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급감을 정치·경제적 진화의 분기점으로 삼자 [왜냐면]

한겨레 2024. 4. 29.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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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갈무리

서원희 | 행정학 박사

지난해 말 ‘한국은 소멸하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뉴욕타임스 칼럼은 “한국의 합계출산율 감소(2023년 기준 0.72명)가 유럽의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에 몰고 온 인구감소를 능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칼럼의 제목 자체가 주는 어휘적 뉘앙스처럼, 유럽 사회에서 20세기 1·2차 세계 대전보다 인구감소의 충격이 더 컸던 흑사병 수준의 인구학적 재앙이 한국 사회가 직면한 현실임을상기시켜 줬다. 입시경쟁과 남녀 대립, 인터넷에 빠진 젊은 청년층 등 한국 인구감소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자는칼럼니스트의 논리는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과연 인구감소가 필연적으로 그 국가의 비관적 미래를 결정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축소되는 세계’의 저자 앨런 말라흐는 “이제 세계는 성장의 시대에서 축소의 시대로 변화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인구도, 경제도, 세계도 축소하는 새로운 시대사적 흐름이 온 것이다. 물론 인구는 한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가늠하는 중요 지표다. 그러나 인구감소의 시대사적 맥락은 다르다. 앨런 말라흐는 “감소한 인구가 기후변화, 기술혁신 등의 다양한 미래의 위험과 기회를 어떻게 대처하고 생존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쓴 대런 애스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급감은 유럽의 정치·경제적 균형을 뒤흔든 결정적 분기점”이었다며 “인구 급감이 미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에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4세기 영국은 흑사병으로 인해 인구의 절반이 감소했다. 당시 피지배계층이자 노동계급인 농노들이 귀해지면서 이들의 권리 향상을 위한 제도가 마련됐다. 농노들이 거주 이전의 자유와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면서 경제적 지위가 향상됐고, 이는 1688년 정치적으로 명예혁명, 경제적으로는 1780년 산업혁명으로 나아가는 사회적 기반이 됐다. 그 결과, 영국이 세계적 패권국가가 되는 길을 걷게 됐다. 그러나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감한 유럽의 모든 나라가 도약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다. 동유럽의 봉건영주들은 인구감소로 줄어든 농노의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수탈 체계를 강화하면서 서유럽의 번영과 다른 길을 가게 됐다.

그렇다면 흑사병 이후 인구 급감의 충격을 받은 영국이 전화위복으로 정치·경제적 진보를 만들 수 있었던 토대는 무엇이었을까? 애스모글루와 로빈슨은 “포용적 제도의 힘”이라고 답한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는 인구 급감을 계기로 소수 특권 계층에게만 기회를 주던 사회에서 누구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와 유인을 제공하는 사회로 전환을 이뤄냈다. 반면에 기존의 특권층이 다수를 착취하는 제도를 고수한 동유럽은 변방의 길로 가게 됐다. 즉, 정치·경제의 공정성과 평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선회한 것이 영국 등 서유럽이 번영의 길로 가는 시대적 흐름을 만든 것이다.

제도적 분기점이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동아시아도 마찬가지다. 19세기 일본, 중국, 한국은 모두 절대왕정 국가였다. 20세기 초 일본의 도약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산업화’라는 세계사적 흐름에 발 빠르게 편입한 결과였다. 일본은 봉건제도를 혁파하고 정치·경제제도를 개혁하면서군수 사업을 육성했다. 반면에 한국은 쇄국정책으로 근대화가 지체됐고, 중국은 1842년 아편전쟁 이후 독자적 근대화의 추진 동력을 상실했다.

그러면 21세기 유럽과 일본 등 선진국은 인구 급감의 시대적 흐름에 어떻게 대비하고 있을까? 독일은 2005년 이민법을 제정해 직종과 관계없이 이민 문호를 개방했다. 일본은 2016년 외국인에게 부당한 차별적 언동 해소 대책에 관한 법률인 ‘헤이트 스피치 해소법’을 제정하여 외국인 혐오 표현을 규제하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없는 정치·경제·사회적 제도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한국도 2007년 ‘재한 외국인 처우 기본법’, 2008년 ‘다문화 가족 지원법’ 등을 제정하면서 포용적 사회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꾸준히 다져오고 있다. 그러나 제도 마련 이후에도 외국인과 자국민을 평등한 대우가 적절한지 여부에 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2024년 이민관리청 신설을 담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한국 사회의 포용적 제도 진전에 결정적 분기점이 될지가 중요하다. 한국은 인구 급감이 예견되는 시기에 있다. 그러나 ‘한국은 소멸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한국은 진화하고 있는가’에 대해 자문해야 한다. 축소 지향의 시대에 인구 급감이 진화와 발전을 위한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은 경제적 양극화를 극복하고 다문화를 수용하고 포퓰리즘과 결합한 양극화된 정치 갈등을 어떻게 포용적 제도로 담아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역사는 필연적이지 않다. 인구가 급감한 한국의 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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