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 솟구치는 산에서 중남미 사회의학으로 [주기율표 위 건강과 사회]

김명희 2024. 4. 2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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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국립보건의료서비스를 도입하려 했다. 칠레 의사협회는 의사의 자율성과 사적 진료 행위가 제한되면서 자신들의 특권이 훼손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부지방에 미세먼지 경보가 발령된 3월29일, 서울시청 앞 전광판에 미세먼지 수치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입춘, 경칩, 춘분이 지나도록 쌀쌀한 날씨가 이어지더니 드디어 봄의 전령사가 도착했다. 백련사 동백도, 산동마을 산수유도, 화엄사 홍매화도 그 주인공이 아니었다. 고비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 황사와 미세먼지야말로 한반도에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진정한 전령사다. 대기 중 미세먼지 농도가 세계 1등이었다는 그날, 거리에는 다시금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넘쳐났다. 나도 오랜만에 서랍 속에서 KF 94 마스크를 하나 꺼냈다.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에 열린 한 행사에서 기념품으로 받은 것이었다.

포장지에는 커다랗게 ‘은나노’ ‘살균·항균’이 적혀 있었다. 원소기호 47번 ‘은(銀, Ag)’의 살균효과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있다. 실제로 설파디아진 은(silver sulfadiazine)은 화상이나 피부 궤양에 감염된 박테리아와 곰팡이를 치료하는 외용제로 쓰인다. 세간에는 유럽 흑사병 유행 때 귀족들의 사망률이 더 낮았던 것이 그들의 은 식기 덕분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나노 기술을 활용하여 만들어진 은나노(AgNP) 물질은 산화 스트레스를 촉발하고, 단백질 기능부전, 세균의 세포막과 DNA 손상 등을 통해 미생물 세포를 손상시킴으로써 살균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마스크 표면에 코팅된 은나노 물질이 정말 코로나19 바이러스 차단에 효과가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노 물질의 인체 유해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금속성 나노 물질이 여러 동물실험에서 독성을 보여주었고, 생태계 먹이사슬을 통해 동물에 축적된다는 연구들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나는 다른 ‘평범한’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사실 은의 항균효과는 다른 명성에 비하면 하찮다. 은은 어떤 금속보다도 전기와 열 전도성이 좋아서 산업적 가치가 매우 높다. 과거에는 진공관을 만드는 데, 최근에는 각종 반도체 설비와 회로, 부품을 제작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산업기술 발달 이전에는 금과 함께 귀금속으로서의 위세가 높았다. 상대적으로 희소한 데다 말 그대로 ‘은빛’의 매끄러운 표면과 광채, 섬세하게 가공하기 쉬운 무른 속성은 화려한 장식품과 장신구, 특히 고급 식기를 만들어 부를 과시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수저 계급론의 원조인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라는 영어 표현은 역사적인 은의 위세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에는 구리·납·금·아연 등을 정련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산출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과거에는 황화물 형태인 휘은석을 채굴하여 은을 얻었다. 이미 기원전 3000년께부터 은광석 채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서구 사회의 경우, 로마제국 시대에는 지금의 스페인, 중세 시대에는 중부 유럽이 주요 채굴 지역이었다. 하지만 매장량에는 한계가 있었고(그래서 ‘귀금속’ 아닌가), 스페인이 식민지 정복에 나서면서 라틴아메리카는 은 채굴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콜럼버스 이래 엘도라도의 신화를 좇아 바닷길에 나선 유럽인들의 라틴아메리카 원정은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1545년 안데스산맥, 지금의 볼리비아 포토시(Potosí)에서 드디어 ‘은이 솟구치는 산’을 발견했다. 16~17세기 동안 칼과 십자가로 무장한 정복자들이 몰려들면서 포토시는 식민지의 허브이자 과시와 사치의 전당이 되었다. 정복자들이 도착한 지 불과 30년 만에 이곳 인구는 약 12만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당시 런던·파리·마드리드·세비야 인구와 비슷하거나 더 많은 수준이었다.

