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당일 "오늘 못 만나겠다"는 카톡

칼럼니스트 최은경 2024. 4. 30. 18:2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엄마의 코스] 내 하루는 소중하니까

얼마나 놀라고 다급했으면 새벽 5시 20분에 카톡을 보냈을까. 나와의 약속을 캘린더에 저장해 놓지 않아서 회사 미팅 일정과 겹쳤단다. 고로 나와 점심은 먹을 수 없고 짧은 티 타임 정도만 가능하니 약속을 바꾸었으면 한다는 거다. 으흠. 그런데 어쩌나. 나는 이날 약속을 잡음과 동시에 병원 정기검진 예약을 잡아서 서울로 가긴 가야 하는데… 나는 안식월 중이라 상관없지만 후배는 일이 우선이니 일단은 오케이.

그렇지만 다소 아쉽긴 하다. 나는 후배와 만날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나만 그런가 싶어서. 더 마음이 그랬던 것은 지난 주말에도 약속이 있었는데 전날 취소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같은 사람 아님).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갑자기 시간이 붕 떴다. 병원 일정은 오전 8시 반쯤 끝났다. 집에서 6시 15분에 나왔다. 내 소중한 하루를 이렇게 날려 버릴 수는 없는데... 뭘 하지.

날씨는 좋고 바람은 적당하고 나는 시간이 많고. 생각하다 보니 배 고프다. 혈액 검사하는 날은 늘 금식이다. 광화문으로 가서 생각하자. 혜화동 출발. 출근하는 때였으면 병원에 갔다 사무실로 가면 그만이었는데 안식월인 나는 회사에 갈 수 없다. 안식월인데 회사에 가면 그것도 재밌겠다, 혼자 생각하며 웃고 만다.

◇ 광화문 포비

커피가 맛있기로 유명한 광화문 포비. ⓒ최은경

광화문광장 건너편에 회사를 두고 베이글과 커피가 맛있기로 유명한 포비(4B)에 혼자 앉았다. 오전 9시가 다 된 시간. 거리에 직장인들이 별로 안 보인다. 회사 출근 도장 찍고 커피를 사러 오는 직장인들이 간간이 보인다. 이른 아침에도 미팅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나는 관찰하고 그들은 일한다. 앱 지도를 보다가 한때 자주 드나들었던 시네큐브 상영시간을 확인한다. 그다지 마음에 드는 영화가 없다. 패스. 이번에는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 오픈 시간을 확인한다. 오전 11시. 커피 먹고 가면 딱이겠다. 정했음. 오늘 일정.

광화문에서 273번 버스를 탔다. 잘못 탔다. 이대 앞에서 내려 271번 버스를 탄다. 합정역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합정역으로 가는 길에 2200번 버스를 지나친다. 어? 저거 타야 하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2200번을 타기 위해 전력 질주한다. 첫 번째 자리에 앉았다. 자유로를 달리는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름답다. 한강습지가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강과 습지가 잘 어울렸다. 평일에 내가 이런 데를 지나고 있다니 너무 좋구나. 약속 깨졌다고 속상해 하지 않고 집으로 바로 가지 않은 나를 칭찬해.

정거장에 정차하지 않고 달리는 길. 버스는 파주출판도시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나의 목적지가 아니다. 나는 헤이리로 가야 한다. 임진강을 따라가다가 헤이리 6번 게이트에서 내린다. 게이트가 있는 동네라니 낯설다. 언제 와 본 적 있지만 왜 왔는지, 누구랑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런 상황.

◇ 파주 카메라타

황인용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 ⓒ최은경

지도 앱을 켜고 목적지를 찾는다. 직진 후 우회전. 오늘 나의 목적지는 황인용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 언젠가부터 한번 오고 싶었던 곳이다. 그러나 집에서 혼자 오기는 파주가 꽤 멀었다. 이런 날 오라고 그동안 참았던가 보다. 꽃가루와 흙먼지 날리는 길을 5분 정도 걸어 도착. 드디어 왔다. 문을 열기 전부터 들리는 엄청난 사운드의 피아노 선율이 철문을 뚫고 나오는데 이때가, 문을 열기 직전이 가장 설렜다.

오전 11시 12분 오픈런. 1등은 아니었다. 이미 한 분이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계셨다. 입장료 15000원. 음료 한 잔 포함이다. 커피는 마셨으니 아이스티 마셔야지. 실론유자아이스티. 유자청을 깔고 홍차 우린 물을 부어 주는 음료다. 잘 섞어서 마시면 은은한 단맛과 홍차의 향이 매력적이다. 갈증이 났는지 한 잔 더 먹고 싶었지만 주문하는 방법을 몰라서, 더 솔직히는 물어보기 귀찮아서 패스.

책상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앉자마자 '이런 게 사는 거지...' 하는 소리가 내 안에서 들렸던 것 같다. 자연과 함께 나를 가장 많이 위로해 주는 것은 음악이었다. 흠뻑 빠져 들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있다는 게 행복했다. 약속은 깨졌는데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래, 나 이런 거 좋아했지. 또 잠깐 잊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아도 부족한 게 시간이라 했다. 사랑만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라고도 했다. 계획이 틀어져서 약간 찜찜했을 수도 있는 하루를 나만을 위한 코스로 만드니 전혀 다른 시간이 되어 버렸다. 뭐든 내 마음 먹기 달렸다는 말은 정말 진리다. 주어진 환경에서 부지런히 좋아하는 것들을 누리고 살아야지, 또 다짐한다.

클래식 공연장에서는 부담스러운 자유로운 음악 듣기가 여기서는 가능하다. 고개를 약간 흔들어도, 피아노 치듯 손가락을 움직여도, 멜로디에 따라 손짓을 해도 괜찮았다.

