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창 떨어진 아들에게 등산화 건넨 레인저, 21년만에 만나다

서현우 2024. 4. 26.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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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조난자와 구한자] 지리산 세석
송동주 레인저와 김왕태씨 부자, 21년 만에 재회

조난. 문자 그대로 재난을 만났다는 뜻이다. 재난의 크기는 생명에 즉각 위협을 줄 정도로 클 수도 있고,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로 작을 수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똑같은 건 하나 있다. 바로 어떤 도움이든 조난자들에겐 매우 귀중하다는 점이다.월간<山>은 등산 중 조난을 당한 이들과 이들을 구하려고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아무리 작은 도움의 손길이라도 모두 귀중한 선의며 아무리 작은 조난이더라도 남들에겐 큰 교훈을 준다. 제보는 blackhouse@chosun.com. _ 편집자 주

21년 전 레인저 송동주씨(가운데)의 등산화를 빌려 산행을 마쳤던 김영성씨(왼쪽)와 아버지 김왕태씨(오른쪽).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이야기다. 김왕태씨는 2003년 8월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아들 김영성씨와 함께 지리산을 올랐다. 산행을 떠나기 전 아들과 함께 산행 장비를 점검했다. 아들이 신을 등산화가 없었다. 마침 아내의 등산화가 아들 발사이즈에 딱 맞았다.

"옳지!"를 외친 김왕태씨는 아내의 등산화를 아들에게 주고 나머지 장비는 자신의 것을 나눠준 뒤 한여름 지리산에 들었다. 백무동을 출발해 한신폭포를 거쳐 세석대피소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천왕봉에 오른 후 장터목에서 하동바위를 거쳐 다시 백무동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아들에게 지리산의 깊은 계곡과 천왕봉의 웅장함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참고로 아들의 첫 지리산 산행이었습니다."

산채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은 뒤 씩씩하게 지리산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산행을 시작한 지 30분이 지났을까. 첫나들이 폭포를 지날 때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터졌다. 아들이 신고 있던 등산화의 오른쪽 밑창이 떨어져 나가 덜렁거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등산화를 신었을 때 흔히 일어나는 경화현상이다.

"임시방편으로 노끈을 찾아서 단단히 묶고 산행을 이어갔어요. 하지만 30분쯤 지나자 왼쪽 밑창도 떨어져 나갔고, 좀 있다가 양쪽 등산화 밑창이 완전히 뜯겨 나갔죠. 포기하고 내려갈 것인지, 아니면 억지로 노끈으로 밑창과 등산화를 다시 묶고 산행할 것인지 선택해야 했죠."

당시 김영성씨. 그는 지리산 계곡물에 화끈거리는 발바닥을 담그고 산행을 더 할지 고민에 빠졌었다고 했다.

길고 험한 남은 여정을 생각하면 내려가는 것이 응당 현명했다. 아들을 슬쩍 떠봤다. 그러자 아들은 "여기까지 올라온 게 아까워서 못 내려가요. 일단 줄로 묶고 올라가요!"라고 했다. 마냥 어린아이 같았던 아들이 대견하고 흐뭇했다.

노끈으로 다시 밑창을 둘둘 말아 감고 세석대피소로 향했다. 완벽히 고친 것이 아니기에 밑창은 계속 덜거덕거렸다. 일단 대피소로 가면 본드든 뭐든 있을 것이라 믿고 줄을 고쳐 매기를 반복하며 올랐다. 세석으로 오르는 길은 그래서 두 배로 힘들었다.

"대피소에 도착하고 자리를 배정받자마자 직원 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어요. 어린 애가 등산화가 그런 상태로 올라왔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걱정 반, 격려 반 섞인 표정을 짓더라고요."

하지만 대피소에는 본드가 없었다. 걱정이 솟아날 찰나 공단 직원은 나사못과 전동 드라이버를 가져와 등산화 밑창을 못으로 고정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등산화 밑창 재질이 생고무라 나사못이 들어가질 않았다. 몇 차례 시도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대피소에 답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답이 없었다. 천왕봉을 못 가는 건 둘째 치고 힘겹게 올라온 길을 또 달랑거리는 밑창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그때 공단 직원이 "고치는 건 안 될 것 같으니 내 등산화를 신고 조심히 내려가세요"라며 자신의 등산화를 내밀었다.

