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두 ‘메리’의 치열했던 삶이여 [책&생각]

최원형 기자 2024. 4. 26.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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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SF소설가 메리 셸리
18~19세기 여성에 대한 억압에 도전했던 모녀
각자의 방식으로 운명 헤쳐 간 ‘낭만적인 무법자들’
‘근대 최초의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오른쪽)와 그의 딸로서 최초의 에스에프(SF) 소설로 평가받는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의 초상. 교양인 제공

메리와 메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메리 셸리, 열정과 창조의 두 영혼
샬럿 고든 지음, 이미애 옮김 l 교양인 l 3만8000원

18세기 계몽주의 시기 ‘여성의 권리 옹호’ 등 급진적인 정치철학을 제기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는 ‘근대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여겨진다. 메리 셸리(1797~1851)는 낭만주의 시기 열여덟 살 나이로 오늘날 ‘최초의 에스에프(SF) 소설’이란 평가를 받는 작품 ‘프랑켄슈타인’을 써낸 작가다.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 두 ‘메리’는 모녀지간이지만, 어머니가 딸을 출산한 뒤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살아서 함께했던 시간은 열흘 남짓에 불과하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은 “어머니와 딸을 각각 상이한 철학적 입장과 문학 사조를 대표하는, 서로 무관한 인물로 간주”하곤 했다. 그 결과 “셸리는 울스턴크래프트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의 맺음말에 등장하고, 울스턴크래프트는 셸리의 전기 서두에 등장”할 뿐, 둘의 연결고리 자체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미국의 작가·영문학자 샬럿 고든(62)이 쓴 ‘메리와 메리’(원저 2015년 출간)는 세밀한 취재로 두 사람의 인생과 작품을 각각 그려내는 한편 두 “생애에서 교차하는 지점들을 탐구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파고들어간 색다른 전기다.

영국 런던 근교 방직공 집안에서 둘째로 태어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기울어가는 가세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과 여러 동생들을 건사해야 하는 족쇄에 묶여 살았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했고, “아내는 남편의 말이나 당나귀와 마찬가지로 그의 재산이어서 자기 소유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이 살아야 했던 시대였다. 계몽사상이 미국혁명 등으로 분출하던 시대의 분위기 아래 메리는 존 로크, 장자크 루소 등으로부터 ‘자유’의 길을 찾았다. 인간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천부적인 인권을 지닌다면, 여성 역시 그래야 했다. 종속이 아닌 자유를 가르치는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메리는 ‘딸들의 교육에 관한 성찰’이란 글을 썼고, 유명 출판업자 조지프 존슨(1738~1809)의 후원으로 책을 출간하고 잡지에 서평을 쓰는 등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메리는 출판사에서 의뢰 비용을 보장받고 안정적으로 일감을 받은 최초의 여성 작가였다.”

1797년 여름에 화가 존 오피가 그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초상. 교양인 제공
최초의 페미니즘 저서로 평가받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 미국판의 표지. 교양인 제공
“어머니의 묘비명이 나의 첫 철자 교본이었다. 여기서 나는 읽는 법을 배웠다.” 윌리엄 고드윈이 출판한 책 ‘레스터 부인의 학교’에 실린 삽화. 교양인 제공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혁명을 까내리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고찰’(1790)을 쓰자, 메리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인간의 권리 옹호’를 익명으로 펴냈다. 책은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지식계의 호평을 받았으나, 지은이가 여성이란 사실을 밝히자 “페티코트를 입은 하이에나”(창녀란 뜻) 등 원색적인 비난과 함께 평가절하당했다. 이에 메리는 ‘여성의 권리 옹호’(1792)로 여성의 자유와 사회 정의를 연결시켰고, 프랑스혁명과 공포정치를 직접 경험한 뒤에는 ‘프랑스혁명에 관한 역사적·도덕적 견해’(1794)로 더 깊은 사유를 제시했다. 여성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사회 전 영역의 불평등과 연결되어 있다고 짚어낸 메리의 사유는 “현대 (페미니즘) 이론가들을 앞질렀다.” “가정의 영역과 공적인 영역, 가족과 정부가 연결되어 있다는 메리의 지적은 가장 뛰어난 통찰이고, 메리의 책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향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이유다.”

