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망 위기서 절명 선택한 ‘지식인’의 여정 보여주고파”

강성만 기자 2024. 4. 2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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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연구교수 ‘매천 황현 평전’ 발간
“매천은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 기반
‘매천야록’ ‘오하기문’ 등 역사서 집필
자결 뒤 ‘매천집’ 발간 과정은 첩보전”
정은주 연구교수. 정은주 제공

한말 우국지사이자 ‘한국 근대사의 보고’라는 평가를 받는 역사서 ‘매천야록’ 저자인 황현(1855~1910)의 일대기를 다룬 책 ‘매천 황현 평전’(소명출판)이 최근 출간되었다. 한말에 긴밀히 교유한 사대가(추금 강위, 영재 이건창, 창강 김택영, 매천 황현) 평전 시리즈의 하나로 기획된 이 책은 고전문학 연구자가 쓴 첫 황현 평전이기도 하다.

‘새와 짐승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세상 이미 망해 버렸다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회고해 보니/ 인간 세상 글 아는 사람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황현이 1910년 한일강제병합 소식을 듣고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 중 일부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글 아는 지식인의 노릇이 뭔지 묻는 이 작품은 그 뒤로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환기하는 상징적인 시구로 자리 잡아왔다.

‘시골 선비’ 황현은 평생 벼슬한 적도 없고 생의 대부분을 고향인 전남 광양과 구례에 묻혀 살았지만 그가 남긴 책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은 한말 연구자들이 지나칠 수 없는 기록의 보고이다.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매천야록’은 국사편찬위원회가 1955년에 낸 한국사료총서 1집 간행물로 선정되었고 2019년에는 황현의 여러 저술이 문화재로 등록되기도 했다.

매천 황현 평전 표지.

“흔히 황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강직한 선비 이미지 잖아요. 황현 사진을 보면 눈빛이 굉장히 날카롭기도 하고요. 이번 책에서 꼿꼿한 성품과 냉철한 비판 정신을 겸비한 선비 이미지 외에 황현의 진솔한 인간적인 모습도 함께 살피려 했습니다. 평범한 시골 선비였던 황현이 국망의 위기에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고자 절명을 선택하는 여정도 보여주고 싶었죠.”

지난 25일 전화로 만난 저자 정은주(사진) 영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에게 어디에 중점을 두고 평전을 썼는지 묻자 나온 답이다. 조선 후기 실학을 주제로 성균관대 한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황현을 새로 공부하는 마음으로 이번 평전을 썼다고 했다.

27살 되던 1882년에 보은과 개성 출신 문인 박문호·김택영과 북한산성을 오른 황현이 겁을 먹고 혼자만 백운대 등반을 포기했다든지 그의 아들과 함께 괴석 수집에 큰 열의를 보였던 점 등은 지은이가 이번에 드러낸 매천의 새로운 인간적 면모일 듯하다. “황현이 백운대에 못 올랐다는 내용은 책을 쓰면서 박문호 문집에서 확인했어요. 이 유람에 대해 황현이나 김택영 모두 시를 남겼지만 자세한 정황은 남기지 않았죠.”

황현이 서울의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그는 “황현은 사람에 대한 정이 많았다. 자기가 좋아하던 이가 유배되거나 죽었을 때는 먼 길이라도 달려가 위문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이게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의 기반이 되면서 매천야록과 같은 역사서를 가능하게 했다는 해석이다. “황현의 인적 네트워크가 서울에서 구례까지 촘촘하더군요.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었고 한번 교유하면 평생 갔어요. 매천야록에는 한말 의병장이자 유학자인 최익현이 일본군에 체포되던 상황이 상세한데요. 구례의 한 상인이 서울에서 목격하고 들은 이야기를 황현에게 전해주었죠. 황현은 다양한 사회적 계층의 취재원을 통해 모은 자료를 기반으로 책을 쓸 수 있었죠.”

지난 2월 한·중·일 삼국 자료를 토대로 청일전쟁(1894~5) 연구서를 낸 조재곤 박사는 한국 쪽 자료로 매천야록을 신뢰하는 이유를 두고 이렇게 밝힌 바 있다. “황현은 청일전쟁 전투가 있었던 성환 지역을 직접 답사까지 하고 기록을 남겼어요. 당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준엄한 평가 능력을 갖췄고 상상력도 뛰어났어요.”

평전 지은이는 황현 저술의 원동력으로 신문 애독과 신학문에 대한 관심도 꼽았다. “황현은 서양 역사책을 열심히 보고 국내외 정보 습득 수단으로서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신문을 애지중지했어요. 1894년부터 신문을 빌려보다 1904년 이후엔 넉넉지 못한 가세에도 신문을 직접 구독했더군요. 신문 자료를 통해 안중근 열사 의거와 공판에 대한 상세한 기록도 남길 수 있었죠. 신문을 남에게 빌려줄 때는 ‘빌려준 사람이 눈썹 찡그리지 않게 조심히 보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죠.”

황현이 스크랩한 안중근 의사 관련 기사들.

평전에는 절명 1년 만에 황현 글을 모은 ‘매천집’이 중국 망명 중인 김택영에 의해 출간되어 비밀리에 국내 반입된 경위도 소상히 담겼다. “책 발간 과정이 마치 첩보전 같았어요. 일제 총독부 검열을 피하려고 책 발간 자금을 중국에 나눠 보냈고 인쇄된 책을 국내에 반입할 때도 여러 차례 나눠 발송했더군요. 이런 주도면밀함에도 매천집 초판 450권 중 절반은 일제에 압수되었죠.”

지은이는 황현이 국망의 실상을 낱낱이 기록한 데는 지식인으로서 사명감이 컸던 것 같다고 했다. “황현이 손자가 태어났을 때 쓴 시가 있는데요. 자신이 조부와 부친에게 받았던 것과 같이, 그 또한 천 권의 책을 손자에게 전해주어 손자가 식자인(지식인) 소리를 듣기 바란다는 내용이 있어요. 그만큼 황현은 스스로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세상에 대해 늘 관심을 가지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생각에서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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