어난다고. 아침형 인간도 저녁형 인간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고. 취미로 발레를 하고, 요즘엔 목과 어깨가 아파서 필라테스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메일과 마찬가지로, 휴대폰을 통해 들려오는 시인 박연준의 이야기 역시 분명했다. 중요한 것은 매일 쓰는 것보다도 ‘쓰는 상태의 몸과 마음’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방법이 뚜렷이 있는 건 아니지만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이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어떤 열정으로. 작고 사소한 존재에 복무하기 위해.

“결혼이란/ 오른쪽으로 행복한 사람과 왼쪽으로 불행한 사람이/ 한집에서 시간을 분갈이하는 일,/ 뒤척이는 화분에 물을 주기로 한다/ 진딧물도 살려주기로 한다/ 영혼을 낮은 언덕에 심고/ 이제부터// 작은 것에만 복무하기로 한다”(‘유월 정원’ 부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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