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버몬트] 탈출한 '사운드 오브 뮤직' 7남매가 정착한 땅
버몬트Vermont. 문득 들으면 추억의 오렌지 주스 델몬트와 헷갈린다. 다만 이미지는 정반대다. 델몬트는 따뜻한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기업이지만, 미 북동부에 위치한 버몬트는 캐나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추운 지방이다.
버몬트는 영어로 '그린마운틴'이라고도 불린다. 프랑스어로 Ver은 '그린', Mont는 '산'을 의미한다. 문자 그대로 산을 지나고 구릉을 넘는 길 옆으로 형성된 작은 촌락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산과 산 사이 자리 잡은 작은 평지에는 목장이 조성되어 있다. 미국에서 유럽의 농촌과 가장 비슷한 환경을 지닌 곳이다.
유럽에서 버몬트로 처음 이주한 자들은 프랑스인들이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모피 사냥과 인디언과의 교역을 위해 이곳으로 왔다. 여러 동물을 사냥했는데, 특히 비버를 잡기 위해서 수로를 따라 다니곤 했다. 이곳 버몬트와 북부 지역은 오대호로 이어지는 수로가 실핏줄처럼 뻗어 있다.
프랑스 사냥꾼들은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그렇기에 미 대륙 구석구석을 다닐 수 있었고 그 당시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인디언과 교역을 통해 많은 부를 얻었다. 인디언은 그들의 동업자였고 사업이 더 번창할 수 있게 도와 준 후원자였다.
반면 영국인들은 사냥보다 농장을 일구려고 했다. 점점 주민들이 늘어나자 영토 확장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이미 프랑스인들이 진출해 있는 버몬트, 오대호 연안, 그리고 미시시피 너머 서쪽 지역에 눈독을 들이게 됐다. 땅을 얻기 위해 프랑스와 전쟁이 불가피해졌고 그렇게 생존을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거주지를 아예 점유하려 드는 영국인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프랑스도 부를 가져다주는 이 지역을 순순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해관계가 맞아 프랑스와 인디언 동맹이 탄생했고 영국과 식민지 쟁탈을 위한 전쟁이 벌어졌다. 영화 '라스트 모히칸'이 이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1689년 제 1차 전쟁 '윌리엄 왕의 전쟁'을 시작으로 제 2차, 3차 전쟁이 이어졌다. 마지막 제4차는 '프렌치-인디언 전쟁'이란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 전쟁에서 결국 영국 식민지 연합이 승리를 거뒀다.
이 승리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먼저 이로 인해 영국 식민지 연합은 미 대륙 전체의 통제권을 얻었다. 또한 뉴잉글랜드(버몬트, 메인,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식민지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왜냐하면 4차 전쟁 시기 영국 본국이 식민지 연합을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국 입장에선 식민지 연합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식민지 사람들만의 힘으로 프랑스-인디언 동맹을 깨부순 것. 이로써 식민지 자체적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 자신감은 추후 미국이 독립전쟁을 일으킬 수 있게 만드는 결정적 원동력이 된다.
비록 프랑스가 패했지만 여전히 그 유산은 남아 있다. 현지 사람들은 이곳을 버몬트Vermont 라고 쓰고 프랑스어 발음인 버마운Vermawn이라고 읽는다.
챔플레인호수에 괴물이 산다?
버몬트의 대표적인 명소로는 챔플레인호수Lake Champlain가 있다. 서쪽으로 뉴욕 주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약 200km 길이로 평균 수심은 20m 정도의 거대한 호수다.
주민들은 챔플레인호수에 네스호처럼 괴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괴물이 처음 목격됐다고 기록된 것은 1609년 프랑스 탐험가 새무얼 챔플레인Samuel Champlain에 의해서다. 조상 대대로 이곳에 살고 있던 인디언 부족들에게도 호수에 커다란 용머리 모양의 뱀같이 생긴 괴수가 살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 이후로 400번 이상 괴물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전해진다. 1984년에는 58명이 동시에 목격했다고 한다.
괴물은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관광 자원이 됐다. 여름이면 혹시 괴생명체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학자들은 목격담을 종합해 생명체가 있다면 이것은 아마도 고래의 조상격인 플리지오사로우스Plesiosaurs라고 추정한다. 사람들은 이 괴물에게 챔프Champ라는 애칭을 주었다. 그리고 해마다 챔프 축제가 열린다. 호수가 바다만큼 넓다. 믿겨지지 않을 어떤 생명체가 존재할 것만 같다.
버몬트는 아웃도어의 천국이다. 계절마다 색깔이 선명한 곳이다. 특히 가을의 단풍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산을 덮고 있는 단풍나무들이 붉은색을 토해낸다. 뉴잉글랜드 모든 지역의 가을날이 아름답지만 버몬트의 색깔은 더 짙다. 이곳은 98%가 산이다.
