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자전거 여행기] "어서와, 자전거 타고 온 한국인은 처음이야"

이남석 오지 자전거 여행가 2024. 4. 30.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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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롱라를 향한 전초기지인 토롱 베이스캠프 오르는 길. 세계 각국에서 온 많은 트레커와 현지 가이드, 포터들을 자주 만났다.

트레킹을 하는 이들은 불문율이 있다. 마낭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일찍 출발한다. 이것은 안나푸르나에 온 트레커들이 토롱라(5,416m)를 넘어 반대편 묵티나트나 좀솜까지 가는 여정에서 불문율처럼 지켜져 왔다. 물론 마낭(3,600m)에서 이틀을 머물며 부근에 있는 틸리초호수를 다녀오는 사람도 있고, 틸리초호수를 거쳐 토롱라로 가는 트레커도 있다. 느낌상 점심 이후에 마낭에 도착할 것 같았다.

네팔처럼 행어 브리지Hanger Bridge(네팔식 구름다리)가 많은 지역은 처음이다. 인도 히말라야나 카라코룸 지역에는 네팔처럼 견고하고 공사비가 많이 드는 행어브리지 대신 달랑 줄 하나만 매어놓고 줄에 도르래와 바구니 같은 걸 매달아 사람이나 물건을 싣고 이동하는 수단이 많다.

말하자면 네팔의 행어브리지가 조금 더 안전하고 인간적인 면이 있다고 할까. 미적 감각도 뛰어난데 비록 중량이 나가는 차량은 이동할 수 없어도 사람은 당연하고, 짐을 실은 말이나 당나귀까지 충분히 다닐 수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범선의 돛처럼 다리 줄에 매달려 한쪽으로 나부끼는 아름다운 타르초(불교 경전을 적은 깃발)를 구경하는 건 덤이다.

마낭에 도착하기 직전에 본 영탑靈塔. 수도승들의 사리를 안치한 탑이다.

5,416m 고개를 향한 도전

행어브리지를 지나자 길 왼쪽으로 안나푸르나 주봉이 장엄한 모습을 드러냈다. 8,000m 이상 고봉을 처음 본 것은 23년 전 중국 티베트를 여행하던 당시 롱푸 곰파(사원) 앞에서 본 에베레스트였다. 안나푸르나는 지금까지 봤던 고봉들보다 훨씬 따뜻하고 편안했다.

마낭에 도착하자 기후와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나무는 사라지고 히말라야 고산지대 특성이 그대로 나타났다. 마치 인도 히말라야인 라다크를 여행하는 분위기였다. 처음 출발할 때 덥고 습했던 상황과는 대조적이었다. 한낮에도 긴소매를 입어야 할 정도로 햇볕이 강했으나 공기는 서늘했다. 세상을 사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의 무게가 30kg이라면 바로 내 자전거에 매달린 짐 무게였다. 텐트, 침낭, 휘발유 버너와 코펠, 식량, 자전거 수리도구까지 최소한의 생존 품목으로 꾸렸다.

오후 1시, 해발 3,600m 마낭에 도착했다.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은 마낭까지다. 마낭부터 토롱라('라'는 네팔어로 고개를 뜻한다)를 넘어 묵티나트까지는 사람과 말들만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다. 길 경사는 얼마나 급한지, 정상 부근에 눈은 얼마나 쌓였는지 확인하고 싶지만 참았다.

처음으로 만난 자전거 독일인 여행자. 그들은 놀랍게도 반대편에서 오는 중이었다. 반대편에서 오는 길이 전체적으로 더 가파르다.

한 가이드가 보름 전에 토롱라 정상에 눈이 너무 많이 쌓여 토롱 베이스캠프에 있던 트레커들이 눈길이 뚫릴 때까지 기다렸다며 당시 사진을 보여 줬다. 예상보다 여행이 험난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눈이 내려 길이 막히면 야영할 각오로 상점에서 충분히 비상식량을 준비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삶도, 죽음도, 인생도. 다행히 마낭에는 은행이 있어 현지 화폐인 루피가 모자랄 수도 있을 것 같아 100달러를 환전했다.

다음날 단단히 마음먹고 해발 5,416m 토롱라를 향해 출발했다. 최소한 3일 뒤에는 토롱라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출발했으나, 무엇 하나도 장담할 수 없었다. 짧은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에 서로 다른 두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붙어 있었다. 왼쪽은 틸리초호수, 오른쪽은 토롱라였다. 당연히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집과 담으로 둘러싸인 터널 같은 입구를 통과하자 아주 큰 나무가 안나푸르나 설산을 배경으로 우뚝했다. 수종은 모르겠지만 수령이 몇 백 년은 족히 됨직했다. 아마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다녀온 사람들은 분명 저 나무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서쪽 하늘을 가득 채운 갈기 구름이 안나푸르나를 배경으로 나무를 더 신비롭게 만들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던지는 메시지도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저 웅장한 히말라야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언덕을 올라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 나타난 훤칠한 흰 산. 안나푸르나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다.

