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대사관, 출입 허가제로 변경… '대사 갑질의혹' 보도 보복?
주중한국대사관이 특파원들의 대사관 출입을 사실상 ‘허가제’로 바꾸면서 베이징 특파원들이 반발하고 있다. 특파원단은 30일 이례적으로 기명 성명을 내고 주중대사관의 출입 제한 통보는 취재를 원천 봉쇄하는 조치라며, 즉각 철회를 촉구했다. 이번 통보는 특파원들이 3월 말 정재호 주중대사의 ‘갑질’ 의혹을 보도한 이후 나온 것이어서 정 대사의 사적 보복이라는 의심도 제기되고 있다.
주중대사관은 29일 오전 단체 채팅방을 통해 베이징 특파원단에 출입 제한 조치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주중대사관은 “5월1일부터 대사관 출입이 필요할 경우 최소 24시간 이전에 출입 일시, 인원, 취재 목적을 포함한 필요 사항을 대사관에 신청하기 바란다”며 “신청 사항을 검토 후 대사관 출입 가능 여부 및 관련 사항을 안내하겠다”고 밝혔다.
기존엔 큰 제약이 없었던 대사관 출입이 하루아침에 ‘허가제’로 바뀌면서 특파원단은 크게 반발했다. 특파원들은 이날 오후 7시 베이징 차오양구의 한 빌딩에서 총회를 열고 1시간 30분 동안 이번 출입 제한 결정과 관련한 논의를 진행했다. 이날 총회엔 전체 인원 36명 중 위임자 8명을 포함, 34명이 참석했고 논의 결과 성명문을 발표하기로 의결했다.
특파원단은 30일 35명의 실명으로 성명문을 내고 “정재호 대사, 대언론 갑질 멈춰라”고 촉구했다. 특파원들은 “대부분의 보도가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최근의 언론환경을 고려했을 때, ‘24시간 이전 신청’은 취재 원천 봉쇄 조치”라며 “특히 이번 통보는 지난달 말 한국 언론사들이 정 대사의 갑질 의혹을 보도한 이후 나왔다. 이는 ‘불통’을 넘어 언론 자유를 침해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행위로, 특파원 일동은 출입 제한 통보의 즉각 철회와 기형적인 브리핑 정상화, 정 대사의 사과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주중대사관은 이번 조치가 보안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중대사관 관계자는 기자협회보와의 통화에서 “최근 한 언론사가 대사관과 사전 협의 없이 중국인 직원들과 함께 대사관 경내로 진입해 촬영한 사례가 있었다”며 “대사관은 보안시설이다. 문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사전 협의를 좀 해달라는 취지로 공지한 것”이라고 말했다.
특파원단은 그러나 대사관의 해명을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파원단은 “당시 일부 언론이 갑질 의혹에 대한 대사의 의견을 직접 듣고자 출근 시간 대사관 뜰 안에서 현장 취재를 시도했다”며 “한국 방송사 베이징 지국에서는 촬영 인력을 현지 직원으로 채용하는 경우가 대다수고, 대사관은 과거 사전투표 취재 등 주요 행사에서도 이들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들의 출입을 문제 삼은 것은 ‘영상 보도’를 하지 말란 말과 같고, 특파원 탄압을 위한 핑곗거리 찾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주중대사관의 이번 결정은 다른 해외 공관의 사례를 봐도 이례적이다. 미국 워싱턴과 프랑스 파리 등 주요 대사관에선 특파원들에 사전 출입 신청 절차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특파원단 내에선 이번 대사관의 결정이 정 대사의 독단적 판단 및 사적 보복이라는 의심이 제기되고 있다.
특파원단은 “임기 내내 정 대사는 언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 왔다”며 “모 언론사가 비실명 보도 방침을 어겼다고 주장하며 부임 후 1년 7개월째 한국 특파원 대상 월례 브리핑 자리에서 질문을 받지 않고, 메일을 통해 사전 접수한 질문에 대해서만 답변하고 있다. 지난 3월 말 정 대사의 갑질 의혹 보도 이후에는 대사관 명의로 특정 언론을 지목해 ‘최전선에서 국익을 위해 매진하는 대사관의 직무수행을 방해했다’는 내용의 설명 자료를 홈페이지에 게재했다”고 비판했다.
정 대사는 부임 직후부터 특파원단과 갈등을 빚었다. 2022년 9월 특파원단과의 첫 월례 브리핑을 시작으로, 특파원 한 명이 비실명 보도 방침을 어겼다고 주장하며 특파원들과 대립했다. 당시 대사관 측은 재발 방지 조치와 원칙을 위반한 기자에 대한 징계를 조건으로 브리핑 정상화가 가능하다고 통보했는데, 의견을 취합하고자 특파원들이 그해 10월 총회를 열기도 했다.
한 베이징 특파원은 “브리핑 원칙 파기가 맞는지를 가리기 위해 투표했는데, 참석자 30명 중 24명이 브리핑 원칙 위반이 아니라고 판단했다”며 “통상 외교 현안에 대한 브리핑에서 기자들이 비실명 보도를 하는 이유는 외교적 상대방이 있어 실명 보도 시 국익이 훼손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 대사의 발언은 국익과는 무관하고, 더구나 해당 기사의 일부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용되는 대사 업무추진비의 부적절한 사용을 지적한 것이어서 ‘사례에 따라 특파원단이 자체적으로 판단하겠다’는 입장을 대사관 측에 공식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후 정 대사는 약 5개월간 코로나 격리 등을 이유로 월례 브리핑을 취소했다. 지난해 2월 취임 후 재개한 두 번째 공식 브리핑에선 현장 질문을 받지 않고, 사흘 전까지 메일을 통해 접수한 질문에 대해서만 답변하는 방식을 도입해 ‘해괴한 브리핑’, ‘간담회가 아닌 발표회’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정 대사는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1년 7개월 동안 현장 질문을 받지 않았고, 지난 3월 말 일부 언론이 자신의 갑질 의혹을 보도하자 사전 협의 없이 4월 브리핑을 취소했다.
다른 베이징 특파원은 “미리 준비된 답변을 약 한 달 이전의 이슈를 포함해 기계적으로 읽고 끝내는 형식이라 브리핑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었다”며 “대사가 참석하는 행사 가운데 취재가 가능하다는 취지로 사전에 일정을 공유받은 것도 2023년 국정감사, K-푸드페스타 외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 대사의 소극적인 대언론 활동은 2022년 국정감사에서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박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김홍걸 무소속 의원은 당시 국감에서 추가 질의 및 보충질의 시간까지 할애하며 정 대사의 언론 활동을 질타했다. 박병석 의원은 “대사와 특파원단의 관계는 특권도, 배려도 아니고 의무”라며 “특히 4대 강국은 중요하기 때문에 신뢰를 바탕으로 기자들하고 허심탄회한 소통의 시간을 늘려주실 것을 건의한다”고 말했다.
한편 정 대사는 윤석열 대통령의 서울 충암고 동기로,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25년간 재직했다. 지난 대선 때 윤 대통령에 정책 자문을 했던 그는 대선 직후인 2022년 6월 주중대사에 내정됐고 두 달 뒤 정식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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