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9일!] "중국 아닌 조선인?"… 전세계 놀래킨 폭탄 투척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가니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는 윤봉길 의사가 1929년 일기에 남긴 글이다.
━
얼마 전 있었던 이봉창의 암살 시도로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군은 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 외에는 반입을 금지했다. 이에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한 특수 폭탄을 준비했다. 하지만 의거 당시에는 물통 폭탄만을 사용했다.
이와 관련해 여러가지 설이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이었지만 불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난 2014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조카인 윤주 매헌기념관 관장이 공개한 경성지방검찰청의 신문 조사 내용에 따르면 두 폭탄 모두 던지려고 했지만 상황을 보니 도저히 2개를 던질 여유가 없었고 물통 모양 폭탄에 끈이 있어서 던지기 쉽다고 생각해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진 것이다.
감시망을 피해 홍커우 공원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는 일본어를 구사하며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했다. 그는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묵념을 하는 순간을 노렸다. 이때 윤봉길 의사는 단상으로 접근해 물통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시라카와 대장과 노무라 중장 사이에 떨어져 폭발했다.
이 사건으로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가 폭사했다. 중화민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우에다 중장은 왼쪽 다리를 잃었으며 노무라 중장은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이 외에도 많은 주요 인사가 부상을 입었다.
━
같은해 12월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윤봉길 의사의 사형이 집행됐다. 정사수가 쏜 총알이 미간에 명중했고 윤봉길 의사는 그로부터 13분 뒤 사망했다. 향년 24세. 그야말로 짧고 굵은 생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사형은 폭탄 투척 당시 중상을 입고 숨진 시라카와 장군의 세력 근거지에서 집행됐다. 일본군은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계단 밑에 묻었다. 그를 밟으며 가라는 의미였다.
윤봉길 의사는 폭탄 투척을 앞두고 자신이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백범 김구 선생과의 마지막 조찬 자리에서 자신이 새로 산 회중시계를 백범에게 주고 그의 낡은 회중시계를 품에 간직했다.
━
이 사건은 중국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는 계기가 됐다.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소식을 듣고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 해내다니 대단하다"며 감탄했다. 이후 중국 영토 내에서 조선인들의 항일 무장투쟁의 여건이 좋아졌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일본의 탄압이 계속되자 백범은 외신을 통해 의거를 모두 자신이 주도했다고 밝혔다. 일본은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의 배후인 백범을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 20만원을 걸고 그를 수배했다. 하지만 검거에 실패하자 외무성·조선총독부·상하이주둔사령부 등과 함께 현상금을 대폭 올려 현재로 환산하면 198억원에 이르는 60만원의 거금을 현상금으로 내걸었다.
그럼에도 백범을 체포하는 데 실패하자 백범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계속됐다. 결국 백범은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했다.
김가현 기자 rkdkgudjs@mt.co.kr
Copyright © 머니S & moneys.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여자끼리 데이트" 신애라, 딸과 행복한 시간 - 머니S
- "강원래 다리 아들에 유전 안됐길"… 악플에 김송 '분노' - 머니S
- 역대 최고 실적 내고 '퇴출'… 아워홈 구지은의 고난 - 머니S
- "무순위 청약 할래"… 당첨만 되면 시세차익 수억 - 머니S
- [S리포트] [르포] 입주 3개월 지나도 '유령 신도시' - 머니S
- "서주원 불륜"… 상간 소송 제기한 아옳이 패소 이유는 - 머니S
- 박보검, 비주얼 남신이 작정하고 꾸미니…'포스 작렬' - 머니S
- [오늘날씨] 출근길 우산 챙기세요… 전국에 비 소식 - 머니S
- '알레르기 비염·기능성 소화불량' 한방 첩약, 오늘부터 건강보험 적용 - 머니S
- 국내 시장 포화인데… 안마의자社, 해외진출·사업다각화 가시밭길 - 머니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