중학생 김영성씨는 당시 등산스틱 대신 나뭇가지를 짚고 산행했었다.

"고마움에 눈물이 핑 돌았어요. 국립공원 직원에게 등산화는 군인에게 소총 같은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곤경에 처한 탐방객을 위해 자기 등산화를 선뜻 내준 거죠. 세상 모든 근심과 걱정이 모두 해결된 것처럼 홀가분했어요."

덕분에 김씨 부자는 빌려준 등산화를 신고 장터목을 지나 천왕봉을 올랐다. 그리고 원래 계획했던 대로 모든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빌렸던 등산화는 깨끗하게 세탁해서 대피소 생활에 필요할 법한 다른 제품들 몇 가지와 동봉해 다시 보냈다. 아들은 직접 감사의 편지를 적었다.

"너무 많이 빌려줘서 기억 안 나"

21년이 흘렀다. 그 사이 공단 직원의 이름은 기억이 희미해졌다. 김왕태씨는 다리 통증이 심해져 등산을 그만두고 골프로 취미를 바꾸면서 산에서 멀어졌다. 생업도 바빴다. 김왕태씨는 소프트 코리아란 이름의 회사 대표가 됐고, 아들 김영성씨는 국내 최대 패션 플랫폼 무신사의 파트장이 됐다.

그러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다시 조금씩 등산을 시작하게 됐다. 오래 쉰 탓인지 다리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리고 다시 지리산과 설악산을 다녔다. 물론 세석대피소도 몇 번 지났다. 그때마다 그 직원이 생각났다. 고민 끝에 지난해 가을 월간<山>에 당시 사연을 기고했다. 그 글을 본 국립공원공단 직원들은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그렇게 21년 만에 편지의 답신이 돌아왔다. 그 직원은 송동주씨. 1992년 12월 입사한 레인저로 현 국립공원공단 동부지역본부 본부장이다. 이들을 경기도 판교공원에서 만났다.

지리산 산행 당시 김왕태씨.

"당시에 저는 지리산 세석대피소 분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2003년이면 벽소령에 3명, 장터목에 4명, 세석에 4명 이렇게 직원들이 있을 때입니다."

송동주씨는 감회가 새로운 눈빛이었다. 그리고 곧 그때 그 세석을 떠올렸다. 그에게 "당시 이들 부자가 생각이 나느냐?"고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에 등산화를 빌려준 사람이 너무 많았다.

"지금이야 인터넷도 잘되고 통신도 지리산 어느 곳에서든 거의 다 잘 터지지만 당시에는 안 그랬어요. 사람들이 대부분 '지리산이 좋다더라'는 말만 듣고 덜컥 왔어요. 경험도 없고 장비도 없으니 신발 밑창이 떨어지는 경우가 정말 많았죠. 이젠 인터넷에서 등산만 검색해도 어떤 장비를 갖춰야 하고 주의할 점은 무엇인지 다 나와서 이런 경우가 극히 드물지만요. 가장 최악은 철쭉 좋은 6월입니다. 산 밑에선 안 추우니 방심하고 올라오는데 밤이 되면 엄청 춥거든요. 비라도 오면 더 큰일이고요."

"그럼 등산객들이 밑창이 떨어졌다고 할 때마다 등산화를 빌려주셨던 건가요?"

"거의 그렇죠. 사실 그런 일이 종종 있어서 저도 여러 시도를 해봤어요. 철사로 조여 보고, 낚싯줄로 묶어 보고, 본드로도 물론 붙여봤죠. 그런데 경화증상이 약하면 어느 정도 통하는데 완전 탈락되면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 등산화를 내주거나 정 내줄 게 없으면 대피소 슬리퍼를 꺼내서 주기도 했습니다."

세석대피소에서 송동주씨의 등산화를 신은 김영성씨.

그의 말에 따르면 꼭 세석에서만 수리를 해줬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먼저 벽소령에서 1차로 본드나 노끈으로 수리를 받고 세석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도저히 안 되니 여기서 2차로 철사로 수리 받고, 그래도 안 되면 등산화를 빌려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등산화를 빌려주면 어떻게 됐나요?"