겨울은 스키의 계절이다. 20개의 스키 리조트가 있다. 리조트마다 적어도 100개 이상의 코스가 있다. 2,000개가 넘는 슬로프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도 분주하지가 않다.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30개가 넘는 크로스 스키장이 있다.
버몬트의 겨울은 혹독하다. 1년에 눈 오는 날이 50일이 넘는다. 기온은 영하 20℃까지 떨어진다. 겨울을 잘 대비하지 못하면 큰 곤란을 겪기도 한다. 겨울은 11월부터 시작된다. 이듬해 4월까지 눈이 녹지 않아 스키를 즐길 수 있다. 낮은 기온은 질 좋은 눈을 만들어 준다. 스키어들은 분말처럼 부서지는 눈을 가르며 나아간다. 즐거움은 배가 된다.
스키의 메카는 스토우Stowe다. 이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많은 스키장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은 스노보드를 대중적 스포츠로 만들어 낸 제이크 버튼Jake Burton이 일생을 살았던 곳이다. 스노보드는 탐 심스Tom Sims라는 사람이 처음 개발했고 이를 보급시킨 것은 제이크 버튼이다. 스토우 마운틴 리조트에는 제이크 버튼을 기리는 '제이크 라이드Jake's Ride' 라는 코스가 있다. 제이크는 2019년 암으로 사망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 일가가 만든 휴양지
버몬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산과 언덕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과 목장들이다. 스위스의 농촌 풍경과 흡사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트라프 가족Trapp Family이 이곳에 정착했다. 트라프 가족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도래미송을 부르던 7남매와 그들의 아버지 조지 본 트라프를 말한다.
트라프 가족이 스토우에 정착한 것은 1940년 초반이다. 영화에서 그렇듯이 아버지 트라프 장교는 나치 독일이 싫어 오스트리아를 떠난다. 영화는 알프스 산맥을 넘는 장면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기차를 타고 폴란드를 통해 탈출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들 가족은 공연단 'Trapp Family Singers'을 결성해 미 전역을 다니게 되었고 많은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의 원본은 1949년 가정교사 마리아가 쓴 자전적 소설이다. 이것이 1959년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1965년 할리우드 영화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트라프 가족은 스토우에 정착해 유럽풍의 산장을 만들었다. 숙박 사업은 번창했고 산장은 더 크게 만들어졌다. 산 중턱에 넓은 대지에 지어진 산장은 스토우마을과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조망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객실이 100여 개 넘는 휴양지 단지로 조성되어 있다. 결혼식도 열리고 각종 행사도 개최된다. 스토우를 찾는 방문객들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내부에는 트라프 가족의 역사를 기록한 삽화와 기록물이 벽에 전시되어 있다. 방문객들은 식사를 즐길 수 있으며, 특히 이곳에서 제공되는 생맥주는 아주 감미롭고 상쾌하다. 산장에서 보는 풍경은 유럽 스위스에 비할 만큼 아름답다. 특히 가을 단풍철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2014년 둘째 딸 마리아가 향년 99세로 사망하면서 1세대 트라프 가족은 모두 사라졌다. 영화 속 노래를 가르치던 가정교사 마리아는 1987년 사망했다.
목가적인 이미지에 맞게 이곳에는 젖소 목장들이 많다. 텍사스나 네브래스카처럼 목동들이 소떼를 모는 대규모 농장은 아니다. 가족끼리 운영하는 작은 규모다. 버몬트의 우유 생산량은 미국 전국의 1%밖에 안 된다. 그렇지만 버몬트 수출품의 50%가 유제품일 정도로 낙농업은 비중이 큰 산업이다. 버몬트의 인구는 60만 명, 소 사육 두수는 25만 마리 정도로 추산된다.
버몬트의 낙농업을 돕는 기업은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한 '벤&제리Ben&Jerry'다. 벤&제리는 버몬트에서 생산되는 우유로 아이스크림을 만든다. 반드시 항생제를 맞지 않은 소에서 생산된 우유만을 사용한다. 아이스크림 용기에 젖소 이미지를 넣은 것도 소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의미다. 물은 버몬트의 천연지하수만 사용한다. 벤&제리는 현재 100여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있으며 전 세계 36개국으로 수출한다.
창업자 벤 코헨Ben Cohen과 제리 그린필드Jerry Greenfield는 중학교 동창생이다. 두 동업자는 처음에 뉴욕 맨해튼에서 베이글 가게를 시작했다. 그러나 베이글 기계 비용이 비싼 관계로 사업을 접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창업하게 된다. 이곳 버몬트의 폐쇄된 주유소를 개조해 아이스크림 가게를 처음으로 열었다.
