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서울대생들의 혼돈과 사랑, 그 속에 핀 꽃들 [김민철의 꽃이야기]

김민철 기자 2024. 4. 30.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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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회>

이연수 작가의 장편소설 ‘도림천 연가’는 1980년대 서울대생들의 이야기다. 성식이라는 서울대 82학번을 통해 당시 젊은이들의 문화, 운동권 정서 그리고 사랑을 솔직하게 담았다. 도림천은 서울대 앞을 지나 안양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 “등꽃이 피면 여기 오자

이 소설의 기본적인 뼈대는 성식과 미현이라는 캠퍼스 커플의 사랑 이야기다. 이 커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정신착란’과도 같은 첫사랑 이야기가 가슴 저리면서도 애틋하게 담겨 있다.

성식은 여자애가 먼저 웃고 인사하며 호감을 표현하는 것이 좋지만 ‘또 한편으로는 변변히 먼저 말 한번 못 붙여보는’ 숙맥이다. 미현의 적극적인 대시로 둘은 ‘만나는 사이’로 발전한다. 여자친구가 싸우고 눈길을 주지 않자 안달하는 모습, 헤어지기 싫어서 버스 두 대를 그냥 보내고 세번째 버스가 오자 따라타는 장면, 아침 일찍 도서관에 도착해 여자친구 자리 잡아주고 밤까지 같이 공부하는 장면 등이 일기장을 옮겨놓은듯 생생하다. 이런 둘이 말다툼을 벌인 다음 다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에 등꽃이 피어 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미현이 갈 만한 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건물도 몇 채 되지도 않는 인문대가 그렇게 크고 넓게 느껴질 수 없었다. 30분 이상 헛되게 돌아다니다 문득 미대 조소과 앞 등꽃이 늘어진 퍼골라가 생각났다. 중간고사 기간에 미현이 말했었다. 등꽃이 피면 여기 오자. (중략)

미대 건물 앞 계단을 오르는데 별안간 가슴이 먹먹하도록 향긋한 냄새가 대기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자 퍼골라가 보였다. 주변에는 조소과 아이들의 미완성 작품들이 마치 토막 난 사체처럼 흉물스럽게 팽개쳐져 있었지만, 퍼골라를 뒤덮은 덩굴 아래에는 미현이 말했던 대로 연보라 꽃송이들이 늘어져 견딜 수 없이 향긋한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나무 벤치 위에 마르고 가냘픈 여자애가 혼자 앉아 있었다. 미현이었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활짝 핀 등꽃. 향기가 아주 좋다.

마침 요즘 등꽃이 한창이다. 등꽃은 연한 보라색 꽃이 포도송이처럼 밑으로 처지면서 달린다. 꽃 중앙부에 노란색 무늬도 인상적이다. 노란색 무늬 포인트는 칡꽃에도 있다. 등과 칡은 둘 다 콩과 식물이다. ‘갈등’이라는 말의 어원이 칡과 등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등꽃. 꽃 중앙부에 노란색 무늬가 있다.

등나무는 대부분 학교·공원 등에 그늘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심지만 중부 이남의 산과 들에서 저절로 자라는 자생식물이기도 하다. 고속도로 근처에도 산사태 방지를 위해 심어놓은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꽃에서 나는 향기도 좋다. 꽃이 지고나면 부드러운 털로 덮인 꼬투리가 주렁주렁 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식은 만날수록 커지는 미현에 대한 욕망이 부끄러워 먼저 밀쳐내고, 미현은 성식과 만나면서 ‘교문에서 저렇게 애들이 투쟁하는데’ ‘우린 그저 데카당한 즐거움에 빠져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 힘들어한다. 결국 성식은 입대하고 미현은 운동권 언저리를 맴돌면서 둘은 일단 헤어진다.

◇애기사과꽃이라 의심하지 않았던 겹벚꽃

이 소설은 또 당시 철없는 서울대생들의 무지와 허세, 부채의식, 운동권의 위선에도 가차 없는 시선을 던지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는 서울대생들이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여전히 정신적 미숙아들이었다. ‘공부만 하느라 정신적으로 뒤늦은 사춘기를 맞이한 아이들’이었다. 운동권 선배들은 그 틈을 파고들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 아는 것처럼 후배들을 홀린다.

가령 선배들은 ‘제국주의’나 ‘친일’이라는 낱말로 세상일에 명쾌하고 단순한 해법을 제시했다. ‘세상일에 의문을 가질 기회조차 없던 우리에게 그 만능 해답은 매혹적이었다.’ ‘나는 이제 비로소 눈가리개를 벗고, 기성세대들이 늘어뜨린 장막을 헤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미숙함과 젊음, 그리고 억눌린 욕망들이 여전히 내 눈을 흐리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작가는 당시 ‘세상이 우리가 믿는 대로 돌아가는 줄 알았’던 서울대생들의 미숙함을 애기사과꽃(겹벚꽃) 일화로 표현하고 있다. 성식과 미현이 처음 입을 맞춘 곳에 있는 꽃이었다.

<나는 승준과 함께 깡통식당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나갔다. 저만치 높은 곳 약대 쪽 양지 바른 곳에 분홍색 꽃들이 햇살 아래 구름처럼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나는 가슴 한 켠이 시려 오는 걸 감추려 짐짓 입을 열었다.

“아, 벌써 애기사과꽃이 저렇게 피었네.”

승준이 피식 웃었다.

“애기사과? 그건 또 뭐야? 저거 겹벚꽃이야. (중략)”

학교를 다니는 내내 애기사과꽃인 줄 알았던 그 꽃이 겹벚꽃이라는 전혀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는 걸 쉬이 믿기 어려웠다. 신입생이던 내게 그게 애기사과꽃이라고 말했던 건 아마 기타서클의 선배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애기사과라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면서도 나는 그 말을 고스란히 그대로 받아들였다. 꽃이 지고 잎이 푸르러지면 나는 꽃을 잊었다. 꽃이 지고 나면 열매가 맺힌다는 것도 잊었다. 그게 애기사과꽃이든 능금꽃이든 벚꽃이든 어차피 그 꽃이름들의 관념만 받아들인 채 한 번도 열매를 확인해보지 않았다.>

겹벚꽃.

선배들에게 들은 얘기 중 겹벚꽃과 같은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겹벚꽃은 다른 벚꽃이 질 즈음, 4월 중순쯤 피는 꽃이다. 벚꽃이 다 지는 것이 아쉬운 사람들을 위한 꽃 같다. 수도권의 경우 서울 정독도서관,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과천 서울대공원 동물원 등이 겹벚꽃 명소로 알려져 있다. 겹벚나무는 산벚나무를 육종해서 만든 품종이라고 한다. 겹꽃은 수술 등 꽃술이 꽃잎으로 변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부분 열매를 맺지 못한다. 애기사과꽃이라는 꽃은 없는데 작은 사과 같은 열매가 달리는 꽃사과나무 꽃을 가리키는 것 아닌가 싶다.

소설은 그 시절 어렴풋이나마 느꼈지만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지나친 문제들을 놀라운 기억력으로 끄집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정확한 논리로 분석해놓아 감탄하면서 읽었다. 지난 총선 때 86 운동권 청산은 여당 선거 구호 중 하나였다. 거기에 동의하든 않든,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보낸 사람들, 80년대 학생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정말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을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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