처음엔 오르막이 가파르고 길어 겁을 먹었다. 그러나 지나던 현지 가이드가 말하길 조금만 더 가면 길이 편안해지니 염려 말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기념품을 파는 한 노인에게서 야크 뼈로 만든 불교 염주를 샀다. 그것이 확실치 않은 미래를 편안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최소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징표였다.

하루를 꼬박 올라 해가 뉘엿해질 무렵, 해발 4,500m의 한 마을에 도착했다. 여러 로지(여행자 숙소) 중 첫 번째 로지에 여장을 풀었는데 주인은 젊고 한국말을 잘했다. 알고 보니 한국의 경기도 파주에서 일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흰 치아를 드러내며 내 손을 꼭 잡더니 "자전거를 가지고 온 한국인은 처음"이라며 반갑게 맞이했다.

"내일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자전거로 가기에는 많이 힘들 겁니다."

"뭘 먹어야 에너지가 나겠소. 이제 달밧(네팔식 백반)은 신물이 납니다."

"오늘 저녁 식사는 야크 스테이크를 해드리겠습니다."

해발 3,600m의 마낭. 차도는 여기에서 끝나며, 이후에는 도보로만 이동이 가능하다

로지 주인의 제안에 따라 저녁은 좀 비싸지만 오랜만에 고기를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여러 나라에서 온 트레커들 50여 명이 홀에 모여 티타임을 가졌다. 그들 대부분 유럽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나를 알고 있었다. 걸어오면서, 아니면 지프를 타고 오면서 혼자 자전거를 타고 오는 나를 봤다며 대대적으로 환영해 줬다.

나는 그들과 1시간이 넘도록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특히 중간에 만났던 젊은 프랑스인 자전거 여행자는 내 옆에 앉아 내가 과거에 갔던 자전거 여행지에 관해 집중적으로 질문했다. 나라별로 자기들끼리 모여 얘기를 나누다가 한 동양인 자전거 여행자 때문에 다 함께 대화의 장이 열린 셈이었다. 문화와 자연이 가장 각별한 주제였으며, 우리에게 국가나 언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음날, 숨이 차는 정도를 봤을 때 고도가 높아지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급격한 오르막은 없었다. 평탄한 곳과 얕은 오르막에서는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계속해서 내 옆으로 트레커들과 가이드, 짐을 진 포터들이 지나갔다. 마낭 이전부터 우리는 이미 구면이었으며 친구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마낭에서 토롱라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큰 나무.

얼마 안 가서 독일에서 온 자전거 팀과 만났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자전거 팀이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나와는 반대로 경사가 세고 훨씬 힘든 묵티나트 쪽에서 올라오는 중이었다. 토롱라를 넘어왔다고 하니 그곳 사정을 잘 알 것 같았으나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은 내 자전거를 보고 너무 짐을 많이 가지고 간다며 걱정했다. 두 젊은 남녀는 매우 유쾌하고 진지했으며 "이렇게 훌륭한 경치를 구경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짧은 대화만 나누고 헤어졌지만 문득 나는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에 오르자 그들은 이미 저만큼 내려가고 있었다.

해발 4,600m에 이르자 날씨는 극도로 청명했다. 하늘은 깊은 얼음장을 숨긴 호수와 같았다. 봉우리는 날카롭고 능선은 부드러웠다. 해가 뜨자 능선의 가장 높은 곳부터 밝아지기 시작했다. 오후와는 다르게 아침에는 타르초가 동쪽으로 나부꼈다. 아침과 저녁에 부는 바람의 방향이 바뀐다는 증거였다.

틸리초 베이스캠프(4,900m)와 토롱라로 가는 길이 나뉘어지는 곳을 지나는 필자.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응원해 주었다

마침내 나는 햇빛 안으로 들어왔다. 기온이 오르자 다소 경직되었던 근육이 풀리면서 기분도 상쾌해졌다. 길과 함께 올라가는 능선은 아름답고 장쾌했다. 능선 꼭대기에는 약간씩 눈이 덮여 있는데 그 모습이 오히려 완벽하게 눈 덮인 설산보다도 더 극적이었다. 길옆에는 고원에서 자라는 키 작은 향목香木이 가득했다. 티베트인, 라다키(라다크인), 그리고 네팔리(네팔인)들은 이 나무를 베어다가 곰파(사원) 앞에 있는 향로에 넣고 불을 붙인다. 향 대신 사용하는 것이다.

안나푸르나는 동쪽에 있다. 정상 부근은 설산에서 반사되는 은색과 그림자가 드리운 계곡의 검은빛이 완벽하게 대비되었다. 그래서 더 신비하게 다가왔다. 설선 아래로 펼쳐진 초지의 풀은 탈색해 마치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처럼 쓸쓸했다. 날카롭게 치솟은 봉우리로부터 부드럽고 정숙하게 벋어나간 능선은 다음 봉우리와 깊은 골로 연결되었다. 양쪽 봉우리와 능선에서 흘러내린 눈 녹은 물이 가장 낮은 곳으로 모여 아래로 치달았다.