4월4일 볼리비아 포토시의 리코에 있는 파일라비리 광산에서 일하고 있는 광부들. ⓒAP Photo

광산에서 은을 캐고 도시 밑바닥에서 허드렛일을 한 것은 고향에서 강제로 끌려온 선주민(인디오)들이었다. 광산의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안데스산맥의 가혹한 추위와 갱도의 열기 속에서 은 채굴을 위해 사용한 수은중독·사고·영양실조·감염병이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포토시까지 끌려오는 도중에 길에서 죽어간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300년 동안 선주민 약 800만명이 은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불순분자 의사’ 명단 만든 칠레 의사협회

은이 바닥나고 정복자들이 떠나버렸을 때, 포토시는 은빛 영화는 고사하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곳으로 남게 되었다. 소위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이후, 이처럼 자원과 생명을 수탈당한 지역은 포토시 하나만이 아니었다. 우루과이 출신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1971년 저작 〈라틴아메리카의 잘려진 정맥〉에는 지난 500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이 겪어온 가혹한 수탈과 피정복의 역사, 그러면서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투쟁이 담겨 있다. 이 역사는 책 바깥의 현실로 이어진다. 이 책은 우루과이 군사정권하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이웃한 칠레·아르헨티나·브라질 등 라틴아메리카 전역이 미국을 등에 업은 군사독재, 권위주의 정부의 폭력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작가는 1973년 군사 쿠데타 이후 투옥되었다가 강제 추방 길에 올랐다. 내가 가진 1997년 영어 번역본에는 이사벨 아옌데의 서문이 담겨 있다. 칠레 출신의 저명한 작가이자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로 살해된 살바도르 아옌데 전 칠레 대통령의 조카다. 그녀 역시 1973년 쿠데타 직후 급하게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이때 책 단 두 권만 급히 챙겨서 나왔는데, 하나가 칠레 국민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또 다른 하나가 바로 이 책이었다고 한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의사 출신 정치가였다. 의대생 시절부터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고, 1937년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38년에는 인민전선 정부에서 보건장관을 맡았다. 장관 재임 당시 그는 〈칠레인의 의료-사회적 현실〉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이 옷을 사고 가족들을 먹여 살릴 만큼 충분한 소득이 없고, 노동자들은 가혹한 근로조건과 고용 환경에서 보호받지 못하며, 노동계급 가정은 주거 환경과 위생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바로 이러한 조건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수준의 높은 영아사망률과 불건강으로 직결된다고 분석했다.

이 책은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고전 저작 중 하나로 꼽힌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은 건강과 질병에 대한 생의학적 모델의 한계를 비판하며 건강의 사회적·구조적 결정요인에 초점을 둔다. 이는 의학의 세부 분과라기보다 사회정의라는 철학적 지향으로부터 건강 형평성과 보편적 의료보장을 추구하는 학문 분야이며 동시에 사회운동, 정치적 입장이기도 하다. 기존 보건의료 체계와 지식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이론적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임상의사, 연구자, 활동가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이렇게 독특한 흐름이 발전한 것은 19세기 유럽 공중보건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지만, 지난 500년간 식민 지배와 수탈의 역사에서 비롯된 극심한 사회 불평등과 저개발이라는 현실, 그리고 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 엘리트들의 열망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30~1940년대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을 이끈 것은 진보적 의사들이었고, 아옌데는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칠레의 작가이자 인권운동가인 이사벨 아옌데. ⓒAP Photo

물론 의사 전체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수의 의사들은 의료개혁에 적대적이었다. 1970년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국립보건의료서비스를 도입하려 했을 때, 칠레 의사협회는 이로 인해 의사들의 자율성, 사적 진료 행위가 제한되고, 지역사회 참여나 팀 접근 같은 조치 때문에 의사의 특권이 훼손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72년에는 의사협회에서 아옌데를 제명했고(그가 의사협회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음에도), 1973년 8월에는 아옌데의 사임을 요구하는 의사 파업을 조직했다. 심지어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 성공 후에는 축하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피노체트 정권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불순분자 의사’들 명단을 만드는 데에도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 쿠데타 직후 보건부, 칠레 의대와 보건대학원에 소속된 많은 의료 전문가와 학생들이 고문당하고 투옥되었다. 산티아고 도심에는 보건의료 종사자 전담 구금 시설이 존재했을 정도다. 칠레 의대생 100명 이상이 피노체트 정권에서 살해당하거나 실종되었고, 해외로 망명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아직까지 잘 모른다.

하지만 이 암울한 시대에 이웃 브라질에서는 조용한 변화의 조짐이 꿈틀대고 있었다. 군사정권의 폭력적 통제가 조금씩 느슨해지는 사이, 사회의학(브라질 용어로는 ‘집단 건강’) 분야의 주요 인물들이 감시의 눈길을 피해 활동을 넓혀나갔다. 특히 지방분권 과정은 다양한 지역사회 건강 프로젝트를 가능하게 했고, 이를 통해 보다 평등하고 공정하며 효과적인 건강 개선 모델을 만들 수 있었으며 사회의학 그룹과 지역사회 활동가, 노동조합, 보건 분야의 기술관료들이 연계하며 서로를 성장시키는 경우도 늘어났다.