1977년 당시 그들의 창업자금은 1만2,000달러. 1인당 4,000달러씩 투자했고 4,000달러는 융자받은 것이다. 겨울이면 혹독하게 춥고 여름에도 서늘한 이곳에 아이스크림 사업을 시작한 것이 아이러니하다. 이들은 매년 이익금의 7.5%를 비영리단체를 통해 사회에 환원했다. 천연재료를 사용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벤&제리는 요즘 말하는 ESG 기업의 원조 격이다. 그래서일까. 2021년 미국 내 매출이 9억3,600만 달러에 달한다.
흥미로운 건 공동 창업자인 벤이 냄새를 맡지 못하는 질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 식품 기업인에게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것은 치명적인 단점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호재로 작용했다. 맛이 잘 느껴지지 않으니 아이스크림에 더 강렬한 맛과 질감을 넣으려고 했고 이것이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벤&제리 아이스크림 공장을 방문하면 먹고 싶은 맛을 골라 맛 볼 수 있다. 물론 공짜다.
무신론자 비율 가장 높고, 범죄율 가장 낮다
버몬트를 이야기할 때, 메이플 시럽Maple Syrup을 빼 놓을 수 없다. 단풍나무 수액에서 만들어 내는 시럽은 이곳의 특산물이다. 미국인들의 메이플 시럽 사랑은 유난스럽다. 아침에 팬케이크에 메이플 시럽을 듬뿍 뿌려 먹는다. 버몬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 제공하는 시럽은 인공감미료가 첨가된 것으로 단맛이 매우 강하다. 반면 버몬트 것은 100% 메이플 시럽으로 자극적이지 않은 달콤함이 있다. 한 번 맛보면 또 먹고 싶은 그런 맛이다.
단풍나무 수액은 매년 2~4월 사이 채취한다고 한다. 채취 방식은 지리산에서 볼 수 있는 고로쇠 수액 받는 방식과 비슷하다. 나무의 2m 정도 높이에 구멍을 내고 파이프 호스를 넣는다. 단풍나무 수액이 호스를 따라 흐른다. 호스 안에서 수액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공기 압력을 넣어주는 호스도 함께 설치된다. 수액이 모아지면 끓인다. 약 1만2,000갤런의 수액을 증발시켜서 200갤런의 시럽을 얻는다고 한다.
버몬트를 대표하는 것이 메이플시럽이다. 인접한 뉴욕주보다 2배 넘는 생산량을 자랑한다. 낮에는 영상의 기온이 유지되고, 밤에는 영하로 내려갈 때 단풍나무는 많은 수액을 내어 준다고 한다.
서늘한 기후가 가져다주는 장점은 사과 농사가 잘 된다는 것이다. 뉴잉글랜드 지역은 당도 높은 사과가 생산된다. 버몬트는 사과를 이용해 만들어 내는 사과 도넛이 유명하다. 도넛 반죽에 사과주를 넣고 기름에 튀겨낸다. 일반 도넛에 비교하면 사과향이 퍼지면서 특별한 맛이 난다.
버몬트 사람들은 거친 환경을 극복하며 살고 있다. 어느 미국에서나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자가 차량은 필수다. 버몬트에서는 5명 중에 3명은 스바루Subaru를 탄다고 한다. 스바루는 일본의 후지 중공업에서 만드는 차량이다. 사륜 구동으로 눈 덮인 언덕 지형과 진흙이 많은 곳에 적격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레저 활동을 위한 장비를 넣고 다니기에도 좋다고 하니 버몬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다. 서부로 인식되는 텍사스, 와이오밍, 유타 같은 곳에서는 포드에서 만들어내는 픽업트럭 F-150이 가장 인기가 좋다.
버몬트 사람들의 특징은 자유분방하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정치인 버니 샌더스가 무소속 또는 민주사회주의자로서 버몬트 연방 상원의원에 8선을 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 예이다. 임기가 6년이니 버니 샌더스는 무려 48년간 상원의원을 하고 있다.
버몬트는 미국 내에서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며 범죄율이 가장 낮은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텍사스나 앨라배마 같은 곳은 종교인의 비중이 가장 높은데 범죄율도 가장 높다.
버몬트에는 1990년대 중반까지 월마트가 진출할 수 없었다. 대형 마트가 소상공인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버니 샌더스가 적극적으로 막았었다고 한다. 자유를 중시하는 주답게 미국에서 동성결혼을 최초로 합법화했다. 버몬트는 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그러나 사계절 언제 들러도 볼 것도 많고, 할 것도 많고, 먹거리 재미도 많은 곳이다.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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