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국의 심심(心心)파적 <53>] '신체적·심리적 배설 이뤄지는 은밀한 공간' 화장실의 심리학

김진국 문화평론가 2024. 4. 2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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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심리적 배설이 이뤄지는 화장실은 깨끗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편안한 안락감과 더불어 안전한 공간이라는 확신을 줘야 한다. 사진 셔터스톡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젊은 세대는 수세식 변기의 등장이라는 혁명적 변화가 그다지 와닿지 않을 것이다. 재래식 화장실은 냄새와 비위생성으로 인해 기성세대에게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구시대 유물 중 하나다. 수세식 변기가 처음 발명된 것은 훨씬 이전의 일이었지만, 오늘날과 같은 현대식 화장실이 만들어진 것은 19세기 중반 미국의 한 호텔이 처음이었다. 우리나라에 수세식 변기가 들어온 것은 일본제국주의 시절 세워진 조선호텔(1914년)과 반도호텔(1936년)이 처음이라고 한다. 일반에 수세식 변기가 보급된 것은 1970년대 이후의 일이다.

한국 대학가에 수세식 변기가 설치된 것은아마도 고려대가 가장 먼저일 것이다. 1934년 신축된 고려대 본관은 웅장한 고딕 양식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호화로운 내부 인테리어 때문에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특히 한 층에 두 개씩 모두 여섯 개나 되는 수세식 화장실이 유명했는데, 화장실 내벽을 전부 고급 백색 타일로 장식하고, 실내를 5~6개의 거울과 번쩍이는 세면기로 장식했다고 한다.

고려대 본관은 지금은 총장실을 비롯한 행정 시설로 사용되지만, 설립 이후 오랫동안 실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이뤄졌기 때문에 이 수세식 화장실을 기억하는 졸업생이 많다. 1960년대 고려대를 입학한 K가 훗날 고려대 총장이 됐다. 그가 총장이 되어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이 학교 전체의 화장실을 수세식 변기로 바꾸는 일이었다. 업무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수세식 변기의 설치는 최우선 과제였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고려대 화장실이 대학가에서는 최초로 전부 수세식으로 바뀌면서 면모를 일신한 것은 K 총장 덕분임은 분명해 보인다.

김진국 문화평론가,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K 총장이 고려대 총장을 마치고 다른 대학의 총장으로 부임한 직후의 일이다. 어느 날 새벽 아직 잠도 깨기 전인 여명에 K 총장은 보직 교수 몇 명을 시내 모 호텔로 호출한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눈을 비비고 일어난 교수들은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는지 의아해하며 그 호텔에 모였다. 교수들이 모두 모이자마자 K 총장은 그들을 호텔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뭐가 느껴지는 게 없는지 물었다. 아직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껌뻑하는 보직 교수들에게 K 총장은 짜증을 냈다. “아니 이 호텔의 깨끗하고 품격 있는 화장실 인테리어가 당신들 눈에는 안 보인다는 거요?” 꼭두새벽에 시내 호텔로 불려 왔던 보직 교수들은 아침밥도 못 얻어먹고 쫓겨나듯 그대로 호텔 문을 나서야 했다.

그 이후 그 대학의 화장실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수소문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전해주는 그 대학에 교수로 재직 중인 이들과 K 총장의 심리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기억은 난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K 총장은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전형적인 항문기 성격(anal character)이구먼! 하하.”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다른 교수들은 ‘항문기 성격’이 뭐냐고 물었다.

정신분석학의 비조(鼻祖)인 프로이트는 환자들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유년기 경험이 그 사람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동의 발달 과정에 관심을 갖게 됐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아는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의 젖꼭지를 빨면서 쾌감을 경험한다. 좀 더 자라면 배변 훈련을 받으면서 항문이 주요 관심사가 된다. 그다음에는 성기로 관심이 옮겨간다. 이렇게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잠복기, 성기기순으로 분류하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심리 성적 발달 이론(theory of psychosexual development)이라고 한다.