나는 쉬다 가기를 반복했다. 경이롭고 환상적인 풍경은 높은 고도에 의한 호흡 곤란과 근육 통증이 오는 걸 잊게 했다. 말하자면 진통제였다. 침식되어 쌓인 가볍고 부드러운 흙은 물을 숨겼으며, 단단한 바위와 딱딱하게 굳은 땅은 물을 모았다.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 사방에 풀이 자라거나 호수가 만들어지거나 내가 흘렀다.

트레커와 현지인들의 짐을 당나귀에 싣고 날라주는 말몰이꾼들.

잠깐 쉬고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트레커, 가이드, 포터들이 지나갔다. 그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미소든 손짓이든 내게 격려의 표현을 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트레커들이 멘 당일산행 짐에 비하면, 내 자전거에 실린 짐은 상대적으로 큰 멍에였다.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들이나 나나 목표는 하나였다. 단지 의지하는 수단이 다를 뿐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생활에 쓰이는 모든 필수품을 사람 등짐이나 말로 옮겼다. 차가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뒤에서 말이 지나간다고 신호를 보내면 나는 말들이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길 가장자리로 피했다. 그럴 때마다 말몰이꾼은 언제나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계곡으로 달리는 물은 수량은 적지만 맹렬하게 소리를 질렀다. 간혹 괴상한 소리처럼 들리다가도 바람이 싸릿가지를 후려치듯 예리하면서도 격렬한 노래를 불렀다.

도랑을 지나자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됐다. 내려올 때 자전거가 계곡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너무 힘을 쓴 나머지 어깨와 양쪽 겨드랑이가 뻐근했다. 포터들은 꾸준한 걸음걸이로 오르막도 마치 평지처럼 걸어갔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면 큰 대가를 치르는 게 포터나 나나 똑같지만 그들은 용감했다. 나는 보통 가다가 10m 미만에서 반드시 멈춰야 했다. 호흡보다는 고소에 의한 근육 통증 때문이었다. 해발 5,000m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토롱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 완만한 경사지만 짐 무게가 있어 자전거를 끌고 오를 수밖에 없었다.

중간 휴게소에서 쉬고 있던 트레커들이 내가 용을 쓰며 야드에 도착하자 일제히 "Go Lee!"를 연호하며 박수를 쳤다. 그들과는 이미 구면이었다. 내 뒤를 바짝 좇아오던 프랑스인 트레커에게 먼저 가라고 하자 그는 "Cycler first, Lee!"를 외쳤다. 휴게소에서 쨔이(밀크티) 한 잔을 마시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큰 언덕 하나를 두고 좌우로 늘어선 능선과 눈 덮인 봉우리가 앞으로 갈 길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트레커들을 먼저 보내고 나는 배가 불러 사냥 의지가 없는 눈표범처럼 어슬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또각" 자전거 클릿이 돌에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점점 다가오는 설산이 토롱라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분명 저렇게 가까이 있을 리 없었다. 정오로 치닫는 빛은 조금씩 강렬했으며 바람은 불지 않았다. 이렇게 가든 저렇게 가든, 자전거와 나는 토롱라와의 간격을 줄이는 중이었다.

얼마를 갔을까? 산사태가 날 수 있는 곳이니 조심하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자전거를 세우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절벽 밑으로 계곡이 까마득했다. 멀리 길이 휘어지는 곳에 병풍처럼 막아선 암봉과 설산이 있었다. 거기까지 가면 뭔가 새로운 비경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앞서가던 트레커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했다.

트레커들의 무거운 짐은 당나귀나 포터(짐꾼)들이 메고 간다.

용기를 내어 100여 m를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내렸다. 이번엔 진짜 경사가 나타난 것이다. 경치는 수시로 바뀌었으며 설산 주변에서 맴돌던 구름이 하늘 여기저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라쳇 소리와 헐떡이는 숨소리가 동시에 들리며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왔다. 시야는 좁아졌다가 넓어지기를 반복했으며 간혹 뒤에서 좇아오는 트레커나 포터들도 보였다. 그들은 서서히 나와의 간격을 좁히다가 끝내는 추월했다. 토롱라를 남겨놓고 오늘은 어디선가 야영하든지 아니면 로지에서 묵어야 했다.

가도 가도 계속 절벽 낭떠러지였다. 한 무더기로 뭉쳐 있던 구름이 잘게 쪼개져 하늘에 박혀 있었다. 중간에 뉴트리션(영양제)을 섞은 콜라와 함께 또띠(네팔식 빵)를 꿀에 찍어 먹는 것으로 참을 마쳤다. 마치 8기통 휘발유 엔진을 단 승용차가 가속기를 밟을 때마다 기름이 소모되듯 아무리 탄수화물과 당류를 주입해도 조금만 움직이면 다시 배가 고팠다. 그러면 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패니어(자전거 가방)에서 뭐가 되었든 먹을 걸 꺼내야 했다. <다음호에 계속>

엽서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풍경이 곳곳에서 드러나, 혼자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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