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가면 사라지는 '물방울의 신비'

서지혜 기자 2024. 4. 3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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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창에 빗방울이 맺힌 것처럼 영롱한 물방울이 캔버스에 가득 차 있다.

그는 1976년 박서보 화백과 나눈 대담에서 "거칠거칠한 마대에 매달린 크고 작은 물방울 무리들, 그것은 충분히 조형적 화면이 성립 되고도 남지 않겠어"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가 그린 물방울은 관람객에게 '결국 모든 것은 환상이고, 사라진다'는 인생에 대한 중대한 메시지를 던진다.

1층에서는 1970년대 작품을 주로 볼 수 있는데 이 때의 물방울들은 마치 세상에 중력이 없는 것처럼 미동 없이 캔버스에 '딱 달라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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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현대, 김창열 작고 3주기展
1973년작 '물방울' 등 38점 전시
얼음 맺힌 것처럼···사실적 묘사
작품 앞에 서면 흰색 점만 남아
'모든 것은 사라져' 메시지 전해
김창열, 물방울(디테일), 1973, 캔버스에 유채, 199 x 123 cm.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서울경제]

비오는 날 창에 빗방울이 맺힌 것처럼 영롱한 물방울이 캔버스에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 물방울은 중력을 거스른다. 캔버스는 벽에 걸려 있는데 물방울은 흘러내리지도 않고, 옆으로 퍼지지도 않는다. 흘러내리던 자국이 있는데도 결국은 물질이 모여 다시 영롱한 물방울을 이룬다. 관람객은 신기한 물방울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그림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런데 ‘톡’. 그림 앞에 가까이 서자 갑자기 물방울이 사라진다. 하얀색 물감 한 점만이 이 자리가 바로 물방울이 있었던 자리라는 것을 알려 준다.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환상(illusion)적인 경험이다.

마구간에서 발견한 물방울, '예술의 본질' 전하는 평생의 화업 되다

‘물방울 화가’ 김창열 화백(1929~2021)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개막했다. ‘영롱함을 넘어서’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197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까지 수행하듯 그린 38점의 물방울 작품을 볼 수 있다.

작가는 1971년 뉴욕에서 프랑스 파리로 터전을 옮긴 후 마구간에서 생활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재활용을 위해 물을 뿌려 둔 캔버스에서 물방울을 발견하고, 작업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는 1976년 박서보 화백과 나눈 대담에서 “거칠거칠한 마대에 매달린 크고 작은 물방울 무리들, 그것은 충분히 조형적 화면이 성립 되고도 남지 않겠어”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갤러리현대에서 김창열 화백의 작고 3주기 전시 ‘영롱함을 넘어서’가 개막했다. 사진=서지혜 기자

그의 작품은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트롱프뢰유(착각을 일으키는 속임수 그림)처럼 진짜 물방울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작가는 생전에 “예술의 본질은 결국 일루션(illusion)일텐데, 이것을 재검토해 보려는 것이 나의 예술"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가 그린 물방울은 관람객에게 ‘결국 모든 것은 환상이고, 사라진다’는 인생에 대한 중대한 메시지를 던진다. 작가 역시 1988년 자신의 작가노트에서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무’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다”라며,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로 돌릴 때 우리들은 평안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김창열 화백의 작품 속 물방울의 모습. 사진=서지혜 기자
김창열 화백의 작품 속 물방울의 모습. 사진=서지혜 기자
흔들림 없이 맺힌 물방울··· ‘톡’하고 사라지는 환상

전시는 지하 1층~2층 등 3개 층에서 진행된다. 전시의 주인공은 작고 3주기를 맞은 김창열 화백이 아닌 ‘물방울’이다. 1층에서는 1970년대 작품을 주로 볼 수 있는데 이 때의 물방울들은 마치 세상에 중력이 없는 것처럼 미동 없이 캔버스에 ‘딱 달라붙어’ 있다. 1973년작 ‘물방울(디테일)’이 대표적이다. 캔버스 상단에 가득 맺혀 있는 물방울들은 하단으로 흘러내리거나 주변의 다른 물방울과 결합되지 않는다. 그저 얼음처럼 맺혀 있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진다.

김창열, 회귀 PA93001, 1993, 캔버스에 색연필, 아크릴릭, 오일, 200 x 135 cm. Courtesy of Kim Tschang-Yeul Estate and Gallery Hyundai.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사진 제공=갤러리 현대

작가의 1980년 대 이후 작품이 주로 모여 있는 2층 전시장에서는 차츰 물방울이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79년작 ‘물방울’에서는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표면에 흡수된다. 하지만 결국 흘러내림의 끝에서 물방울은 다시 영롱하게 동그란 조형이 되어 맺힌다.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지는 환상적 속성도 그대로다.

지하층에서는 좀 더 다양한 표면과 만난 물방울의 변주를 볼 수 있다. 커다란 한자를 배경으로 한 ‘회귀’는 글자 위에 떨어지면 글자를 확대 시키거나 지워버리는 물방울의 속성을 나타낸다. 여기서도 물방울의 환상적 속성은 여전하다. 갤러리현대는 이번 전시를 위해 김명자 회장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뿐 아니라 다양한 컬렉터들로부터 작품을 수집했는데 이 중에는 미술품 컬렉터로 유명한 방탄소년단(BTS) 멤버 RM의 소장품도 한 점 포함돼 있다.

김창열 화백의 생전 모습. 사진제공=갤러리 현대.
서지혜 기자 wis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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