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직 변호사의 창의와 혁신] 〈18〉'제목 없음'에서 배우는 창의

2024. 4. 2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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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태평양 이상직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

모든 아버지가 그렇듯 나도 큰 기대를 안고 어린 아들에게 물었다. 자라면 무엇이 되고 싶니? 아들은 '경찰차'가 되고 싶다고 했다. 머리가 띵했다. 경찰차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틀에 갇히지 않은 다양성과 가능성이다. 필자만 해도 어린 시절에 당연히 문과를 가야했고 판검사 말고 따로 할 일이 없는 것으로 알았다. 집안 친척이나 누군가를 접할 때 그 말만 들었으니 그 틀에 갇히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고민 없이 다양성과 가능성의 문은 내게서 닫혔다. 다른 길로 갔다면 어땠을까. 두 번 사는 인생이 아니니 알 수 없다. 필자도 옛 정보통신부, KT, 법무법인 태평양 방송통신팀 등 경력을 바탕으로 일찌감치 정보통신 전문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땐 그 분야 전문성을 인정받아 좋았지만 다른 분야의 문이 나도 모르게 닫혔다.

대만의 디지털 담당 장관 탕펑은 천재 프로그래머 출신이다. 16세에 스타트업 창업을 하고 35세에 장관이 되었다. 대만 교육시스템이 너무 일찍 아이들의 쓸모를 특정 분야와 영역에 한정해 창의성을 잃게 한다고 지적했다. 사람은 자라면서 이리저리 부딪히고 학습과 경험을 통해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학교와 가정에서 원하는 직업, 용도, 쓸모를 아이들에게 강요해선 안된다. 그것은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저지르는 '가스라이팅'이다. 다양성과 가능성을 듬뿍 담은 인재를 좁디좁은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국가에겐 인재를 잃는 손실이고 개인에겐 평생의 고통이다.

그림작가 이소연 作

미술 전시회에 가면 불친절한 그림이 있다. 제목을 무제 또는 Untitled라고 붙인 작품이다. 현대미술은 어려워 제목을 보지 않으면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제목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작가가 정해준 제목이 있다면 관객이 그 제목에 구속되어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굳이 작가의 의도대로 작품을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 작가의 의도와 다르면 어떤가. 관객이 느끼는 감정으로 다르게 보면 무엇이 문제일까. 한 사람의 작가가 만든 작품이라도 모든 관객이 다른 느낌과 감흥을 얻는다면 관객 수만큼의 작품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작품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바람직한 접근법과 감상법이 아닐까.

학창시절로 돌아가 보자. 국어시간에 시, 시조, 소설을 배울 때에 선생님이 작가의 의도, 단어와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쳤다. 예를 들면 시조에서 '님'이라는 표현은 임금 또는 나라를 표현한 것이라는 판에 박힌 해석이다. 내가 느끼는 대로 다르게 해석하면 잘못된 걸까.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선 1900년대 소설가 피에르 메나르가 세르반테스의 1605년 작품 돈키호테의 언어, 문장 등 모든 면에서 똑같은 몇 장을 그대로 베껴 신작이라며 발표한다. 물론 펠리페 2세나 종교재판소의 이교도 처형 등 300년이 지난 시대에 맞지 않은 내용을 제외했다.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을 새로운 창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보르헤스의 평가는 놀랍다. 300년의 시대착오를 이용해 '독자마다 새롭고 다양한 감흥을 불러 일으켜 독서를 풍부하게' 했다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다른 새로운 명작이라고 치켜세웠다. 억지스러우나 틀을 깨는 해석이다.

옛 시조나 작품 중엔 작가를 알 수 없어 '무명씨'라고 표기한 것이 많다. 작가가 누군지 알면 그 사람의 처지와 환경에 구속되어 작품을 본다. 무명씨라고 하면 작가가 누군지 모르기에 오로지 독자가 느끼는 감흥 그대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그게 나쁜가. 독자에 따라 다양한 느낌과 감흥을 가질 수 있으니 좋은 작품이 아닐까.

제목없음(무제, Untitled)이라고 제목 아닌 제목을 붙이면 관객이 오직 자신의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하고 감흥을 느낄 수 있다. 창의적 사고의 틀을 제공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법무법인 태평양 이상직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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