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화 시대 노인 일자리] 평균 연령 67세, 최고령 87세…“이곳이 인생 2막 출발점이죠”

신수민 2024. 4. 27.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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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윤연례(72)씨가 진형중고등학교 고2 영어 시간에 선생님 강의를 열심히 받아 적고 있다.
“준비를 해야 기회를 잡죠. 놓치고 땅만 치고 있기엔 아직 너무 젊잖아요.”

오후 6시. 박연화(63)씨는 오늘도 이 시간에 학원 문을 나섰다. 이달 초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학원에 등록했다. 그는 사실 동년배 사이에서 소문난 ‘고스펙’ 60대 취준생이다. 사회복지사 2급에 간호조무사 자격증도 보유 중이다. 그런 박씨가 최근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간호조무사 실습을 했던 병원에서 “앞으로 3년간 같이 일해 보자”고 제의해 왔기 때문이다. 3년 근무 경력을 쌓으면 요양원 등에서 간호 업무를 할 자격이 생기는 만큼 박씨에겐 절호의 기회다. 박씨는 “진짜 이렇게 ‘인생 2막’이 펼쳐진 건 학교에 다니기로 결심하면서”라고 회고했다.

빼곡히 적혀 있는 윤씨의 예습 복습 노트. 신수민 기자
박씨는 2017년 진형중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고졸 학위를 땄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 진형중고는 학력 인정 평생교육시설이다. 학급 평균 연령 67세, 최고령 87세인 이 학교는 중고교 과정을 학년당 8개월씩 진행해 중졸의 경우 2년 만에 고교 학위를 딸 수 있다. 늦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배워 조금이라도 더 일하려는 6070 만학도들의 ‘도전, 삶의 현장’이자 ‘취업 분투기’의 최전선인 셈이다.

황정인(61)씨는 처음부터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진형중고 입학을 결심했다. 간호조무사 자격증 취득을 위한 학력 요건이 고졸 이상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서다. 이후 황씨는 고졸 학위를 딴 뒤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취득한 데 이어 병원 취직까지 하게 되면서 간호조무사의 꿈을 이뤘다. 늦깎이로 도전에 성공한 건 홍일순(70)씨도 마찬가지. 진형중고 졸업 후 충주대 영어과에 진학해 학사 학위까지 받은 뒤 현재 초등학교 영어 강사로 활동 중이다.

실제로 진형중고 졸업생의 절반가량이 대학에 지원하고 있고 합격률도 90%에 달한다. 또 졸업생 다섯 명 중 한 명은 취업에도 성공했다. 학교 관계자는 “지난 4~5년 새 졸업생 중 취업자 수가 50% 이상 늘었다”며 “예전엔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입학하는 만학도들이 많았던 데 비해 최근엔 취업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그러다 보니 입학 경쟁률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배워서 남 주나. 배워서 일하자’는 모토가 노장년층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다. 지난해엔 고교 364명 모집 정원에 100명 넘게 초과 지원했을 정도다. 홍형규 교장은 “재취업을 원하는 6070세대가 원하는 일자리 수준이 갈수록 올라가다 보니 기초학력은 물론 심화 학습에 대한 욕구도 커지면서 학구열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고 전했다.

1교시 영어 수업이 끝나자 고윤찬(72)씨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화장실 갈 새가 어딨어요, 컴퓨터 수업 가야죠.” 수업이 시작되자 학생들이 일제히 엑셀 화면을 켰다. 선생님 말을 따라 저마다 마우스를 분주하게 움직였다. 최윤정 부장은 “최첨단 기술 시대가 되다 보니 아무래도 컴퓨터 조작 방법 등을 익히려는 욕구들이 강하다”며 “취업을 위해서도 엑셀 등 기초 지식이 필수라고 여겨지면서 그 어느 수업보다 열기가 뜨겁다”고 말했다.

고씨의 아내 박경복(67)씨도 이렇게 대학에 진학했다. 박씨는 지난해 진형고를 수석 졸업한 뒤 숭의여대 사회복지학과에 재학 중이다. 박씨처럼 졸업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전공 1순위는 사회복지학이다. 초고령화사회를 맞아 돌봄·요양 등의 수요가 크게 늘고 있는 만큼 일자리를 얻기도 상대적으로 용이할 것이란 판단에서다.

“처음엔 아무리 외워도 돌아서면 까먹길 반복하니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어 눈물도 많이 흘렸죠. 그런데 100번은 외워야 내 것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학원 문을 나서던 박연화씨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진형중고 재학 시절을 떠올렸다. 그러곤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역시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더라고요. 저의 경력 쌓기는 이제 시작입니다. 열심히 쌓고 또 쌓아 원하는 일자리를 꼭 찾을 겁니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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