"대부분 잘 돌려주셨어요. 저도 산 지 얼마 안 됐거나 큰 맘 먹고 비싸게 지른 건 주춤주춤하면서 빌려드리고, 반드시 꼭 돌려달라고 신신당부해서 보내드리고 그랬죠. (하하) 지금이야 직원들 기본적인 장비는 다 지급해 주지만 그땐 안 그랬어요. 전 직원에 신발을 주긴 했는데 경등산화만 줬거든요. 대피소 직원들은 중등산화가 필요한데 말이죠. 그러니 안 죽으려면 사비로 열심히 장비를 구매해야 됐을 때입니다.

또 반대로 신은 지 오래됐고 낡았으면 그냥 쭉 신다가 버리시라고 했어요. 한 번은 한 아웃도어 기업이 수해를 입었는데 거기 아는 사람에게 말해서 어차피 못 파는 몇십 켤레 등산화를 받아서 빌려주는 사업도 했죠."

그래서 해프닝도 있었다. 구조 요청이 접수됐는데 탐방객들에게 등산화를 다 빌려준 탓에 신을 등산화가 없었다. 여벌은 물론 동료 직원들 것까지도 내어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것이 장화였다. 장화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헐레벌떡 구조 요청한 사람에게 다가가니 직원인 줄 못 알아보고 의아해하며 "누구세요?"라고 반문하기도 했단다. 레인저가 눈밭에 장화를 신고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다.

"지금은 북한산에서 등산화와 스틱을 빌려주는 서비스를 한다고 합니다. 제가 등산화를 구해서 빌려줬던 건 그냥 산을 다니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아파서 혼자 그랬던 건데 지금은 행정적으로, 시스템을 갖춰 하는 거라 훨씬 더 좋아졌어요."

경기도 성남 판교공원에서 김씨 부자와 송동주씨가 21년 만에 재회했다.

정원 240명인데 2,000명 오던 그 시절

김왕태씨도 옛 지리산 기억을 꺼냈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지리산 전라북도 사무소에서 한 달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산악가이드는 물론 약초를 캐가는 사람을 잡고, 뱀사골 순찰을 돌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첫 기업에 입사할 때는 독일인 면접관에게 취미가 '마운틴 하이킹'이라며 합격만 시켜주면 지리산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호언장담해 합격하기도 했다. 그만큼 각별한 산이다. 그래서 코로나 시기 산행을 다시 시작했을 때 지리산을 자주 찾았다. 송동주씨가 말을 받았다.

"그때면 제가 지리산경남사무소장을 하고 있을 때네요. 경남사무소장은 대피소도 자주 올라가서 돌아보고 올 땐데요."

"그러면 알게 모르게 21년 전에도, 그리고 최근까지도 본부장님이 계속 산행을 돌봐주고 계신 셈이네요!"

한 번 웃음을 터뜨린 송씨는 다시 세석대피소 분소장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말을 쭉 들어보니 지금은 탐방객 편의를 행정적, 과학적으로 돌보고 있다면 과거에는 낭만적으로 했던 것 같다. 산불방지기간이 되면 나무데크에 오일스텐 작업을 손수 일일이 다 했다. 또 대피소에서 여성 탐방객들이 곤란해하는 상황을 자주 본 그는 사비로 생리대를 사서 비치해 두곤 했다. 정식 물품이 아니다 보니 따로 갖고 있다가 슬쩍 물어보면 원가만 받고 줬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탐방객에게 좋을 것 같은 일들을 찾아서 했다.

송동주씨는 수많은 구조의 기억을 갖고 있다. 한 번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생 19명 중 한 여성을 구조했는데 감사의 표시로 일행 전체가 대피소를 청소해 주고 갔다. 뒷줄 가운데 흰색 티셔츠를 입은 이가 송동주씨.