예컨대 생후 1세 반에서 3세까지의 시기인 항문기에 사람들은 배변 훈련을 받는다. 이때 부모나 보호자를 통해 적절한 배변 훈련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은 독립적이고 자기주장적이며 협동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 시기 배변 훈련이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느슨하면, 아동의 배설 욕구가 과도하게만족되거나 혹은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 아동은 완벽주의적이고 완고하며 엄격한 성격을 갖게 된다. 또한 청결과 질서에 집착하며 인색한 성격을 갖게 된다. 이러한 성격을 프로이트는 항문기 성격이라고 한다. K 총장이 전형적인 항문기 성격에 해당한다. 어쨌거나 K 총장의 이러한 선구적인(?) 혜안에 힘입어, 많은 대학이 화장실 개수에 나서면서 한국 대학가의 화장실 문화가 고급화된 것은 사실이다.

인류학적·정신의학적 의미가 뒤섞인 복합 문화공간, 화장실

화장실은 신체적, 심리적 배설이 동시에 이뤄지는 은밀한 사적 공간이다. 우리는 소변과 대변이라고 하는 소화 과정에서 생기는 최종 찌꺼기를 화장실에 배출한다. 동시에 수세식 화장실이 보편화된 요즘에는 화장실이 단순한 신체적 배설뿐만이 아니라, 화장실에 앉아 각종 독서와 동영상 시청, 하루 일정을 수립하거나 지나온 하루를 되돌아보는 심리적인 배설이 이뤄지는 경우도 많다.

옛날 공중화장실에는 각종 낙서가 만연해 관리자들이 골머리를 앓는 경우가 많았다. 공중화장실에 일을 보러온 사람들이 용변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화장실 벽은 온갖 음담패설이 담긴 욕설로 가득했다. 정치를 비판하거나, 세태를 풍자하는 온갖 낙서가 화장실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화장실이 신체적 배설과 더불어 심리적 배설이 동시에 이뤄지는 곳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잘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명과 모바일 보급이 이뤄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만연했던 화장실 낙서는 싹 사라졌다. 예전에는 신체적인 배설과 동시에 이뤄지던 심리적 배설의 수단이 낙서였다면, 지금은 모바일을 통한 자기주장, 댓글 달기 등으로 배설의 통로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대학가에 유행하던 대자보가 사라진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내 얘기에 귀 기울여 달라, 내 말 좀 들어달라는 애타는 호소가 낙서나 대자보 등의 오프라인을 통하지 않고도 가능한 온라인상의 경로가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체적, 심리적 배설이 이뤄지는 화장실이 깨끗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한 사람들에게 편안한 안락감과 더불어 안전한 공간이라는 확신을 줘야 한다. 여러 해 전의 일이다. 당시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 가족이 시애틀을 방문한 적이 있다. 시애틀에는 보잉 항공사나 마이크로소프트(MS) 본사, 아마존 본사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스타벅스 본사와 1호점도 시애틀 시내에 있다. 스타벅스 커피의 가공 및 생산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형 팩토리형 카페도 있다.

그날 그 카페의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던 내 딸은 잠시 후 얼굴이 사색이 되어 나타났다. 별다른 생각 없이 쑥 들어간 화장실에는 덩치 큰 각종 인종의 남성들이 우글우글했던 것이다. 이름은 성 중립(gender-neutral) 화장실 혹은 모든 성을 위한(all-gender) 화장실이었지만, 남녀 구별 없이 아무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남녀 공용 화장실이었다. 내 딸은 집 안에서 화장실에 갈 때는 화장실 문을 닫기만 할 뿐 잠그지도 않고 일을 본다. 하지만 공중화장실에서 일을 보는 것에는 극히 민감해 어지간하면 공중화장실 사용을 꺼린다. 많은 여성이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남성들의 경우에도 공중화장실 소변기에서 일을 볼 때 사람들이 많은 경우, 소변을 보는 데 병적인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더구나 여성들이나 다른 성적인 지향성을 가진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화장실에서 편하게 소변을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물며 일반 여성들이 건장한 남성들이 우글거리는 대형 공중화장실에서 편한 마음으로 일을 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더구나 2016년 5월 어느날 새벽, 강남 서초동의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한 남성이 불특정 여성을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일어난 이후에 여성들에게 남녀 공용 화장실의 안전 확보는 더욱더 중요한 사안이 됐다. 화장실은 단순한 배설 공간의 하나가 아니다. 인류학적, 정신의학적 의미가 뒤섞인 복합 문화 공간이다. 건강한 배설을 위한 남녀 공용 화장실의 쾌적함과 안전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화장실 존립의 필요충분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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