플레이되는 곡의 음반을 올려놓는 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 ⓒ최은경

이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음악 감상실 콩치노 콩크리트에도 가봤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친구들과 함께. 입장료 2만 원. 물 한 병 준다. 공간은 카메라타 보다 넓고 조용하다. 소음이 거의 없다. 비가 오는 날이라 그랬는지 적당히 어두웠고 바라다보는 풍경도 좋다. 소리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는 그런 곳이다. 세 명이서 갔지만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반면 카메라타는 좀 캐주얼하다. 음료 만드는 소리도 들리고 함께 온 사람들과 간단한 대화도 가능한 곳이었다.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되겠다. 참고로 카메라타는 음료 맛이 꽤 좋은가 보다. 블루리본 표시가 많다.

이날 황인용 선생님도 만나 뵈었다. 그분은 나를 모르시겠지만 눈빛이 마주쳐 가볍게 인사했다. 좋아하는 공간을 꾸려가시는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언젠가는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무엇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가능할 때가 올까. 그것이 뭘까. 글쓰기가 될 수도 있을까.

◇ 합정 고미태

1시간 반 정도 넘었을 무렵 서울로 나가는 차 시간을 확인했다. 나는 뚜벅이니까. 15분쯤 후에 버스가 온다. 그걸 타고 나가면 합정에는 2시쯤이 될 것이다. '점심을 먹어야 하나?' 싶을 때, 오늘 후배랑 가려던 곳이 생각났다.

시즌별로 한 가지 메뉴만 만들어 파는 국숫집. 4월 메뉴를 다음 주 화요일까지만 먹을 수 있다면서 도전해 보자고 했던 곳. 너무 줄이 길면 다른 데서 먹자고 했는데, 오후 2시면 그렇게까지 줄이 길 것 같지 않았다. 그래, 혼자라도 도전해 보자. 한번 가보지 뭐.

합정 고미태. '장인 정신이 가득한 카모소유라멘(오리 육수에 간장 베이스)'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정갈한 입간판이 보기 좋다. 생각대로 점심 손님이 빠지고 난 상태. 대기 없이 한 자리 남은 곳에 앉을 수 있었다. 일본 작은 가게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요리하는 모습을 직접 가까이서 보는 것도 좋았다.

'장인 정신이 가득한 카모소유라멘'이 유명한 합정 고미테. ⓒ최은경

사발에 국수를 펴듯 담고 따로 끓여낸 국물을 부었다. 면 위로 데친 아스파라거스, 브로콜리 두 쪽, 애호박 두 쪽, 쑥, 가쓰오부시를 소담하게 얹는다. 사발에 그림 그리듯 겨자 발라주는 것도 재밌고. 마지막 이제 진짜 디테일이 다른 하나인데, 국물 스푼을 뜨거운 물에 한번 담갔다 주시더라. 마치 국밥 토렴 하듯이. 손길이 섬세하다. 손길만큼이나 서비스도 그렇다. 별도의 반찬은 없다.

(젓가락을 놓아주시면서) "왼손잡이면 말씀해 주세요."
"가쓰오부시는 국물에 섞지 말고 야채 고명과 면을 함께 드실 때 얹어서 드세요."

고명 조절 잘해서 끝까지 함께 드시길. 면만 먹으면 좀 퍽퍽할 것 같다. 아무 데서나 먹어 볼 수 없는 국수라 그랬을까. 맛이 좋았다. 담백하고. 오리를 끓인 육수인지는 나중에 알았다. 주인장 말대로 고명과 가쓰오부시를 함께 먹으면 더 맛있었다. 고명들 데친 정도도 딱 좋았고. 쑥의 맛도 참 향기로웠다. 겨자도 중간중간 먹으면 알싸한 맛이 괜찮다. 면도 직접 만드신다고 들었는데 일반 국수는 아니고 뚝뚝 끊기는 메밀면 같은 식감. 손님 응대와 요리 등을 다 혼자 하시면서도 자동화된 듯한 안내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내가 나갈 때 뒤도 안 돌아보고 요리하시면서 "안녕히 가세요" 하시더라는.

갑자기 약속 취소 당하고 헛헛할 수 있었는데 나름 알찬 하루를 보냈다. 합정에서 갑자기 방황하게 되었다면 이 코스를 추천하고 싶다. 소요시간 50분씩 왕복 버스(차가 안 막혔을 때), 카메라타 2시간, 식사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5시간 정도가 필요한 일정. 서울에서도 파주는 꽤 멀다. 여유가 있을 때 가는 게 좋겠다. 더 있고 싶은데 와야 하면 그것도 좀 아쉬우니까. 직장인이라면 요즘 유행이라는 반차 내고 가면 딱일 것 같다.

그래, 혼자 잘 노는 것... 이것도 재주지. 물론 이게 하루아침에 된 건 아니다. 혼자 노는 데 필요한 팁이라면 '장소' 선정이 중요하다. 틈틈이 가고 싶은 곳을 지도 앱에 체크해 두는 것. 갔던 곳을 체크해 두는 것도 좋지만 가고 싶은 곳을 미리 찜해두는 것도 필요하다. 언제 내가 그 주변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나를 위한 선물을 미리 쌓아두는 마음으로 지도 앱에 별표(즐겨찾기)를 눌러둔다. 제가 추천한 코스가 마음에 든다면 지금 바로 찜부터 해두세요. 언젠가의 나 자신을 위해.

오늘의 코스 : 혜화동 → 광화문 포비 → 파주 뮤직스페이스카메라타 → 합정 고미태

*칼럼니스트 최은경은 편집기자로 일하며 두 딸을 키우는 직장맘입니다.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성교육 대화집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일과 사는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을 펴냈습니다. 

【Copyrightsⓒ베이비뉴스 pr@ibabynews.com】

Copyright © 베이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