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위험한 줄타기… 때론 상처 끌어안는 굳건함이 필요하다
사랑 사건 오류
김나현 장편소설 | 문학동네 | 420쪽 | 1만7500원
마은의 가게
이서수 장편소설 | 문학과지성사 | 272쪽 | 1만6000원
페이스
이희영 소설 | 현대문학 | 192쪽 | 1만5000원
시인 T.S. 엘리엇은 1922년 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썼다. 만물이 소생하는 따사로운 계절에도 문명의 야만성, 전후 현대 유럽의 정신적 황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4월은 잔인함을 내포하는 달이 돼버렸다. 4월이면 떠올리게 되는 사건이 있다. 올해는 세월호 참사 10주기였다. 과연 우리 사회는 지난 10년간 얼마나 안전해졌을까? Books가 매달 선보이는 ‘지금 문학은’ 특집 이달의 키워드는 ‘안전’이다. 김나현·이서수·이희영의 소설은 안전하지 않은 세계에서 안녕하지 못한 채 분투하는 우리 모습을 거울처럼 비춘다.
◇참사, 잃어버린 기억을 불러오다
김나현의 ‘사랑 사건 오류’(문학동네)는 대형 쇼핑몰 화재 참사가 배경에 깔렸다. 이 사건을 중심으로 은하·수호·라이·초록 남자 등 상처 입은 네 인물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얽힌다. 각각의 세계에서 인물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첫 장은 은하가 챗봇 루미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다. 루미는 은하가 배우자가 될 뻔했던 수호와 함께 개발한 인공지능 챗봇이다. 수호는 은하와의 결혼식 당일 오전, 잃어버린 반지를 다시 사기 위해 쇼핑몰에 갔다가 화재 참사의 피해자가 된다.
둘째 장은 수호의 이야기다. 여태까지 은하와 루미의 대화는 수호가 개발한 자동 창작 프로그램 ‘은하’가 만들어낸 이야기였다는 반전. 은하는 쇼핑몰 화재 참사로 죽은 수호의 연인이다. 수호는 불길이 치솟는 화재 현장에서 열리지 않는 문 뒤에 연인 은하를 남겨두고 대피했고, 홀로 살았다. 개발자인 수호는 취미로 소설을 쓰던 은하를 자동 창작 프로그램으로 되살려 낸다.
김나현은 세계 속 세계를 끝없이 만들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독자는 무엇이 ‘진짜 현실’인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기술을 통해 망자를 다시 세계로 불러내는 그 절박한 마음이 와 닿는다.
◇하루하루의 삶이 위험한 줄타기
이서수의 ‘마은의 가게’(문학과 지성사)는 잔잔한 일상에서 ‘훅’ 하고 치고 들어오는 생존의 위협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그럴 때 마은과 독자는 새삼 느낀다. 우리 일상은 결코 잔잔한 적 없었다는 것. 언제나 위험천만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설은 카페를 차린 여성 자영업자 ‘마은’의 고생담이자 분투기다. 얼마 되지 않는 자본금으로 목이 좋지 않은 골목에 카페를 차린다. 그는 고시원 방값을 아끼기 위해 방을 빼고, 밤이면 카페에 텐트를 치고 잠을 청한다. 동네 사람들은 젊은 여성 사장이 카페에서 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쉬쉬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은은 자다가 문득 ‘시선’을 느낀다. ‘고개를 돌려 바깥을 보았다. 전면 창과 주차된 카니발 사이 좁은 공간에 모자를 깊숙하게 눌러쓴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참다 못한 마은은 중고로 방범 카메라를 설치하는데, 그 역시 누군가가 원격으로 엿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은과 동네의 젊은 여성 사장들이 나누는 대화가 압권이다. ‘우리 고모가 혼자 미용실을 하거든요. 내가 꽃집을 하겠다고 했을 때, 고모가 제일 먼저 비상벨을 꼭 달라는 말부터 하더라고요… 여자 어른들만 아는 건데 나한테도 알려준다는 식이었어요.’ ‘구전설화처럼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 같네요’ ‘그런 식으로 서로를 지키는 거예요. 입에서 입으로 속삭이듯 말해주면서’
◇상처를 받아들이는 굳건함
이희영의 ‘페이스’(현대문학)는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언제든 재난에 휘말릴 수 있고, 누군가의 타깃이 될 수 있는 불안한 세계. 소설은 이런 세계에서 어떻게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화두를 던진다. 청소년 화자의 입을 빌려 쉬운 언어로 쉽게 써낸 점이 묘미다.
다른 모든 건 볼 수 있지만 내 얼굴만 보지 못하는 주인공 시울. 시울은 사고로 흉터가 생기는데 이를 계기로 내 얼굴 속 흉터는 볼 수 있게 된다. 시울은 흉터를 통해 전에 보지 못했던 나 자신을 볼 수 있게 돼 오히려 뛸 듯이 기뻐한다. 시울은 “흉터는 고통의 시간을 지나왔다는 상징이니까, 굳이 감춰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나는 인간이 스스로를 정확히 보는 게 의외로 힘들다고 생각해. 그런데 어떤 사건이나 계기로 인해 비로소 보일 때가 있어.”
이희영은 이렇게 쓴다. ‘인간은 모두 삶의 불확실성을 지닌 채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이겠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기대가 될 수 있다. (중략) 흉터를 당당히 제 것으로 받아들이는 굳건함이 필요한 세상이다.’
개인에게 굳건함이 요구되고, 소중한 이의 죽음을 ‘내’가 기억하고 되살려야 한다. 안전하지 않은 세계에서 나를 지키는 것은 결국 ‘나’인 상황이 펼쳐진다. 작가들이 보는 세계가 이러하다. 어쩌면 지금, 이곳은 아직 안전하지 않다고 소설들이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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