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표 된 ‘총선용’ 민생토론회

김동인 기자 2024. 4. 29.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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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직전까지 대통령실은 ‘민생토론회’라는 형식에 집착했다. 관권 선거 논란이 일었지만 개의치 않고 각종 정책을 내밀었다. 여소야대 환경에서 관련법 개정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4월16일 인천국제공항에 설치된 TV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이 방영되고 있다. ⓒ연합뉴스

“제가 3개월 동안 이동한 거리가 서울-부산 왕복 10배가 넘는 5570㎞다.” 4월4일 윤석열 대통령은 1월4일부터 24차례 개최한 ‘민생토론회’를 자평하며 이렇게 말했다. 3개월 동안 전국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만나 민심을 경청했다는 뜻이었다.

4월10일 제22대 총선 직전까지, 대통령실은 민생토론회라는 형식에 집착했다. 각 회차마다 굵직한 정책 발표가 잇따랐다. 총 24차례 가운데 20번은 서울이 아닌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민생토론회가 끝난 이후에는, 4월2일부터 총선 전날인 4월9일까지 각종 후속조치 점검회의를 네 차례나 더 열었다. 교통 관련 정책을 언급한 GTX-A 개통식(3월29일·서울)과 고속철도 개통 20주년 기념식(4월1일·대전)을 포함하면, ‘선거를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정책 이벤트가 총선 직전까지 30번이나 마련됐다. 사흘에 한 번꼴이다.

민생토론회는 당초 각 부처의 신년 업무보고를 대체하는 기획이었다. 초반에는 경기도에 집중했다. 용인에서 소상공인 지원 정책과 물가 안정 정책을 내놓고(1차), 고양에서 재건축·재개발 정책을 발표하며(2차), 수원에서 반도체 클러스터를 떠들썩하게 홍보하는 식(3차)이었다. 의정부(6차, GTX), 성남(7~8차, IT·의료), 하남(9차, 늘봄학교)으로 이어지던 민생토론회는 2월13일 부산에서 열린 11차 토론회부터 본격적인 지역 선거 지원 이벤트로 변모했다. 대전(12차), 울산(13차), 경남 창원(14차), 충남 서산(15차), 대구(16차), 인천(18차), 강원 춘천(19차) 등 각 지역을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방문해 유권자를 만나는 식이었다. 특정 부처의 업무보고라는 틀은 사라지고, 대통령의 지역 순방에 가깝게 행사 성격이 바뀌면서 대선을 방불케 하는 지역 정책 발표가 잇따랐다.

펼쳐놓은 게 많으니, 수습할 것도 산더미다. 대통령실의 바람과 달리, 결국 제22대 총선은 야당의 압승으로 끝났고, 민생토론회라는 이벤트 동안 대통령이 언급한 상당수 정책이 공수표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애초에 대통령이 언급할 때부터 법 개정을 전제하고 내놓은 정책이 많아서다. 대통령은 중립 의무가 있는 만큼 직접적으로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해 다수당이 된다면 이런 정책을 펴겠다’고 언급할 수 없다. 대신 “정부는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라고 말하되, 세부 내용을 뜯어보면 ‘총선을 이기는 것’을 전제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총선 참패로 ‘전제 조건’이 무너지면서 실행 여부가 불투명해진 정책이 상당하다.

가장 대표적인 정책이 각종 감세 약속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4차 민생토론회에서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를 주장했고, 배당소득 분리 과세를 위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 자사주 소각을 유인하기 위한 법인세법 개정 등을 통해 ‘기업 밸류업(가치 상승) 프로그램’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를 위한 각종 세법 개정안은 여소야대로 구성된 제22대 국회를 통과하기가 어려울 전망이다. 특히 금융투자소득세는 제21대 국회에서 여야가 ‘2년 유예 후 2025년 시행’으로 합의했던 내용을 정부가 뒤늦게 ‘폐지’로 선회하면서 야권이 ‘정부·여당의 일방적 합의 파기’라고 비판해 합의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3월19일 21차 민생토론회에서 발표한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 전면 폐지’도 법 개정이 필요한 내용이다. 부동산 공시가격은 보유세(재산세·종합부동산세)와 건강보험료 등이 연동되는 자산 평가 기준이다. 윤석열 정부는 집권 첫해부터 단계적으로 실시되던 공시가격 현실화(시장가격에 가깝게 조정하는 것)를 중단했고, 민생토론회에서 끝내 이 로드맵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수도권 고가 주택 소유자들에게 민감한 내용인 만큼, 사실상 수도권 총선을 겨냥한 감세 정책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공시가격 현실화 로드맵을 법적으로 없애기 위해서는 부동산공시법을 개정해야 한다. 이 역시 총선 참패로 야당의 협조 없이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민주당이 부동산 공시가격과 관련해서는 논평을 자제하고 있으나, 총선 압승을 거둔 상황에서 ‘부자 감세’ 논란이 있는 부동산공시법 개정에 쉬이 동의하기란 어렵다.

