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9일!] "중국 아닌 조선인?"… 전세계 놀래킨 폭탄 투척

김가현 기자 2024. 4. 29. 07:1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역사 속 오늘] 윤봉길 상하이 폭탄 의거
윤봉길이 일제강점기 시절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제국 주요 인사들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사진은 윤봉길 홍커우 공원 의거 전 선서 장면. /사진= 독립기념관
1932년 4월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이 터졌다.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이다. 일명 '상하이 폭탄 의거'로 불리는 이날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일본 제국의 주요 인사들이 사망했다. 이 폭탄에는 식민지에서 벗어나 조국을 되찾겠다는 윤봉길 의사의 의지가 담겼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가니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는 윤봉길 의사가 1929년 일기에 남긴 글이다.



독립 운동의 의지가 담긴 '물통 폭탄'


윤봉길은 도시락 모양, 물통 모양의 두 폭탄을 준비했으나 물통 폭탄 만을 사용했다. 이와 관련해 여러 의견이 제기된다. 사진은 윤봉길이 홍커우 공원에서 소지한 도시락 폭탄. /사진= 독립기념관
일본 제국은 이날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와 동시에 일본의 천황이었던 쇼와 덴노 탄생 기념 행사를 가졌다.

얼마 전 있었던 이봉창의 암살 시도로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군은 기념식장에 물통과 도시락 외에는 반입을 금지했다. 이에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한 특수 폭탄을 준비했다. 하지만 의거 당시에는 물통 폭탄만을 사용했다.

이와 관련해 여러가지 설이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이었지만 불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난 2014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조카인 윤주 매헌기념관 관장이 공개한 경성지방검찰청의 신문 조사 내용에 따르면 두 폭탄 모두 던지려고 했지만 상황을 보니 도저히 2개를 던질 여유가 없었고 물통 모양 폭탄에 끈이 있어서 던지기 쉽다고 생각해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진 것이다.

감시망을 피해 홍커우 공원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는 일본어를 구사하며 일본인으로 신분을 위장했다. 그는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묵념을 하는 순간을 노렸다. 이때 윤봉길 의사는 단상으로 접근해 물통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시라카와 대장과 노무라 중장 사이에 떨어져 폭발했다.

이 사건으로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가 폭사했다. 중화민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우에다 중장은 왼쪽 다리를 잃었으며 노무라 중장은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이 외에도 많은 주요 인사가 부상을 입었다.



'광복'을 앞당긴 그의 희생


윤봉길 의사는 폭탄 투척 후 그 자리에서 체포돼 육군 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는 사형 집행으로 24세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폭탄 투척 의거 후 일본 경찰에게 잡혀 압송되는 윤봉길. /사진= 독립기념관
그 자리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32년 11월18일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됐다.

같은해 12월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윤봉길 의사의 사형이 집행됐다. 정사수가 쏜 총알이 미간에 명중했고 윤봉길 의사는 그로부터 13분 뒤 사망했다. 향년 24세. 그야말로 짧고 굵은 생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사형은 폭탄 투척 당시 중상을 입고 숨진 시라카와 장군의 세력 근거지에서 집행됐다. 일본군은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계단 밑에 묻었다. 그를 밟으며 가라는 의미였다.

윤봉길 의사는 폭탄 투척을 앞두고 자신이 살아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백범 김구 선생과의 마지막 조찬 자리에서 자신이 새로 산 회중시계를 백범에게 주고 그의 낡은 회중시계를 품에 간직했다.

김구 선생은 광복 이후 윤봉길 의사의 어머니를 찾아가 윤봉길 의사가 생전 사용하던 회중시계를 보여줬다. 사진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 의사 생가.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8·15 광복을 맞이한 후 백범은 윤봉길 의사의 어머니인 김원상 여사를 만나기 위해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생가를 찾았다. 백범은 윤봉길 의사와 교환했던 시계를 보여주며 "아드님 덕에 광복이 빨리 찾아왔다"고 말했다. 윤봉길 의사의 회중시계는 현재 효창공원 내 백범기념관에 전시됐다.


전 세계가 놀란 조선인 청년의 용기


독립운동가의 구심점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을 잡기 위한 일본의 압박이 이어졌다. 사진은 백범 김구 선생의 모습. /사진= 공훈전자사료관
이 일은 각국 주요 신문의 1면으로 실리며 세상에 알려졌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처음 보도됐을 당시에는 대부분 중국인이 일으킨 항일투쟁 혹은 일본인 혁명주의자의 활동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조선인 청년 윤봉길 의사의 항일운동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관심이 집중됐다.

이 사건은 중국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는 계기가 됐다.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소식을 듣고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 해내다니 대단하다"며 감탄했다. 이후 중국 영토 내에서 조선인들의 항일 무장투쟁의 여건이 좋아졌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일본의 탄압이 계속되자 백범은 외신을 통해 의거를 모두 자신이 주도했다고 밝혔다. 일본은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의 배후인 백범을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 20만원을 걸고 그를 수배했다. 하지만 검거에 실패하자 외무성·조선총독부·상하이주둔사령부 등과 함께 현상금을 대폭 올려 현재로 환산하면 198억원에 이르는 60만원의 거금을 현상금으로 내걸었다.

그럼에도 백범을 체포하는 데 실패하자 백범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계속됐다. 결국 백범은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했다.

김가현 기자 rkdkgudjs@mt.co.kr

Copyright © 머니S & moneys.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