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외길 50년…김창열 화백의 처절했던 조형 실험

송경은 기자(kyungeun@mk.co.kr) 2024. 4. 30. 18:51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백의 작고 3주기 회고전 '영롱함을 넘어서'가 6월 9일까지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김창열 화백의 작업 궤적을 총망라한 것으로, 1970년대 초반 작가의 초기 물방울 작품부터 2010년대 후반 작품까지 폭 넓게 아우른다.

갤러리현대는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김창열 화백 초대전을 개최하면서 작가의 물방울 작품을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한 이래 지난 2020년까지 총 14회의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창열 작고 3주기 회고전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미공개 희귀작 대거 선봬
김창열 ‘회귀 S.H. 9016’(캔버스에 한지·먹·아크릴릭, 195×161.5㎝, 1990). 캔버스와 유화물감이 아닌 한지와 먹, 아크릴릭 물감을 사용한 희귀작이다. 갤러리현대
어스름한 검붉은 빛의 덤불 속처럼 보이는 공간. 그 위에 드문드문 물방울이 영롱한 빛으로 맺혀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천자문이다. 마음을 갈고 닦은 것일까. 화면 가득 쓰여진 한자들은 서로 겹치고 겹쳐 켜켜이 쌓여 있다. 깊은 공간감이 느껴지지만 물방울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반듯한 표면에 맺혀 있을 뿐이다. 이 초현실적인 장면을 담은 작품은 이른바 ‘물방울 작가’로 불리는 김창열 화백(1929~2021)의 1990년작 ‘회귀 S.H. 9016’다. 그가 평소 자주 사용했던 캔버스나 마(麻)천, 유화물감이 아닌 한지와 먹, 아크릴릭 물감을 사용해 완성한 희귀작이기도 하다.

‘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백(1929~2021)의 작고 3주기 회고전 ‘영롱함을 넘어서’가 6월 9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김창열 화백의 작업 궤적을 총망라한 것으로, 1970년대 초반 작가의 초기 물방울 작품부터 2010년대 후반 작품까지 폭 넓게 아우른다. 전시 작품은 총 38점으로,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던 김창열 화백의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한지 위에 그린 물방울 작품을 비롯한 미공개 희귀작도 볼 수 있다.

물방울을 소재로 한 김창열 화백의 집요한 여정이 시작된 것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활용을 위해 무심코 물을 뿌려 뒀던 캔버스에서 물방울이 그에게 처음 다가왔다.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햇빛을 반사시키며 영롱하게 빛났고, 그 순간 캔버스는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그때의 감동을 김창열 화백은 ‘공간’ 1976년 6월호에 실린 대담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캔버스를 뒤집어놓고 직접 물방울을 뿌려 보았어. 꺼칠꺼칠한 마대에 매달린 크고 작은 물방울의 무리들, 그것은 충분히 조형적 화면이 성립되고도 남질 않겠어. 여기서 보여진 물방울의 개념, 그것은 하나의 점이면서도 그 질감은 어떤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새로움의 발견이었어. 점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감도라 할까. 기적으로 느껴졌어.”

처음 물방울을 발견한 그 날 이후 김창열 화백은 오로지 물방울에만 매달렸다. 마치 도를 닦듯 캔버스 위에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을 섬세하게 그려내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2년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살롱전 ‘살롱 드 메’에서 물방울 회화를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 작가의 물방울 작품에 글자가 등장한 것은 지난 1975년 신문 위에 물방울을 그려넣으면서부터다. 이후 그는 조금 더 나아가 동양철학의 수행과 성찰, 회귀의 정신과 세상 만물의 이치가 담긴 언어를 좇아 천자문과 도덕경 등의 글귀를 화폭에 새기기 시작했다.

김창열 화백은 평생에 걸쳐 물방울이 가진 영롱함을 화면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이를 끊임없이 재검토하고 해체하며 시험대 위에 올려놨다. 이를 통해 피상적인 환상을 깨고 그 이면에 숨겨진 회화와 예술의 본질을 들여다 보고자 했다. 실제 같지만 작가에 의해 철저히 조형된 물방울은 때로는 중력·빛 같은 자연의 물리 법칙을 거스르며 역동적인 모습으로 초현실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고, 때로는 모래·나뭇잎 등 실제 사물 위에 올려져 현실과 가상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1979년작 ‘물방울 CSH 27-1’이다. 물방울이 표면에 흡수된 자국이 있지만 화면 가운데 모인 물방울들은 여전히 영롱하게 빛난다. 물방울이지만 마치 점성이 있는 물질처럼 방울이 서로 엉겨 있다. 또 다른 1976년작에선 화면 위 공간에서 중력이 동시에 두 가지 방향으로 작용한다. 모두 현실에선 있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작가가 물방울의 다양한 특성들을 토대로 새로운 가능성을 가늠해보고자 했던 고민의 흔적들이다. ‘회귀’ 연작에서도 다양한 변주가 나타난다. 물방울은 표면의 글자를 확대하거나 가린다. 일례로 1997년작인 ‘회귀 DRA 97009’에서 물방울 옆에 무심한 듯 칠해진 먹 자국은 물방울의 거대한 그림자처럼 글자를 가리며 미지의 공간을 끌어들인다.

물방울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김창열 화백 작품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가 살아온 궤적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16세에 월남했다. 이쾌대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고, 검정고시로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지만 6·25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우연한 기회로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에 참여했고, 미국 뉴욕에서 4년 간 활동했다. 이후 백남준의 도움으로 1969년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하면서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게 됐다.

갤러리현대는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활약하고 있던 김창열 화백의 초대전을 개최하면서 작가의 물방울 작품을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한 갤러리다. 지난 2020년까지 총 14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는 “이번 전시는 갤러리와 특별한 인연을 가진 김창열 선생님을 기리는 의미에서 비판매 목적의 개인 소장품까지 함께 모아 기획한 회고전”이라며 “특히 작가가 환상을 깨고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지난 50년 간 시도했던 다양한 조형적 표현을 조명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한편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작품은 2021년 그가 작고한 뒤 미술계로부터 더욱 큰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1978년작 ‘CSH I’가 985만 홍콩달러(약 17억원)에 낙찰되면서 작가 최고가를 경신하기도 했다.

김창열 ‘물방울 CSH 27-1’(캔버스에 유채, 60.6×72.7㎝, 1979). 갤러리현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