메리는 미국인 사업가 길버트 임레이와 사랑에 빠져 1794년 아이를 낳았으나 임레이의 배신으로 미혼모가 된다. 임레이와 관계 회복을 위해 떠난 북유럽 여행을 기록한 ‘스웨덴에서 쓴 편지’(1796)는 내면의 감정과 정치적 견해를 아울러 담아낸, 메리의 또 다른 걸작으로 꼽힌다. 두 차례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던 메리는 급진적인 사회사상가 윌리엄 고드윈(1756~1836)과 1797년 결혼한다. 결혼제도를 반대해온 두 사람에게 결혼은 일종의 타협이었다. 둘은 서로를 지배하지 않는 실험적인 결혼생활로 주목받았으나, 사회는 인습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따돌렸다.

이 두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메리 셸리다. 새어머니와의 불화, 의붓여동생 제인(뒷날 클레어로 개명)의 견제 아래 “아버지는 메리에게 글을 쓰는 것이 그녀가 받은 유산이라고, 그녀는 울스턴크래프트와 고드윈의 딸이자 두 철학자의 아이라고 가르쳤다.” 메리가 열여섯 살 때 고드윈을 존경해 찾아온 젊은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1792~1822)는 메리와 그의 가족 전체의 운명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메리와 사랑에 빠진 셸리는 약혼녀를 버리고 메리, 제인과 함께 도주 행각을 벌였고, 한때 결혼제도를 거부하는 급진주의자였던 고드윈은 딸과 절연해버렸다. 인습을 거부한 세 사람은 세상의 비난에 떠밀렸으나, “울스턴크래프트의 삶을 본보기 삼아 생활을 지탱했고, 울스턴크래프트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1831년께 그려진 메리 셸리의 초상화. 교양인 제공
메리 셸리가 직접 쓴 ‘프랑켄슈타인’ 원본 첫 페이지. 첫 문장은 “11월의 어느 음산한 밤에 나는 완성된 내 남자를 바라보았다”였다. 교양인 제공
퍼시 셸리와 메리 고드윈, 바이런이 함께 지낸 스위스 제네바의 ‘빌라 디오다티’. 여기서 메리의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했다. 교양인 제공

1816년께 세 사람은 스타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1788~1824) 등과 함께 스위스의 한 별장에 머물렀고, 임신 중이던 메리는 이곳에서 ‘프랑켄슈타인’(1818)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버림받은 피조물과 창조주의 뒤엉킨 복수 등 “인간 본성의 심연”을 파헤친 이 걸작에는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에게 거부당했으며 사회로부터 비난받은 메리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다. 이후 메리는 불안정한 셸리와의 관계, 유산, 자식과 셸리의 죽음 등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최후의 인간’(1826), ‘로도어’(1835), ‘포크너’(1837) 등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창작을 계속했다. 셸리가 ‘프랑켄슈타인’ 편집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이유로 최근까지 메리는 진짜 저자가 아니라는 비난에 시달렸으나, 남편의 사후 메리가 편집한 셸리의 시집에 대해 이런 비난이 제기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계몽사상에 뿌리를 둔 정치철학자인 메리와 낭만주의 소설가 메리는 얼핏 서로 다른 길을 간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지은이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메리 셸리의 어머니가 딸에게 끼친 영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여성이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시대에 어머니는 “미래 세대의 삶은 어떠할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더욱 정의로운 세상을 살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하고 행동했고, 딸은 평생 이 유산을 끌어안았다. ‘프랑켄슈타인’이 보여주듯 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인간(남성)의 야망과 권력에 대한 탐욕이 야기하는 해악”이며, ‘포크너’ 같은 후기 작품에서는 남성 인물들을 야망으로부터 구해내는 ‘여성적’ 가치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메리와 메리’를 쓴 작가·영문학자 샬럿 고든. 누리집 갈무리

지은이는 “현대 독자들은 두 여성이 극복해야 했던 너무나 강력한 장애물을 대부분 의식하지 못”한다는 역설을 짚는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살아낸 두 여성은 ‘무법자들’(outlaws)이었다. 그리고 그 삶은 혁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낭만적’(책의 원제 ‘Romantic Outlaws’)인 것이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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