"세석대피소 정원이 240명인데 2,000명이 올라올 때입니다. 입산시간 지정제가 없을 때라 한밤에도 대피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면 제가 사람들을 쭉 통로에 모아놓고 '일어서세요'하고 줄을 맞춘 뒤 '앉으세요'하고 테트리스 블록 쌓듯 질서유지를 하곤 했죠. 그렇게 자고 새벽 3시부터 하나 둘 일어나 일출 보러 떠나고 나면 정말 폐허가 돼 있어요. 총 1,200장의 모포를 일일이 털어서 개고 다 정리한 뒤에야 쉴 수 있었죠. 당시 입장료를 받을 때니 저 아래에 무전해서 '제발 인원 수 좀 조절해 달라'고 하소연한 적도 있어요. 이젠 예약제가 정착돼 많이 편해졌죠."

낭만의 시대였던 만큼 등산객들도 낭만(?)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대피소가 호텔과 같은 곳인 줄 알고 구두를 신고 올라와서 신용카드를 주면서 숙박하게 해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포를 최대 3장 빌려줄 때인데 자기는 침대에서만 잔다고 20장을 빌려간 이도 있었다. 또 샤워 시설을 찾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인터넷에서 대피소의 기능과 시설이 잘 설명돼 있어 사라진 장면들이다.

송동주씨는 당시 세석대피소 분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국립공원공단이 생기기 전부터 지리산을 다녔던 한 분은 대피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천둥이 치는 날에도 대피소에서 안 자고 밖에서 텐트 치고 잔다고 해서 실랑이를 엄청 했어요. 아무래도 지리산을 '국립공원'이란 개념이 아니라 '내 지리산'이라고 받아들여서 그랬던 것 같아요."

김왕태씨도 비슷한 기억이 있었다.

"저는 한 번 장터목에서 텐트를 치고 자는데 한 부부가 새벽 내내 싸운 적이 있어요. 친구들과 밤새 참다가 직접 말을 걸었다간 괜히 화만 더 돋울 것 같아 TV 끝났다는 차원에서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죠. 하긴 저조차도 당시엔 큰 녹음기에 기타 메고 지리산을 올랐으니 지금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겠죠."

계곡물에 발 한참 식히고 올라가자 말해

얘기가 깊어질 무렵 김영성씨가 뒤늦게 자리에 합류했다. 그에게 물었다.

"혹시 당시 기억이 정확히 나시나요?"

"드문드문 기억나요. 등산화 밑창이 너덜거리는데 정말 예쁜 계곡이 있었어요. 그게 들머리부터 세석대피소까지 딱 중간 지점이었을 겁니다. 아버지 기억엔 제가 씩씩하게 가겠다고 답했다고 하는데 저는 사실 아니었어요. (웃음) 발이 진짜 너무 아파서 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식히면서 엄청 오래 고민했어요. 그랬다가 내려가도 똑같고, 올라가도 똑같을 것 같아서 아버지를 믿고 가겠다고 했던 거죠."

21년 전 지리산 세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왕태씨와 송동주씨.

"이상하네요. 제 기억엔 분명 세석까지 가는 건 무리니까 내려가자고 했는데 아들이 가자고 우겼어요. 기특하긴 했지만 걱정도 됐고요. 아마 속으론 아들을 강하게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기억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의 신발사이즈를 다시 확인했다. 김왕태씨는 270mm 이상을 신고 송동주씨는 운동화는 260mm, 리지화는 255mm를 신는다고 했다. 김영성씨는 키가 180cm 이상으로 큰데 "발은 작은 편"이라며 "지금은 255~260mm를 신고 2003년 당시에도 어느 정도 발이 컸던 편이라 송동주씨의 등산화가 잘 맞았던 것 같다"고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등산을 나섰다가 학을 떼는 경우도 많지만 다행히 김영성씨는 지금도 등산을 한다. 아버지를 따라 근교 청계산을 오르기도 하지만 보통은 자기 또래 크루들이나 결혼을 앞둔 여자친구와 함께 산을 즐겨 오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송동주씨가 조용히 말을 건네 왔다.

"제가 2009년 지리산 반달곰을 복원할 당시 처음으로 자연 상태 새끼가 탄생했을 때 울었거든요. 국립공원 생활하면서 다시는 못 느낄 보람과 감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느끼네요."

그렇게 이들은 판교공원 위로 해가 뉘엿해질 때까지 한참동안 서로를 붙잡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젠 등산화를 빌려줄 필요가 없으니 대신 신발끈이라도 고쳐 매주겠다는 송동주씨.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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