1930~1940년대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 운동을 진보적 의사들이 주도했다면, 1970년대 브라질에서는 훨씬 다양한 주체들이 등장했다. 인간해방과 이론적 실천을 강조한 교육 사상가 프레이리, 의료 분야의 권력과 지식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수행한 미셸 푸코의 영향을 받으며, 의료 전문직의 자기 충족적 정치에 대한 비판이 발전했고 보건의료 정책 ‘참여’와 ‘정책의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브라질 국립보건서비스의 탄생

이러한 흐름은 1980년대 거대한 보건 개혁운동으로 이어졌다. 사회의학 지향의 보건의료 학술·전문가 조직은 노동조합, 사회단체 등의 개혁 세력, 다양한 지역사회 풀뿌리 조직들과 느슨한 연합을 구축했고, 이를 통해 국가와 국가기구, 그리고 보건의료 의사결정 절차를 민주적으로 변화시키려 했다. 1986년 행정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제8차 전국건강회의(National Health Conference)는 여러모로 기념비적 행사였다. 20년 동안 지속된 권위주의 정권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의 문이 열리는 시점에서, 이 행사는 보건의료 전문가와 정책 관료만이 아니라 시민단체, 노동조합, 지역사회 대표자 등 다양한 이들에게 개방되었고 전국에서 4000명 이상이 참여했다.

1986년 브라질 행정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제8차 전국건강회의가 열렸다. ⓒENSP-FIOCRUZ

나흘 동안 참가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거듭한 끝에, 바로 이 자리에서 보편적 의료보장체계인 브라질 국립보건서비스(SUS)의 청사진이 탄생했다. 이 내용은 1988년 개정 헌법에 보편성·포괄성·형평성·탈중앙화·사회적 참여라는 5대 원칙으로 담기게 되었다. 마지막의 ‘사회적 참여’ 원칙은 이후 연방·주·지역 단위의 ‘건강위원회’로 가시화되었다.

위원회 참여자의 절반은 시민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정부와 보건의료계 인사들로 구성되며, 여기에서 주요 보건 의제들을 논의하고 예산을 심의하도록 했다. 국가보건의료 체계의 앞날을 바꾸는 중요한 의사결정이 다양한 참여자들의 숙의와 참여 과정을 통해 공개된 토론의 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나, 건강위원회를 통해 보건의료 정책 과정을 민주화하고 의료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강화한 것은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가장 인상적인 성취 중 하나로 여겨진다.

2000년대 중반, 나는 브라질 노동자 건강 문제를 연구하는 미국 동료의 소개로 상파울루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그의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70년대 사회의학 부흥기에 의대생으로 열심히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다닐로 선생님은 이후 산업의학을 전공하고 주 정부의 근로감독관으로 20년째 일해오고 있었다.

그는 마침 국영 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에 노동자 교육을 하러 가는 날이라며 나를 데리고 갔다. 노동자당 집권 이후 고용평등법이 실시되면서 생산 현장에 여성 노동자 진출이 늘어나 이들을 위한 교육을 노조에서 요청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과연 말로만 듣던 삼바의 열정인가.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인이 보기에 지나치게 활발한 강의와 토론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예의 바른 외국인 손님으로 사회적 미소를 지으며 두 시간을 견뎌냈다.

그는 인권변호사인 친구가 노동자당 후보로 지역구 선거에 출마한다며 저녁에 열린 출정식에도 나를 데려갔다. 록밴드 공연도 정좌한 채 감상하는 나에게, 춤과 음악, 격정적 허그와 볼 키스가 난무하는 정당 모임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회의학이 이런 것이라면 나는 못하겠다고 선언해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내향적인 보건대학원 교수 엘레노 선생님을 만나 위기를 넘겼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역시 오랫동안 노동자당 활동을 해왔고 대학에서 지역사회보건을 가르치며 노동자 건강센터 프로그램 조직에 깊숙이 관여해온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전체 의사 사회에서 자신들은 소수파라고 털어놓았지만, 오랜 시간 전문 분야와 삶에서 실천을 지속해온 ‘사회의학 선배’들의 모습은 새내기 연구자였던 나의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지배 엘리트라는 계급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오랫동안 실천적 지식인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선지자적 자기희생이라기보다,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의 시민사회·노동조합 활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얻게 된 연대 의식 및 비판적 자기성찰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고유한 지향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부와 의사들의 극한 대립에서 시민참여, 연대운동, 보건의료 정책의 민주화, 의료의 위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 같은 것들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시민들에게는 그저 ‘인질’의 역할이 부여되었을 뿐이다. 답답한 마음에, 지구 반대편 라틴아메리카 사회의학의 정신을 다시금 곱씹어보았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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