관권 선거 논란 한동안 이어질 듯

재건축·재개발 활성화를 비롯한 부동산 부양 정책은 민생토론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반복해서 꺼낸 화두였다. 총선 직전인 4월8일에는 ‘도시 주택 공급 점검회의’를 열어 민생토론회에서 언급한 정책을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선거에서 부동산 표심을 자극하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들 정책 역시 ‘법 개정’이 필수다. 예를 들어 재건축 안전진단 통과 의무시기 조정, 조합 설립 시기 조정 등은 도시정비법을 개정해야 하고, 도시형생활주택 규제 폐지와 소규모 주택 정비 활성화 등을 위해서는 주택법과 소규모주택정비법을 개정해야 한다(〈시사IN〉 제854호, ‘재건축은 어쩌다 총선용 선심이 되었나’ 기사 참조).

3월21일 참여연대 회원들이 윤석열 대통령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선관위에 신고했다. ⓒ연합뉴스

법 개정과 별개로 대규모 재정이 소요되는 각종 개발 공약도 현실화 가능성이 떨어진다. 이번 민생토론회 ‘전국 일주’에 가장 자주 동원된 인물이 바로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이다. 재건축·재개발 정책, 각종 철도교통 정책, 기존 철도·도로 지하화 정책, 지역별 개발 현안 대응까지 국토교통부의 손을 거쳐야 하는 사안이 많아서였다. 2월26일 국토교통부는 그동안 윤석열 대통령이 민생토론회에서 언급한 교통정책을 총정리해 ‘교통 분야 3대 혁신’이라는 정책 목표를 설정하고 향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GTX의 지방 버전인 ‘x-TX(충청 CTX, 대구·경북 DTX 등)’ 확대, 수도권 광역교통 개선, 그리고 철도·도로 지하화 통합 개발 등이다. 정부는 이들 정책 대부분을 적극적인 민자 투자를 통해 현실화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정책 수혜 대상이 주로 수도권에 몰려 있다는 점, 아무리 민자 개발이라 하더라도 정부 재원이 상당 부분 소요된다는 점이 비판받았다. 결과적으로 이들 정책 발표 역시 총선 패배로 전반적 재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다.

민생토론회로 포장된 지난 3개월간의 행보는 결국 총선에서 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민생토론회’라는 틀을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4월16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을 통해 처음으로 이번 총선 결과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혔다.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말했지만, 이날 발언 대부분은 ‘민생토론회’를 통해 공개한 총선용 정책을 일일이 언급하며 ‘부족했다’ ‘미흡했다’ ‘더 세심히 챙기지 못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재건축·재개발 규제완화(2차, 21차), 주식시장 정책(4차), 원전산업 지원(14차), 장학금 확대(17차), 늘봄학교(9차) 등을 언급하며 ‘정부가 노력했지만 기대에 미치진 못했다’고 갈음했다. 더욱이 “(앞으로) 민생토론회를 통해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넣겠다”라는 말을 남기며 ‘민생토론회’ 형식을 앞으로도 이어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총선 패배와 별개로, ‘민생토론회’ 형태에 대한 관권 선거 논란은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민주당은 지난 3월 윤석열 대통령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서울경찰청에 고발했고, 참여연대와 경제정의실천연대도 각각 윤 대통령을 선관위에 신고(공직선거법 위반)했다. 이들 신고 건은 서울경찰청으로 이첩되어 수사가 진행 중이다.

김동인 기자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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